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흑마법(1)
이른 아침.
“……?”
1층 홀에 앉아 멍하니 햇볕을 쬐던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기에.
지금 막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문제였다.
날밤이라도 샌 듯 저 초췌한 몰골하며.
온몸 가득 묻은 희뿌연 흙먼지에.
더욱이…
“대체 둘이서 어디를 다녀온 거지…?”
그 남녀의 정체가 다름 아닌 유리나와 세타였으니까.
모습들이 꼭, 밖에서 야영이라도 하고 온 사람들 같았다.
비싼 돈을 주고 이만한 숙소까지 잡아뒀으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기에, 루나는 재빨리 기척을 죽였다.
순간적으로 진한 흥미가 동했으니까.
“나, 난 이만 가볼게.”
“어. 조심히 가라.”
“…뭐야, 그게 끝?”
“왜, 더 할 말이라도 있어?”
“아니 뭐, 어떻게 그런 일들을 알고 있었는지, 귀띔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해서.”
“그 얘긴 이미 다 했잖아. 우연히 지나가다가 목격한 거라니까 그러네.”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한참이나 세타를 바라보던 유리나가 이내 팩하고 고개를 돌렸다.
“…됐다. 말해주기 싫으면 말아라.”
그리곤, 쿵쿵대며 계단을 올라갔다.
“…성질머리하고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말해주지 않는 거지.”
직후, 머리를 긁적인 세타까지 뒤따라 2층의 방으로 돌아간다.
“으음…….”
이즈음 하여, 루나는 생각했다.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구나.
“…곤란한데.”
이왕 같은 편이 되기로 한 마당이다.
전쟁까지 앞두고 가장 중요한 둘이 사이가 좋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건지.
해서, 잠시간 고민했다.
중간에 개입을 해서라도 관계를 개선시켜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대체 어떻게?
“…유리나는 나중에 따로 얘기해도 되니까.”
판단이 섰다.
지금은 세타 쪽을 뒤쫓기로.
한데, 거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둘이 계단을 오른 지 고작 1분여가 지났을 뿐이다.
2층 끝.
그러니까, 세타가 묵는 방의 코앞까지 당도한 직후였는데…
“…어?”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지체 없이 그 사이로 들어서려던 루나가 멈칫했다.
순간, 빠알간 무언가가 얼핏 시야를 스쳤으니까.
그게 무엇인지 루나는 대번에 알아봤다.
주춤, 주춤.
우선 조용히 뒤로 돌아섰다.
숨소리를 죽이고, 빠르게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허나,
“엇…!”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콰당!
복도 벽에 쿵하고 부딪힌 루나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프지만 망설일 틈은 없었다.
벌떡!
그 즉시 튕기듯 몸을 일으킨 루나가 홀의 마나를 휘돌렸다.
누구보다 빠르게, 아래층으로 도망치기 위해서.
“…뭐야.”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상대의 목소리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건 불가항력이니까.
그러게 왜 문을 닫지도 않고 훌러덩 벗어 재껴선…
…가만.
이전의 일도 있었으니, 혹여나 들키더라도 쌤쌤 정도로 합의를 보면 되지 않을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이건 절대로 고의가 아니니까…….”
내면에서 자기 합리화가 시작됐다.
아예 건물에서 빠져나온 루나가 황급히 숙소에서 멀어져 갔다.
왕실 기사단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를 차지했던 루나인만큼, 사내들의 몸에 그리 면역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방금처럼, 사내의 헐벗은 몸까지 본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저런 요망스러운 팬티는 더더욱.
***
“…뭐야.”
순간 내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기척으로 보아 분명 루나였던 것 같은데… 뭐가 급해서 저리 도망치듯 뛰어가는 거지?
“갑자기 뒷간이 마려운 건 아닐 테고.”
이내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하던 일을 속행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말끔하게 옷을 갖춰 입고 누군가를 찾아갈 예정이었다.
오늘은 마법 대전 결승전이 있는 날.
내가 만나고자 하는 이는, 최소한 그전에는 반드시 만나야 했다.
“…아, 속옷도 갈아입어야겠네.”
하나밖에 없는 건데.
못내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아끼는 팬티였으니까.
기사들이 훈련용으로 그레이 웜 소재의 의류를 주로 애용한다면.
마법사들은 레드 모스의 고치로 만든 의류를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나 고밀도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레드 모스는, 착용한 것만으로도 마나의 순환을 크게 도와줬으니까.
자유 연합은 일정 경지에 오른 소속 마법사들에게 전원, 이 귀한 레드 모스 소재의 속옷을 지급했는데, 전체 수량이 한정적이라 1인당 1장이 고작이었다.
“…찝찝하니까 어쩔 수 없지.”
곧장 헐벗은 몸이 된 내가 빠르게 옷을 주워 입었다.
마탑이 테라를 노린다.
그들이 원하는 건 대마법 제국의 건설이다.
