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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96화 (96/251)

96화. 가상의 결승전

왜일까?

갑작스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과거의 파편이 떠오르는 이유는.

그건, 내가 아닌 아이리스의 기억이었다.

먼 옛날.

비단 그린 드래곤뿐만이 아닌, 다른 모든 일족을 통틀어 다시없을 괴짜가 있었다.

제 레어에 틀어박혀, 억겁의 세월을 연구에만 몰두하던 이.

결국, ‘소울 이스케이프’라는 상식을 뒤엎는 마법을 만들어내고도 우둔한 망룡 취급을 받던 이.

허나, 적어도 아이리스에게는 선구자이며 다시없을 현룡인 존재.

“상념에 빠져 있을 여유가 있나?”

“……!”

순간, 제노스의 신형이 내게로 짓쳐 들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푸른 창이었다.

가장자리가 연신 스파크를 튀겨대는 것을 보니, 최소 5써클의 마나는 쏟아부어 만든 듯싶었다.

한데, 정작 직접 마주하고 나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피피핏! 피피피피핏!

창의 궤적이 눈을 어지럽힌다.

동작은 간결하고, 속도는 쾌속했다.

아직 제노스와 나 사이에는 10미터가량의 간격이 벌려져 있었다.

현란한 창의 움직임으로 시야를 빼앗아 단숨에 거리를 좁힐 생각인가?

“…어림도 없지.”

쯔어엉!

나는 빠르게 마력 무기 하나를 만들어냈다.

“활…?”

다소 힘 빠진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마력의 활.

실력 있는 전투 마법사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마력 무구였다.

실망하기엔 이를 텐데.

상대와 거리를 벌리는 데 이만한 무기도 없거든.

쩌저적!

직후, 내가 만든 마력 활에 한기가 어려갔다.

얼음 속성의 마나를 활대 전체에 덧씌운 결과였다.

곧이어,

쩌정! 쩌저저정!

순식간에 형성된 얼음의 화살이, 언제든 쏘아져 나갈 준비를 마쳤다.

지금 내 경지로는 한 번에 이십 발.

“…흡.”

숨을 멈추고.

시선은 고정한 채.

침착하게, 시위를 놓는다.

핑!

마력임에도 가벼운 실 튕기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와 동시에.

쐐애애애애액!

이십 발의 화살이, 제노스의 신체 곳곳을 노리고 쏘아져 갔다.

채챙! 채채채챙!

예상대로 제노스는 피하지 않았다.

그 모든 화살들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쳐내고 있었다.

화살을 피해내면, 그 시간만큼 나는 또 거리를 벌릴 테니까.

차라리 부딪혀 소멸시키는 쪽을 택한 것이겠지.

허나, 이번에는 네 마음대로 안 될 거다.

화르르륵!

이번에는 내 마력 활이 붉은 빛을 띠며 거칠게 타올랐다.

다시 화염 속성의 화살로 이십 발.

그것들은 지체 없이 제노스를 향해 쇄도했다.

펑! 펑! 퍼퍼펑!

마력 활에서 생성된 화살들은, 기껏해야 2써클 에로우 마법 수준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나 제노스는 그 모든 활들을 창으로 휘둘러 쳐냈다.

자그마한 폭발음과 함께 붉은 화살들은 순식간에 소멸되어 간다.

이 시점에서, 제노스는 이미 나와 약 3미터까지 거리를 좁힌 상태였다.

창의 길이가 대략 2미터.

앞으로 한 발자국이면, 그냥 휘둘러도 녀석의 타격 범위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활을 디스펠시키지 않았다.

내 감은 틀리지 않았다.

가까워지니 보다 확실하게 보인다.

제노스의 의류 곳곳에 젖어 든, 거뭇거뭇한 물기가.

최초 화살에서 비산된 얼음의 파편들이, 이어진 불꽃들에 그대로 녹아내린 결과였다.

