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식탐의 죄악(3)
- 놈!
“……!”
순간 내가 빠르게 몸을 굴렸다.
투-쾅!
직후, 길게 뻗어 나온 촉수 하나가 내가 있던 곳의 지면을 때렸다.
한데 그 위력이 실로 무지막지했다.
그 한 방에,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기다란 크레이터가 형성되었으니까.
“음…….”
내면에서의 전투는, 결국 정신력 싸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형태의 전투는 나라도 짐작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아마도 소위 말하는 상상 대전과 실제 전투, 그 경계선상에 있는 것이겠지.
그런 거라면 대응은 오히려 쉬웠다.
세 번째 조각에 담겨 있는 것은 최대 마나량의 한계 해제.
더하여, 무려 7써클의 마법이다.
내가 특별한 가르침이나 마법서 없이도 여러 마법들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물론 이 지식에 잠들어 있는 것들은 여타 마법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래도 무려 드래곤의 지식이 아니던가?
이미 대륙에서도 잊혀진 고대의 마법들은 물론이고, 아이리스가 직접 고안해 낸 마법들도 다수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홀리 라이트.”
- ……!
내면을 공유하는 세계다.
놀라는 럼프의 감정이 곧장 전해져 왔다.
- 어, 어떻게 신성 마법을…?
“사제들이 쓰는 신성 마법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똑같은 마법의 일종이야. 못 쓸 건 또 뭐가 있겠어?”
다만, 빛의 마나로 신성력을 대체하고 있으니 위력까지야 그만큼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준비한 건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하이 헤이스트, 하이 스트랭스, 하이 쉴더, 하이 디텍트, 센스 레인포스.”
새롭게 알게 된 마법들.
그러니까, 걸 수 있는 신체 강화 마법들은 모조리 캐스팅했다.
승리한 자는 상대의 모든 걸 가질 것이고.
패자는 사라질 것이다.
소멸하여, 그 혼조차 남기지 못한 채.
- 건방진!
쾅! 쾅! 콰앙!
촉수의 숫자는 최소 이백.
그 징그러운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내 몸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나는 그 하나하나를 침착하게 피해냈다.
휘릭! 휘리릭! 투쾅!
열, 백, 그리고… 천.
- 왜… 맞지 않는 거냐?
그러니까, 횟수로 천 번은 족히 휘둘러 내고서야 럼프는 그리 물어왔다.
“이제 내 차롄가?”
- ……!
상대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나는 시전어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형수의 핏물을 머금은 대지여. 그 원혼을 가득 담은 땅의 혼이여.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내라. 내 눈앞의 적을 멸하고, 그 피로 한을 풀어라.”
무려 7써클 마법의 영창이었다.
“록 길로틴(Rock guillotine).”
그그그긍!
직후, 마치 사형장의 그것처럼.
암석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기둥이 럼프의 양옆으로 세워졌다.
위로는 비스듬한 날을 가진 도끼까지 있어, 그 형태가 사뭇 잔혹스러웠다.
곧이어,
쩌적! 쩌저저저적!
순식간에 땅에서 솟은 암석이 럼프의 거대한 몸을 휘감았다.
아예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도록.
여기에 더해, 도끼날에 최초 시전한 홀리 라이트를 덧씌웠다.
“…쿨럭!”
무리를 하고 있음이 분명한 걸까?
이윽고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이미 내 몸은 한계를 훌쩍 넘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 신체는 본래보다 1.5배가량 부풀어 올랐고, 두 시야는 마치 안개라도 낀 것처럼 희뿌옇게 변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신체는 하염없이 휘청대고 있었으니.
- 이 빌어먹을 벌레 새끼가아아아아아!
울컥.
분노로 가득한 고성에, 또 한 번 죽은피가 역류했다.
허나, 이제는 진짜 끝이다.
“뒈져.”
짧게 중얼거린 내가, 이내 손을 휘저었다.
서걱!
***
럼프.
…아니, 그의 진짜 이름은 따로 있었다.
반세기도 훨씬 더 전에.
그는 어느 가난한 시골 영지의 별 볼 일 없는 자식으로 태어났다.
