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식탐의 죄악(2)
“잔소리는 싫어. 그래도 먹고 싶어. 그러니까 빨리 끝내줄게.”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다시 말하지만, 벨제바브의 가장 큰 능력은 휘하의 언데드였다.
수백, 수천의 군세를 일으켜 적들을 쳐부수는.
마계라면 수만까지도 가능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중간계였다.
그럼에도 상대를 죽이는 족족 아군으로 만드는 그 능력은, 전쟁에서 가히 무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언데드는 쓸 생각이 없는 건가?’
변한 것은, 덩어리와도 같던 외형뿐.
인간의 육신 따위는 신체 변형만으로도 충분히 짓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스아아아아아!
순간 언젠가 경험했던 이질감이 느껴졌다.
대지가 검게 물들고, 주변에서 마기가 들끓었다.
암흑 필드.
특정 공간을 마계의 환경과 비슷하게 만드는 칠죄종 고유의 힘.
이걸로, 럼프는 중간계보다 최소 배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펄럭!
곧 날개를 활짝 편 럼프가 그대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당장에 내게 쇄도해 오려는 듯 몸을 구부린다.
마치 활의 그것처럼.
이전의 덩어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근육질에, 무척이나 날렵해 보이는 악마가 뱀과도 같은 혀를 날름거렸다.
펄럭! 펄럭! 펄럭! 펄럭!
날갯짓이 가속될수록 느껴지는 마기도 점차 강해졌다.
하여, 나는 재빨리 유리나를 등 뒤로 숨겼다.
“물러나 있어.”
“어, 어쩌려고?”
“어차피 도망은 늦었어. 그러니까, 해봐야지.”
“저걸 상대하겠다고? 진짜 미쳤어?”
“방법이 없잖아.”
더욱이 이곳의 내외부는 시간의 흐름조차 달랐다.
도움은 바랄 수 없다.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기대가 되는 점은.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지, 상대가 단숨에 승부를 결정지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조급함을 이용해야 한다.
- 인간 같기도 하고, 드래곤 같기도 하고…….
“…….”
- 너, 혹시 하프 드래곤은 아니겠지? 이런 하찮은 존재감으로,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기는 한데…….
반짝!
그때서야, 내 목에 걸려 있는 물건이 시야로 들어온 것일까?
- 가만, 그 목걸이는…?
“…….”
- 아하. 이제 알겠군. 기운의 정체는 그것이었어. 고작 물건 따위가 이토록 진한 드래곤의 냄새를 풍기다니.
본체와의 일체화가 진행 중인 와중이었다.
순간 럼프의 입이 길쭉하게 찢어졌다.
“내가 먹을 거야. 저놈도. 저것도.”
하나이되, 하나가 아닌 둘의 목소리.
허나 이번만큼은 나도 흘려들을 수 없었다.
“줄게.”
“……?”
“대신, 지면 너도 내놔. 그 ‘식탐’의 힘을.”
“…….”
- …….
직후 럼프는 물론이고, 예의 머릿속으로 들려오던 벨제바브의 괴음도 조용해졌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나를 미친놈 정도로 생각하지 않을까?
죄악의 힘은, 오직 마왕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그걸 평범한 인간이 품게 되면…
아니, 실수로라도 근처에 접근하면, 정신은 갈가리 찢겨 나갈 것이다.
죄악이 품은 마기는, 결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지금이라면…….’
순간적으로 짙은 호기심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내가 진짜 드래곤이었다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생각이다.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드래곤의 강인한 육신이라면, 죄악의 힘까지 품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제아무리 신의 축복을 받은 드래곤의 육신이라도, 그 신체의 기본이 되는 기운은 선기(善氣).
다시 말해, 순수한 ‘마나’다.
악기(惡氣)를 베이스로 하는 칠죄종의 힘과는 상극이라는 뜻이다.
드래곤에게 괜히 중간계의 수호자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허나, 지금의 나라면 얘기가 달랐다.
나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으니까.
참고로, 인간은 선과 악.
둘 모두를 품고 있는, 중간계의 몇 안 되는 존재였다.
만약 저걸 꿀꺽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 몇 단계는 더 강해질 수 있었다.
