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간계(2)
같은 시각.
“폐하. 이제 곧 제1마탑에 당도합니다.”
“…….”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직접 선두에 서겠습니다.”
유일하게 황금빛 풀 플레이트메일을 착용한 사내 양쪽으로, 백금의 풀 플레이트메일을 착용한 두 인영이 바싹 다가붙었다.
“아니. 선두는 스노비다.”
“……!”
“애당초 이곳은 녀석의 관할 지역이다. 이의 있나? 페일.”
페일은 그의 이름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맡은 공식적인 직책은 없었으나.
이곳의 누구도, 페일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현 시각, 제국군은 동시다발적으로 국경을 넘고 있었다.
그 선두에 통칭 십이월이라 불리는 대륙의 위대한 기사들.
그들 중 무려 일곱이 군의 선두에 섰다.
대륙 북부에 위치한 스왈로우 제국은, 아래로 총 네 개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서부의 자이툰 왕국, 동부의 게르힘 왕국, 그리고 중부의 테라와 스란 공국까지.
여기서 제국은, 자이툰과 게르힘에 네 명의 십이월을 내려 보냈다.
각기 10만의 병력과 함께.
파랑의 검사 웨이브로 공작과 안개의 검사 로마니아 공작은 자이툰으로.
폭발의 검사 파이만 공작과 광휘의 검사 라포르테 공작은 게르힘으로.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은…
두두두두두두!
이곳, 마탑이 자리한 중립 지역.
드넓은 대평야를 질주하고 있는 중앙군 쪽으로.
이미 제국의 땅이나 다름없는 마탑 인근에 가장 많은 십이월이 파견된 이유는, 황제와 두 황자가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페일의 풀네임은 페일 폰 트쉬베르.
명실상부 제국의 1황자가 바로 그였다.
“할 수 있겠지? 스노비.”
“분부대로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페일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준비까지 다 끝난 마당에, 어찌 뒤늦게 귀국한 스노비까지 이번 선발대에 포함시켰는지는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눈앞의 사내는, 설사 제 자식의 목이라도 망설임 없이 벨 수 있는 폭군이자 절대자였으니까.
“명… 받들겠습니다.”
***
십이월의 과반수 이상이 국경을 넘어 출전을 감행하고 있을 때.
비슷한 의미로,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 불리는 십이지왕은 절반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같은 십이지왕의 손에.
“프레이 던 마그마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당신이라도 나서서 스승을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느 누가 스승의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
얼마나 분노했는지, 잭 디스페로우는 이제 목소리까지 파르르 떨려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럴 의도로 내게 접근한 겁니까?”
“예. 저도 큰 공을 세울 기회였는데 아쉽군요. 만약 성공했다면, 일을 이리 거창하게 벌일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러면서 간밤의 일을 떠올린 프레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심장 주변이 아릿했다.
마나의 맹세.
그 빌어먹을 행위를 강제로 멈춘 부작용이었다.
생각은 짧았고, 실책은 명명백백했다.
자연스레 그 평범한 외모의 애송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이 끝나는 대로 그놈도 죽인다.’
애써 상념을 털어낸 프레이가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우리도 이쯤하지.”
“…….”
직후, 마주 보고 선 제노스가 손안의 마력 창을 소멸시켰다.
“그럼 전 이대로 빠지겠습니다.”
“왜 굳이? 나는 네가 제법 야심가인 줄 알았는데.”
“저 같은 애송이가 끼지 않아도, 이곳 모두를 능히 제압하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말을 마친 제노스가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어느새 그곳에서 아타락시아 페르잔과 블레어 마탑주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비단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기습을 당해 전투 불능 상태가 된 마탑주가 다시 둘.
치유의 스실라와 정신의 저스틴은 이미 마력까지 구속당한 상태였다.
이리되니, 나머지 네 마탑주가 다른 여섯을 감당해야 하는 구도가 되었다.
더욱이, 현재 탑 내외부의 호위를 도맡고 있는 마법사들은 대부분이 제1, 제2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이었으니.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다른 하위 마법사들은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염화의 마탑주, 블레어 던 마그마르.
그는 처음부터 이 모든 수를 읽고 판을 벌인 것이다.
“난 네가 마음에 든다. 해서 한마디 조언을 해주자면… 다리 정도는 걸쳐 두는 게 좋다는 거야. 내 스승님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좋아하시는 편이거든. 어차피 당장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잖아?”
“…….”
그 말대로.
두 출입구는 웬 괴물들이 철통같이 막아서고 있었다.
그들 뒤로도 수십의 마법사들이 대기한 상태였고.
이제 이곳에 출구 따위는 없다.
탑은 둥그런 돔 형태였기에, 한 편으로는 어느 투기장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그 외곽지를, 이천의 마법사들이 뱅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었다.
만약 저들이 작정하고 동시에 마법이라도 쏘아 보내는 날에는…
이들 중 살아남을 이들은 몇 되지 않으리라.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
순간 프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꼭 감정이 없는 인간 같았다.
그게 너무나 께름칙하여 한차례 헛기침을 한 프레이가 이내 손을 휘저었다.
“그럼 마음대로 해. 우리 일에 걸리적거리지만 않으면 되니까.”
“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서걱!
이윽고 마지막 스켈레톤까지 베어낸 루나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쯤하면 됐겠지…?”
사실 그녀는 지금 무척이나 궁금했다.
세타가 어떻게 스켈레톤을 소환해 낼 수 있었는지 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아티팩트들이 존재했고.