스승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가장 먼저 마탑 내에 아군을 얻어둬야 한다.
허나, 여기서 나를 도울 이는 몇 없었다.
어느 정도 얘기가 통하면서, 신뢰가 가는 인물이어야만 하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딱 한 명밖에 없지.”
상념을 마친 내가 빠르게 방을 나섰다.
***
“이게 아닌데…….”
자꾸 꼬여만 가는 상황에 유리나는 절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는데.
왜인지, 녀석과 마주하면 생각과 다른 말들이 흘러나오곤 했다.
왜 그런 얘기도 있지 않은가?
관심이 있을수록 더 모진 말을 하게 된다는.
사실, 유리나는 세타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과정이 어떻든, 녀석은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프레이 던 마그마르는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함정을 팠다.
무려 악마와 손까지 잡고.
하나도 벅찬데, 그 무시무시한 악마까지 동시에 상대한다?
절대로 무리다.
“이러면 괜히 나만 나쁜 년이 된 것 같잖아…….”
마나의 맹세까지 모두 지켜본 지금.
유리나는 이곳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물론, 한 사람만 빼고.
“…역시 사과는 해야겠지?”
몇 차례나 머리를 긁적인 유리나가 이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
제9마탑.
“헛소리다.”
여전히 어린아이의 외형을 가진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내 말을 단칼에 일축했다.
“진짜라니까요?”
“말도 안 된다. 프레이는 나도 잘 아는 놈이야. 걔가 뭐가 아쉬워서 제 스승을 배신해?”
“그러니까,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겠죠. 여기서 초점은, 프레이 던 마그마르의 배신이 아니라 마탑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사실 아닌가요?”
“그건 더더욱 말도 안 되고.”
“아니, 이걸 진짜 보여줄 수도 없고…….”
통신용 수정구도 있는데, 왜 녹화용 수정구는 없는 걸까?
그랬다면 이토록 답답한 상황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정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최소한의 대비 정도라도 해두죠?”
“그건 또 무슨 뜻이냐?”
“황제는 마법 대전 결승전 날 거사를 치를 거라고 했어요. 어차피 몇 시간 뒤에 터질 일이라는 건데, 미리 대비하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요. 아니면 그대로 묻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대비를 하겠다는 건데? 뭐, 황제가 전쟁을 벌일 거니까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주세요, 관중들에게 그딴 소리나 지껄일 거냐?”
“그건 아니고요.”
기왕 일이 이 지경이 된 것, 나는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저한테 생각이 있거든요.”
“생각?”
“일단 탑 인근에 사람부터 좀 파견해 주세요. 외부인들을 한곳에 묶어두려는 일인데, 병력의 이동이 없을 리가 없겠죠. 황제 혼자서 일을 벌일 것도 아니고요. 단, 반드시 탑주님이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해요.”
“그 정도야 뭐, 어려운 일은 아니군. 그다음은?”
“여기서부터가 중요한데요…….”
나는 한참이나 아타락시아 페르잔에게 머릿속의 계획을 설명했다.
***
탑을 나선 직후.
“이제 배우를 섭외할 차례인데…….”
곧장 숙소로 돌아온 나는 주변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기본적으로 신뢰가 바탕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도 따로 생각해 둔 이는 있었다.
“저기 있구만.”
머지않아, 나는 생각했던 배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직후 숙소 건물 바로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한 여인이 시야로 들어왔으니까.
“루나!”
“……!”
순간 내 목소리를 들은 루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짐작컨대, 제법 심각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던 듯싶다.
왜인지 초조해 보이는 신색과는 별개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영 심상치가 않았으니까.
동공은 거칠게 요동쳤고, 얼굴은 묘하게 붉었다.
더하여, 이마 위로 한줄기 땀방울까지 흘러내리는 것으로 보아…
“어디 아파?”
“아, 아니다. 무슨 일이지?”
“그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직후 이어진 내 말에, 루나가 빠르게 안색을 회복했다.
“부탁?”
“연기 좀 잘해? 최대한 실감 날수록 좋은 일인데.”
“그게 무슨…….”
“자세한 건 얘기해 줄 수 없는데, 테라를 위한 일이야.”
“……!”
“해줄 수 있겠어?”
“…….”
어느새 진지한 눈빛이 된 루나가 한참이나 나를 빤히 쳐다봤다.
…역시,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믿어달라고 하기에는 무리였나?
“…그건 동료로서 하는 부탁인가?”
“어…?”
찰나,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 거라면 도와주겠다.”
“…….”
“네 말대로 우리는… 동료니까.”
***
약 2시간 뒤, 대망의 마법 대전 결승전.
중앙 대연무장 위에서 제노스와 프레이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나는 3층의 관중석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데, 예상보다 프레이의 상태가 썩 괜찮아 보인다.
분명 마나 역류 현상을 겪었는데도.
“…쟤, 뭔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엥? 어디가요?”
“입술이 시퍼렇게 죽은 것이, 꼭 병든 오크 새끼 같구만.”