“하찮은 벌레가.”
쐐애애애애애액!
순간, 벼락처럼 럼프의 신형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일대의 공기가 일그러진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종래에는 상대가 둘로 나뉘어 보일 지경이었다.
육신의 속도를 대기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가히, 공간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힘.
일 초를 수십 등분으로 쪼갠 찰나의 찰나에도, 한 줄기 검은빛은 곧게 수직 낙하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바로 그 순간.
‘해방.’
나는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 넣으며 강하게 염원했다.
여섯 조각 중 세 번째.
아이리스가 봉인한, 지식의 보고를 개방하기 위해서.
***
화아아아악!
“……?”
내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갑작스레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느새 눈앞에는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사내보다 잘생긴 미남자가 서 있었다.
물론, 나를 닮아서 이런 평을 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뭐 어쩌자고?”
“에?”
“여기서 조각을 해방하면 어쩌자고. 같이 죽자고?”
“아니, 살자고 해방시킨 거죠. 방법이 없으니까…….”
“잘도 살겠네. 뭔 순서도 없이 벌써 마왕이랑 붙냐.”
“그래도 진짜 마왕은 아니잖아요.”
“진짜 마왕에 가까운 권속이잖냐. 거기다 암흑 필드라니. 최소 본래 힘의 10퍼센트까지도 쓰겠구만.”
마왕이 가진 본래 힘을 생각하면, 10퍼센트는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어쩔까요?”
“뭘 어째. 그냥 죽어야지.”
“…자꾸 그러실 거예요?”
“그게 아니라, 고작 6써클로 3번째 조각은 어림도 없다니까 그러네. 당장에 마나가 폭주하고 말걸?”
“…폐인이 되어 죽으나, 마왕의 손에 죽으나. 일단 시도라도 해보고 죽읍시다.”
“그럼 해봐.”
그리 말한 아이리스가 내게 선선히 목걸이를 내밀었다.
“경고했다. 진짜로 죽을 수도 있어.”
“원망은 하지 않을게요.”
“그러셔야지. 스스로의 멍청함을 원망하며 죽어가는 놈보다 꼴불견은 없을 테니까.”
“말을 해도 참…….”
허나, 그리 말하는 아이리스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덥석!
이윽고 나는, 눈앞의 목걸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
번-쩍!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온몸의 힘이 샘솟는다.
조각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일단은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 중요했으니까.
홱! 꽈아아아아아아앙!
직후, 나는 가볍게 고개만 젖혔다.
본래 내 머리가 있던 위치로, 패악적인 흑선이 스쳐 지나갔다.
단번에 머리통을 노리려고 했는지, 몇 가닥의 머리털이 나풀거리며 허공에 비산했다.
“……?”
의도치 않게 지면에 신체를 처박은 럼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작스레 뒤바뀐 분위기를 녀석도 느낀 것이겠지.
허나, 이런 일은 속전속결이다.
미처 내 힘을 자각하기 전에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중요했다.
꽈아악!
“……!”
쩌억, 하니 갈라진 지면의 크레이터.
그 위로 불쑥 몸을 일으키던 럼프가 눈을 치켜떴다.
부지불식간, 내가 녀석의 머리통을 붙잡은 탓이다.
그 순간 나는,
“같이 죽자.”
벌써부터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마나를 아낌없이 럼프에게 ‘공유’했다.
한없이 요동치던 마나가 순식간에 상대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럼프의 전신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파들파들 떨렸다.
“무, 무슨…….”
“이대로라면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서.”
어느새 내 몸 안의 혈관이라는 혈관은 모조리 툭툭 불거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눈의 핏발까지 곤두섰다.
일전의 프레이 던 마그마르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몰골로.
주르륵.
전신의 구멍에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허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놈이든 나든.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는, 이 상태를 지속해야 했다.
“끄극… 끄그그그극…….”
이미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마침내 녀석도 마기를 내 몸 안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쿨럭!”
순간 내 입가로 몇 움큼이나 되는 핏물이 토해져 나왔다.
시꺼멓게 죽은 것이, 내가 봐도 상태가 심각했다.
마기와 마나는 완전히 상반된 기운이니까.