타이밍은, 바로 지금.

파지지지지직!

“……!”

찰나, 어마어마한 스파크가 내 양손으로 맺혔다.

활에 뇌전의 마나를 주입한다.

더 나아가 무구의 형태마저 변환시킨다.

단순한 활이 아니라, 적당한 폭발력을 지닌 뇌전의 구로.

파앙!

나는 마치 공처럼 그 뇌전의 구를 제노스에게 집어 던졌다.

이미 지근거리다.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전과 같이 휘둘러 막는다면, 이번에는 초고압의 감전이 뒤따를 테니까.

일반적인 전투 마법사에게, 이 수를 막을 방법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멈칫!

순간적으로 빽 스텝을 밟은 제노스는,

쐐애애액!

손에 쥔 마력의 창을 그대로 투창했다.

허나, 진짜 놀라운 일은 직후에 벌어졌다.

“……!”

시퍼렇게 타오르던 마력의 창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뇌전의 창이다.

뇌전을 같은 뇌전으로 상쇄시킨다.

콰아앙! 번-쩍!

충돌 직후, 어마어마한 빛무리가 주변을 잠식했다.

속성의 변환.

저건 최소 초월의 재능이 아니라면 선보일 수 없는 신위다.

하물며 그게 무(無)영창이라면…….

역시 예상이 맞았다.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름.

내 잇새로, 나지막이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라그하일.”

“…….”

섬광으로 시야는 아직 완전히 확보되지 않았지만, 청각은 멀쩡했다.

제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반응으로 확신했다.

무언이 곧 긍정이라.

놀랍다.

아니,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러웠다.

- 잘 봤다. 이제 확실히 알게 됐다.

“……!”

- 이만한 마력의 운용을 내 나이의 또래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메시지 마법이 연달아 들려온다.

녀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때쯤 돼서야 망막도 바로 맺혀갔다.

휘리릭!

제노스가 마력 창을 한 바퀴 휘돌렸다.

쨍그랑!

허공에 떠오른 그것은, 이내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궁금증이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본연의 일에 충실하도록 하지.”

“자, 잠깐!”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제노스가 아래를 향해 훌쩍 뛰어내렸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쐐애애액! 콰아아아앙!

직후, 내 바로 옆으로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만신창이가 되어 추락했으니까.

상대에게 너무 몰두한 나머지, 위쪽의 전투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비칠비칠 일어났다.

“…가라.”

“예…?”

“이건 아직 실험 단계인 단거리 워프석이다. 좌표는 인근의 도시에 설치된 게이트로 연결되어 있으니. 만약 탑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거다.”

“타, 탑주님은요?”

“이 상황에서 나까지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보냐?”

“…….”

그 말대로, 완벽한 열세였다.

잭 디스페로우가 혼자서 두 마탑주를 막아주고 있어 간신히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오만하게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하늘의 붉은 미남자였다.

“이걸로 내 할 도리는 다한 거다? 마침 네 동료에게도 달리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

동료?

깜빡 잊고 있었다.

재차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허공 높이 떠오르는 즉시.

“루나!”

나는 곧장 관중석 아래로 뛰어내렸다.

제발 루나가 그 악마들에게 뛰어드는 무모한 선택은 하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

“훗.”

서큐버가 뇌쇄적인 미소를 지었다.

벌써 일백이 넘는 마법사들을 홀로 감당했을 무렵이었다.

아직도 그녀 앞에는 많은 이들이 남아 있었다.

“큭… 이런 마녀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개중에는 이번 마법 대전에서 호성적을 거둔 참가자들도 더러 존재했다.

그럼에도 서큐버는 여유가 넘쳤다.

그녀는 칠악의 일인이자.

본체조차 그 이름도 찬란한 마왕 아스모데우스.

단언컨대, 당대의 대륙에서 그녀만큼 흑마법을 잘 다루는 존재는 없으리라.

쐐애애액!