정확히는, 지금은 제국령인 망국(亡國)의 남작가 막내아들로.
과거에 있었던 제국의 정복 전쟁.
그 첫 번째 피해자가 바로 그의 가문이었다.
한순간 가족을 잃은 그는 대륙을 떠돌아다니는 부랑자 신세가 되었다.
원래 통통했던 몸은 순식간에 비쩍 골았다.
하여, 그때부터 먹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먹어 치웠다.
그 대상이 산짐승이든, 벌레든.
먹을 수 있을 때 충분히 먹어둬야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고작 어린아이가 생존하기에 세상은 너무나 험난했고.
종래에는, 아사(餓死)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이즈음에서 그는 한 가지 선택을 내려야 했다.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는 최소 반나절.
단 한 발자국을 걸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어느 뜨거운 여름.
함께 도망쳤던 여동생이, 그의 등에 업힌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하여…
아그작.
어쩔 수 없이, 그 여동생을 먹어 치웠다.
그 무렵에도 특별한 감정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여태 여동생을 업고 다닌 것도 부모의 간절한 부탁이 있어서였으니까.
먹지 않으면 그 자신이 죽는다.
결국, 둘 모두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된다.
그런 거라면, 선택은 쉽지 않은가?
그러던 중 만나게 된 거다.
- 뭐야, 인간이었나?
“……?”
- 인간 중에 이 정도로 식탐이 강한 녀석은 처음이군.
“…….”
- 어때, 나와 계약하는 건? 내가 다시는 배를 굶주리지 않게 해줄 테니까.
“…….”
- 근데, 네 이름은 뭐지?
잠시 고민하던 그가 대답했다.
“…럼데르사 프렌젤.”
- 이름 한번 더럽게 길고 어렵군. 간단하게 럼프로 하지. 괜찮겠지?
순식간에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의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머지않아 굶어 죽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는 마계의 칠마왕이자, 식탐의 주인인 벨제바브의 권속이 되었다.
“크히히히히히.”
시간이 지날수록 럼프의 식탐은 점차 강해졌다.
그게 본래의 성격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죄악의 영향 탓인지는 몰라도.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고 말았다.
인육에 한번 맛이 들린 나머지, 소규모 촌락 하나를 통째 발라 먹는 대학살극을 자행한 것이다.
지금의 칠악이 악명을 떨치게 된 지분의 절반은 럼프 하나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벨제바브는 또 한 번 속삭였다.
- 아예 중간계를 네 전용 식탁으로 만들자. 어때?
“무슨 뜻?”
- 네가 이곳의 권력자가 되는 거야. 아예 사육장을 하나 차리는 거지. 네가 원하는 때, 언제든지 먹거리를 가져다 바칠 수 있도록. 그게 인간이든, 다른 무엇이든 말이야.
“헤에…….”
- 괜찮지?
“응. 좋은데.”
- 근데, 그걸 하려면 너 혼자 힘으로는 부족해. 이곳에는 생각보다 강자들이 많거든.
“그럼 어떻게 할까?”
- 동료를 만들어야지. 못해도 상급 마족과 관련이 있는 자들로. 이왕이면 다른 칠마왕의 권속이면 더 좋겠군.
“알았어.”
다시 또 이십 수년이 지나, 결국 럼프는 지금의 동료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이렇듯, 원대한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 중이었다.
럼프는 확신했다.
앞으로 조금이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허나, 결과적으로 럼프는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
- 말도… 안 되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 지금.
그의 육신은 점차 가루로 변해 사라져 가고 있었으니까.
***
“…헉!”
순간 내가 깊은숨을 들이켰다.
부지불식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지?
저 하늘의 색깔로 보아, 최소 새벽녘은 된 듯한데…….
“뜨허억!”
한데, 나만큼이나 놀란 이가 또 있었다.
“츄릅. 야, 괜찮냐!?”
“어… 일단은?”
“진짜 다행이다!”
와락!
“……?”
내 머리맡에서 졸고 있던 유리나가 별안간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건 조금……
아니, 꽤나 많이 당황스럽다.