내부에서 그 두 가지 기운이 서로를 잡아먹으려 으르렁거리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 미친놈아!!!”
점차 의식의 끈마저 희미해질 무렵.
유리나의 까랑까랑한 고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직후 내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곤…
털썩.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유리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역시나 다시 나타난 칠악은 강했다.
이전과도, 지금의 그녀와도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직접 맞붙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한데도…
“물러나 있어.”
“어, 어쩌려고?”
“어차피 도망은 늦었어. 그러니까, 해봐야지.”
눈앞의 녀석은 이런 말 따위나 지껄이고 있다.
이 미친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켜주려 했다.
반칙이잖아.
유리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민폐는 한 번으로 족했으니까.
여기서 돕겠답시고 나대면, 되레 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테니까.
직후, 예상대로 저 무시무시한 악마가 이쪽을 향해 쏘아지려 했다.
부르르르르.
유리나는 감히 그것과 눈조차 마주칠 수 없었다.
그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앞에서 막아주는 사람이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 녀석은 어떻게 저것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일까?
쐐애애액! 쾅! 덥썩!
유리나의 입장에서, 고작 1초 정도나 지났을까?
문자 그대로 눈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어느새 악마의 머리통이 세타에게 붙잡혀 있었다.
“어, 언제…?”
유리나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한데, 그 이후의 상황이 더 문제였다.
갑작스레 세타가 온몸으로 피를 흘리더니, 그대로 악마의 신체 위에 제 몸을 포개는 것이 아닌가?
“야, 야, 야!!!”
유리나가 공포조차 잊고 곧장 세타에게 달려갔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렇게 죽으면, 자신이 너무 나쁜 년 같지 않은가?
그때 세타의 말을 들었다면, 적어도 이런 꼴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야아. 일어나. 일어나 보라고오…….”
종래에는, 그 큼지막한 눈에 투명한 눈물까지 고여 갔다.
바로 그때.
꿈틀.
“……!”
조금 떨어진 유리나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세타의 신체가 흔들렸다.
둘 모두 움직임이 없는 와중이었다.
하여,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싸우는 중인 거야?”
만약 추측이 사실이라면.
결국, 마지막에 정신을 차리는 이가 승자가 될 것이다.
***
정확히 흑과 백이 반으로 나뉜 내면의 공간.
허나, 아이리스는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무척이나 흉측한 외형을 가진 초대형 덩어리였다.
휘릭! 휘리리릭!
심지어 그 집체만 한 덩어리에서는 족히 수백 가닥은 되어 보이는 촉수마저 뻗어 나와 있었다.
저것이 벨제바브의 본체인가?
- 미친놈. 제정신이냐?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뭘.”
- 마기를 네 몸 안에 받아들이다니.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는 말이다!
“아까 다른 사람한테도… 아니, 사람이 아니지. 아무튼 다른 존재한테도 설명한 건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시도는 해봐야지.”
- 자살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또라이 같은 자식. 이참에 네놈의 육신을 차지해야겠다. 슬슬 새로운 그릇을 구할 때도 됐으니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 뭐?
“말했잖아. 네 죄악의 힘이 탐난다고.”
- ……!
방해꾼은 사라졌다.
하니,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벌일 차례였다.
나태, 분노, 오만, 탐욕, 식탐, 색욕, 질투.
그중 식탐의 힘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식탐의 가장 큰 권능은 세 가지다.
하나는 먹은 이의 힘을 일부 흡수할 수 있는 포식.
그리고 먹은 이의 형태와 능력을 일정 부분 복사해 낼 수 있는 식이 변형.
마지막으로, 먹은 존재를 되살려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강제 언데드 화.
셋 중 하나라도 좋았다.
그 능력이 미욱해도 상관없었다.
그것만으로 내게 얼마나 강한 힘이 될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그럼…….”
물컹!
직후, 나는 거침없이 눈앞에 드리워진 촉수 하나를 붙잡았다.
그리곤,
콰콰콰콰콰콰콰콰!
- …흡!
내 전신의 마나를 아낌없이 쏟아붓기 시작했다.
- 크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짐승과도 같은 울음소리가 순식간에 주변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