부지불식간 락 스피어 하나가 주변으로 날아들었다.

고작해야 3써클 마법이었다.

역시나, 그것은 서큐버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퍼석!

예의 보랏빛 대지 범위에 드는 즉시, 그대로 소멸하고 말았으니까.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당연한 거 아니니? 평범한 마법사가 흑마법사를 이길 리가 없잖아.”

흑마법은, 같은 마법사를 상대로 최고의 상성을 발휘했다.

써클의 상승은 보다 수월했고, 같은 경지에서도 위력은 훨씬 뛰어났으니까.

지금 이 주변은 서큐버가 두 가지 마법을 중첩하여 펼쳐 놓은 상태였다.

생명을 말살하는 포이즌 필드에, 반경 10미터 정도 되는 안티 매직 필드까지.

물론 핵심은 후자 쪽이었다.

4써클 이하의 마법은 범위에 들어오는 즉시 무력화시키고.

5써클의 마법도 원래의 50퍼센트까지 위력을 약화시키는 초고위 흑마법이 안티 매직 필드였다.

어디까지나 마나를 잡아먹으려는 습성을 가진 마기였기에, 이런 흑마법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괴, 괴물…….”

그걸 알 도리가 없는 이곳의 마법사들은, 심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륙에서 흑마법사들이 종적을 감춘 지는 이미 반백 년도 더 지났으니까.

한데, 바로 그때.

쐐애애애액!

“……!”

갑작스레 무시하지 못할 기세가 느껴졌다.

그 즉시, 서큐버가 물리력을 막는 블랙 쉴드를 펼쳐 냈다.

쩌어어어엉!

한 자루의 검이 새까만 단면 위를 때렸다.

짜르르 울리는 충격이 쉴드 안의 서큐버에게까지 전해졌다.

“무슨…….”

이만한 기사가 탑 내에 있다고?

근접전은 그녀의 전문 분야가 아닌데.

허나, 예상외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주인의 손을 떠난 검에 이만한 위력이 실려 있었다는 의미였다.

자연스레 서큐버의 고운 아미가 찡그려졌다.

“아쉽군.”

“넌 누구니?”

“나는…….”

정확히 필드의 경계선 앞에서, 은빛 풀플레이트로 전신을 빈틈없이 감싼 여인.

잠시 망설이던 루나가 이내 대답했다.

“…누구보다 정의를 사랑하는 기사다.”

“응?”

“마기를 사용하는 너는 누가 봐도 악이자 희대에 다시없을 마녀겠지. 지금부터 내가 친히 너를 베어주겠다.”

짐짓 목소리를 짙게 내리깐 루나가 그리 말했다.

그게 컨셉이라는 걸 알 길이 없는 서큐버로서는, 그저 황당할 수밖에.

“…재밌는 아이네.”

“…….”

“스노비, 그 녀석이 올 때까지 잠깐 놀이 정도는 되려나?”

허나, 말과는 달리 서큐버는 내심 곤란했다.

어느새 상대의 뒤로도 관중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으니까.

고위 인사들답게 호위들의 수준은 상당했고.

돈만 있으면 누구나 관전할 수 있는 마법 대전이었기에, 여타 실력 있는 강자들도 제법 존재했다.

그리 생각하자 서큐버는 못내 짜증이 났다.

“솔직히 칼 쓰는 기사들은 저쪽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니?”

“…….”

“혹시 앤그리한테는 쫀 거야? 나는 만만해 보이니까 이쪽으로 온 거고?”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심 뜨끔해서?

…아니, 이건 기사로서의 자존심이자 전술의 일환이었다.

약하게 보이면 단숨에 잡아먹히는 세상.

여기서 필요한 건, 상대가 납득할 만한 ‘허세’였다.

“…난 한 놈만 벤다.”

그 명쾌한 대답에, 서큐버가 묘한 눈웃음을 지었다.