과연 그랬다.
자세히 보니, 정말로 입술 끝이 생기가 없어 보였으니까.
괜히 마탑주가 아니라는 건가?
아타락시아 페르잔은 나와 함께 앉기 위해 미련 없이 최고 귀빈석을 포기했다.
탑주들에게 마련된 자리가 아닌, 일반 관중석에 나와 함께 앉아 있다는 뜻이다.
물론 입장권이 없는 나도 일등석은 차지할 수 있었다.
마법 대전 상위 300등 이내의 호성적자들은 탈락 이후에도 탑 측에서 관전을 배려해 줬으니까.
이 또한 일종의 영업이랄까?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다는 말이지… 근데, 진짜로 할 거냐?”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분명히 얘기하는데, 나는 모르는 척할 거다. 혹시나 잘못되어도, 너만 미친놈 되는 거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야.”
“…나도 괴짜지만, 너도 참…….”
쯧, 하고 혀를 찬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고개를 저었다.
동감한다.
만약 진실을 몰랐다면, 나라도 절대 떠올리지 않았을 생각이니까.
그보다,
“자 이제 마법 대전, 그 대망의 마지막 피날레가 시작됩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순간 사람들의 함성이 내부를 가득 메웠다.
이번 대전은 뭇 대륙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무려 대륙 최고의 유망주와 마탑주의 직계 제자 간의 시합이니까.
물론 개인적인 예상은 제노스가 이길 거라 확신한다.
내가 마력 싸움에서 프레이 던 마그마르를 꺾었기 때문에?
아니다.
마법사의 가치는, 고작 마력이라는 요소 하나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까.
실제 마력 싸움이 아닌 전투를 했다면, 나 또한 그리 쉽게는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휘릭! 휘리리릭!
어느새 한 자루의 마력 창을 만들어낸 제노스가 눈을 빛냈다.
그 기세가 사뭇 대단하여 주변의 대기가 짜르르 요동칠 정도였다.
역시, 저 녀석이 지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화르륵!
직후, 프레이의 양손에서 새빨간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사람들의 환호가 점차 커져 간다.
멋들어진 근접기들을 바탕으로 한 제노스와 보는 것만으로도 화려한 불꽃 마법을 구사하는 프레이의 전투는 볼거리가 상당히 풍부했다.
저걸 보기 위해 어지간한 서민들의 몇 년치 생활비를 하루아침에 지불해 가며 암표를 구한 이들도 수두룩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소위 살 만한 부자들이다.
그것도 각 나라에서도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
나는 지금부터 그 있는 자들의 축제를 망칠 것이다.
아예 시작도 하기 전에.
스르륵.
때마침 한 인영이 조용히 다가오더니 아타락시아 페르잔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진짜냐?”
“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다른 마법사들은? 그만한 병력들이 마탑 인근까지 접근하는 동안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게,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홱!
부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거봐요. 제가 뭐랬어요?”
“지금 그딴 말이나 할 때냐? 이제 어떡하냐?”
“그러니까 진즉 믿으시지.”
“어느 정도는 믿었으니까 여기 있지! 그리고, 대륙 전쟁이라니. 설마 이 미친 짓거리에 블레어, 그 노망난 할방구가 동참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아직 안 늦었어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확실하게 지원해 주세요.”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망설일 틈이 없었다.
스윽!
이윽고 품 안에서 날카로운 바늘 하나를 꺼낸 내가 손가락 끝을 콕 하고 찔렀다.
따끔한 통증과 동시에, 피 한 방울이 빠르게 맺혀갔다.
‘…필요한 건, 최하급 세 마리 정도로도 충분해.’
심장 언저리에서 약 5센티미터 가량 떨어진 아래쪽.
그러니까, 오히려 옆구리에 가까운 부근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내 방대한 마나에 떠밀려, 어느새 신체 구석탱이에 자리를 잡은 힘.
관련된 지식들은 아이리스의 목걸이 안에 모두 잠들어 있었다.
드래곤들은, 마법이라면 일단 알아 두고 보자는 경향이 강했으니까.
그게 인간들 사이에서는 금지된 ‘흑마법’일지라도.
다만, 내가 직접 운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옆구리에 있는 극소량의 마기를 심장으로 끌어와 단번에 휘돌려야 한다.
과연 될까?
성공하더라도, 써클이 충돌을 일으켜 후유증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어쩌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도일지도 모르지만…
왜인지 가능할 것도 같았다.
“혹시나 기운이 새어 나갈 수도 있으니까, 그것만 부탁드릴게요.”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다만, 준비는 이미 되어 있다. 마나 블록 필드(Mana block field).”
우우웅!
무려 마탑주가 직접 시전한 마법이니, 이제 기운이 새어 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일이 끝나면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겠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내 상념을 털어낸 내가 내면으로 속삭였다.
‘눈을 떠라, 지하 깊은 곳의 망령. 스켈레톤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