개중에는, 흑마법과 관련된 물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여, 지금은 그런 아티팩트도 있구나… 하고 추측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세타를 동료로 인정했으니까.
그런 그를 믿는다.
단지 그뿐이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나중에 따로 설명해 줄 거라 확신했다.
그것이 등을 맡긴 상대에 대한 예의이자, 동료로서의 의리니까.
루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천상 기사였다.
‘그런 것보다…….’
시야를 넓히고 나니 점차 깨닫게 된다.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만약 세타가 저 하늘의 블레어 마탑주와 적이라면…
화르륵! 콰아아앙!
“…괴물.”
감히 승부라는 말은 떠올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승산이 희박해 보였다.
그렇다면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건데.
탈출자의 입장에서, 어디를 노리는 게 성공 확률이 가장 높을까?
‘저쪽은… 안 돼.’
루나의 시선이 북측 출입구를 향했다.
일견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똑같이 몸을 쓰는 존재였기에 안다.
직접 싸워보지 않아도, 그 어마어마한 거력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혹시라도 저 무지막지한 주먹질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맞은 부위는, 부러지다 못해 걸레짝처럼 찢겨 나갈 것이다.
‘…역시 반대쪽을 노리는 게 낫겠어.’
그에 비해 남측 출입구는 비교적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쯤 헐벗다시피 한 여인이 그곳을 막아서고 있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 여인 주변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근의 대지가 보랏빛으로 물든 것으로 보아,
“독.”
독을 사용하는 흑마법사.
지금은 그 정도만 추측이 가능했다.
다만 느낌상으로는,
“할 수 있어.”
잠시간 주먹을 꽈악 말아 쥔 루나가 이내 땅을 박찼다.
할 수 있다.
상대는 고작 흑마법사 한 명이니까.
이제부터 다른 무시무시한 마법사들을 상대할 동료를 생각하면,
“나도 하나쯤은!”
팡!
경쾌한 공기음과 함께 은빛 실선이 목표물을 향해 쏘아져 갔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나는 아직도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이라도 내보내게 되면, 자신들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다.
한데도, 이리 대담하게 일을 벌인다고?
그 정도로 제국을 믿는다는 건가?
혹여나 전쟁 초기에 만행이 밝혀지더라도, 제국과 마탑이 힘을 합치면 능히 막을 수 있다고.
정말로 그리 판단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야.’
프레이가 사실은 스승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염화를 포함한 여섯 마탑주가 제국 편이라는 가정하에.
답은 이미 나왔다.
이 또한 계획의 일부인 것이다.
마법사가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 정점에 있는 마탑주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니, 자신들과 반대되는 길을 걷는 그들부터 제거하고 싶겠지.
그리만 된다면…
‘황제는 남은 여섯 마탑주와 십이월의 검사들을 이끌고, 보다 손쉽게 정복 전쟁을 벌일 수 있을 테니까.’
그리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구도 ‘그럴 리가 없지’라고 예상할 때, 전력을 다해 허를 찌르는 전략.
대담하고 오만했다.
가히 최강국이라는 제국의 황제가 할 만한 생각다웠다.
그 와중에,
“…이 시점에서 너라고?”
어느새 내 앞으로 한 인영이 다가서고 있었다.
3층 관중석은 지금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무를 아는 관중들은, 퇴로인 계단 쪽을 뚫기 위해 모조리 거기로 몰려가 있었으니까.
하여, 지금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쯔어엉!
망설임 없이 손안에 마력 창을 재생성해 낸 제노스가 미소 짓는다.
“다시 올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너랑 다시 만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대놓고 제국의 개가 되기로 한 거냐?”
“황제는 반란군이라 불리는 우리의 정통성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정복 전쟁의 공격 범위에 일단 테라는 빠져 있기도 하고. 하니, 오히려 해방군은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지랄하네. 대신, 너희는 제국에게 무얼 내어줬는데?”
“…….”
제노스에게서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허나, 그쯤은 나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스란’이라는 비슷한 예가 존재했으니까.
테라라는 이름을 가진 속국.
딱 그 정도겠지.
“알만하네. 근데, 이렇게 나한테 와도 되는 거냐? 주인님 편은 저리 열심히들 일하시는데.”
“상관없어. 지금 내게는 네가 더 중요하니까.”
“…오싹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잠시 팔뚝을 문질러댄 내가 물었다.
“그래서, 한판 붙자고?”
“그것도 좋겠지. 이러면 비공식 결승전이 되겠군. 일만 터지지 않았다면 실제로 너와 붙었을 테니까.”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내가 중요하다느니 하는 개소리는 하지 말고. 내게 온 진짜 목적이 뭐냐?”
“서로 궁금한 점은 싸우고 난 이후에 물어도 상관없을 텐데.”
“아하. 일단 패놓고 심문해 보자?”
직후, 나는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린 채 써클을 휘돌렸다.
애당초 저 녀석이 순순히 대답해 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허나, 이러면 또 얘기가 다르지.
적어도 제가 내뱉은 약속까지 저버릴 놈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럼 딱 하나만 묻자.”
“……?”
“그… 내가 드래곤이라느니 하는 말… 뭘 보고 그딴 말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그거야…….”
순간 말끝을 흐린 제노스가 손안의 마력 창으로 나를 겨누었다.
“나도 너와 같으니까.”
“……!”
뭐?
“방금 뭐라고…….”
미처 무어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제노스가 곧장 이쪽을 향해 쇄도해 왔다.
“더 듣고 싶다면, 날 이겨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