“어머. 미안하지만 나는 놈이 아니라 년인데? 세상에, 딱 봐도 너보다 큰 가슴을 가진 내가 남자겠니?”

“…….”

“차라리 여자의 적은 여자다. 뭐, 그런 말을 하지. 내가 예쁘니까, 질투가 나서 이쪽으로 왔구나?”

루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의 가슴이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능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저 여자의 가슴은 비대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듣고 나니, 묘한 패배감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하여, 이번만큼은 진심이 되어보려 한다.

“…진짜로 벤다.”

***

약 20여 미터 되는 어마어마한 높이를 뛰어내리면서도.

내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건 역시나,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나는 드래곤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비록 껍데기는 인간일지라도 알맹이는 드래곤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를, 과연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

‘…아니, 나는 인간이다.’

문득, 내면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전에도 똑같은 고민을 했으니까.

아이리스는 말했다.

나는 드래곤이 아니라고.

인간, 세타 쿤 이그니스라고.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내가 전생의 기억에 얽매여 있을 이유가 있을까?

“전혀 없지.”

제노스라는 존재는, 내게 그저 작은 변수일 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맞닥뜨리게 된 의외의 현실.

특별히 조치를 취할 방법도, 이유도 없다.

다만,

“내 적이 될 거라면… 나도 망설이지 않을 거다.”

대비는 해둔다.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졌고.

그제야 주변도 시야로 들어왔다.

쾅! 콰콰콰콰쾅!

어느새 다시 떠오른 아타락시아 페르잔은 재전투를 시작하고 있었다.

괜히 나서서 도우려 했다간, 오히려 방해다.

저만한 괴물을,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 대단한 탑주들마저 마력을 속박당해 있는 상태니까.

“음…….”

1층은 이미 한 폭의 지옥도였다.

한쪽 출입구는 쌓인 시신이 아예 산을 이룰 정도였다.

허나, 반대쪽은 아직 아니다.

루나는 그곳에 있었다.

“어…?”

근데 지금 내가 어디로 떨어지고 있는 거지?

분명 루나를 바라보고 뛰어내린 기억은 있는데.

보다 빠른 추락을 위해, 뒤늦게 플라이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 즉시,

덥썩!

“……!”

누군가 내 목을 화악 하고 낚아챘다.

“어디에 한눈을 팔고 있는 거지?”

“어…?”

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본의 아니게, 내가 루나에게 안겨 있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너네 연애하니?”

그 모습을, 출입구 앞을 막아선 헐벗은 여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대화는 나중에 하지. 곧장 저곳을 뚫을 거다. 이번에는 내가 뒤를 부탁하지.”

“…….”

덕분에 생각이 깔끔하게 정리된 기분이다.

“…좋아, 해보자.”

“기사들의 가문에는 각기 그곳을 대표하는 비기가 있다. 이미 알고 있겠지?”

“응. 들어봤어.”

“우리 가문의 비기는, 신검 일체다.”

“신검 일체…?”

“문자 그대로, 검과 몸이 하나가 되는 거다. 한순간 돌파력을 극대화하여,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일격필살.”

“아하.”

단번에 이해했다.

어떤 형태의 비기인지도.

지금 루나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보조 마법을 걸어줄게.”

“가능한가?”

“물론.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우웅!

직후, 루나에게 하이 스트랭스를 포함한 각종 보조 마법을 걸어준 내가 정면을 바라봤다.

“준비는 됐지?”

“물론.”

“그럼…….”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나는 이제 드래곤 아이리스가 아닌, 인간 세타 쿤 이그니스다.

여기서는 루나의 역할이 중요했다.

협력은 협력이고.

이런 상황에서 열아홉 먹은 인간 세타가 동료에게 해줄 응원은 무엇이 있을까?

“오빠 달려…….”

…이게 아니지.

“누나 달려!”

“……!”

스팟!

잠시 눈을 치켜뜬 루나가, 이내 정면을 향해 뛰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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