“이, 일단 좀 떨어져 봐봐.”
“아, 미, 미안.”
얼굴을 붉힌 유리나가 재빨리 몸을 떨어뜨렸다.
그리곤, 횡설수설 그간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걱정 많이 했다.
꼬박 날밤을 깠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마나 폭주 현상이 뻔해 보이는데 혹시나 건들면 더 잘못될 것 같아서 옮기지도 못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악마의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더라 등등…….
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더니.
그게 바로 나였다.
‘…그보다.’
왜인지, 몸 안에서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내면을 공유한 상태로 럼프를 소멸시켰으니, 그 모든 힘이 내 것이 되었을까?
…아니, 확신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물며 이제는 안다.
럼프가 지니고 있던 것은, 완전한 죄악의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마도 식탐의 극히 일부겠지.
진짜는 마계에 있을 테니까.
내 몸이 생각보다 잘 버텨준 것도, 그 덕일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속에서 무시 못 할 힘이 느껴졌지만.
‘이 힘은 따로 시험해 봐야겠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이걸로 칠악과는 확실한 적이 되었다.
나야 원래부터 그들이 원수였지만.
이제부터는 칠악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를 노리려 할 테지.
“…곤란한데.”
“엉? 뭐가 곤란한데?”
“아무것도 아니야.”
상념을 마친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야. 뭐가 곤란하냐니까?”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자리 지켜줘서 고맙다.”
직후,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자, 잠깐. 정작 나는 아직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는데…!”
“……?”
설마 유리나가 이토록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내뱉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리했을 터였다.
***
흠칫.
지금 이 순간, 다른 칠악들이 잘게 몸을 떨었다.
“럼프의 기운이… 사라졌어?”
언제나 요사스러운 미소를 내보이는 서큐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드물게, 얼굴은 한없이 굳힌 채로.
곁의 앤그리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죽은 건가?”
“말도 안 돼! 완전체에 가까운 럼프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된다고…!”
“아니. 상대가 강자에 일대일이라면, 럼프도 손 쓸 도리가 없겠지.”
“당장 소멸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걔가 끝까지 능력을 숨길 애야? 그렇게 삶에 대한 욕구가 강한 럼프가?”
“…미처 언데드를 소환해 내기도 전에, 기습이라도 당한 걸지도.”
“그러니까 말이 안 된다는 거지. 감각까지 뛰어난 럼프가 기습이라니! 안 되겠다. 지금 당장 기운이 사라진 곳으로 가봐야겠어!”
“이미 늦었다.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추적은 할 수 있…!”
서큐버는 끝까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 …전원, 지금 당장 내가 있는 곳으로 모이도록.
“……!”
그 순간, 거짓말처럼 한줄기 목소리가 둘의 뇌리를 파고들었으니까.
“대공…?”
***
제7마탑.
“헉, 헉.”
프레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금 막 이곳 최상층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잠에서 덜 깬 얼굴의 잭 디스페로우가, 그런 그를 맞이한다.
“…프레이 님. 이리 자주 찾아주시면 곤란합니다. 그것도 이런 꼭두새벽부터요.”
직후, 잭 디스페로우가 보란 듯 쩌억하니 하품을 했다.
잠을 사랑하는 그답게, 얼굴 한가득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허억, 후우… 죄송합니다.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영 좋지 않으신데…….”
순간 잭 디스페로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그 녀석’보다 빨리 선수를 쳐야 했으니까.
“혹, 세타 쿤 이그니스에 대해 아시는지요?”
“세타 쿤 이그니스…? 분명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 것 같기는 한데…….”
잭 디스페로우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막전 때 트라오레 후작의 자식을 꺾었던 아이 말입니다.”
“아! 이제야 기억나는군요. 한데, 갑자기 그 아이는 왜…?”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프레이가 이내 본론을 끄집어냈다.
“세타 쿤 이그니스가 제 계획을 모두 알게 됐습니다.”
“예?”
“황제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도. 그런 황제를 막기 위해 스승님을 해하려는 제 계획까지도. 모두 다 알게 되었단 말입니다.”
“……!”
잭 디스페로우의 안색이 급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