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식탐의 죄악(1)
“훗… 큭큭큭큭큭…….”
“……?”
충격이 너무 컸나?
내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왜 웃으세요?”
“아니. 내가 말해놓고도 웃겨서. 당황해서 말이 헛나왔다. 인간이 맞냐니, 큭큭큭.”
“…하나도 안 웃긴데요.”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다. 저것의 크기. 그리고, 마나를 제 몸에서 이격시킬 수 있는 이능.”
프레이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방출된 마나운(雲)의 크기는 지닌바 마나의 양에 비례한다. 결국, 어림잡아 네가 나보다 최소 다섯 배 이상의 마나를 품고 있다는 뜻인데… 그럴 리가 없지.”
마나운이란, 마나를 외부로 방출했을 때 흘러나오는, 마치 구름과도 같은 기운을 말한다.
바로 지금처럼.
“그렇게 생각하세요?”
“물론. 당장 마나의 양만 따지면, 탑 내에서도 최상위권인 나니까. 분명 이격 능력처럼 겉으로 부풀리는 특별한 이능이겠지.”
“그런 이능이 존재하기는 했던가…….”
“한 가지 더. 보아하니, 너는 소문대로 초월의 재능을 타고났나 보구나. 한데, 무슨 생각으로 불꽃의 마나운을 방출해 냈는지 모르겠군. 감히 내 앞에서 말이다.”
감히?
그동안의 경험상, 내 앞에서 저런 으름장을 놓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결과가 똑같던데.
“평범한 불꽃으로는 결코 나를 이길 수 없다. 너는 실수한 거야.”
“알았으니까 덤벼봐요. 진짜 말 많으시네. 아참, 그리고 내기는 마저 이행하셔야죠?”
움찔.
막상 하려니까 께름칙한 건지, 프레이가 잠시간 멈칫했다.
하여 나는 곧장 쐐기를 박았다.
“에이, 설마 말은 그리하면서 쫄으신 거?”
“쪼, 쫄아?”
“귀여우시네요. 뭐, 이건 이거대로 좋겠죠. 사실 지금 모습들은 모두 제 친구들에게 보여지고 있거든요.”
“뭐…?”
내 품 안에서 투명한 수정구가 쏙 하고 빠져나왔다.
전체로 희미한 빛까지 내뿜으며.
“통신용 수정구…?”
“혹시나 해서 실시간으로 생 전송하고 있었죠.”
물론 이것도 구라다.
라이트 마법을 이용하면 통신용 수정구를 작동 중인 것처럼 꾸미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대염화의 마법사님의 직계 제자 프레이 던 마그마르 님이 나한테 쫄아서 약속까지 어기고…….”
“…나, 프레이 던 마그마르는 만물의 근원인 마나에 대고 맹세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존재, 세타 쿤 이그니스와의 내기에서 패할 시, 어떤 질문이든 단 한 가지에 한해서 거짓 없이! 성실하게 답하겠노라고.”
우우웅!
말을 마침과 동시에 프레이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마나의 맹세를 한 직후의 대표적인 후속 현상이다.
“자, 이제 너도 해라.”
“시원시원하시네요. 나 세타 쿤 이그니스는, 상대와 똑같은 내용으로 마나 앞에 맹세합니다.”
“……?”
프레이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뭐지? 그 성의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는 마나의 맹세는?”
“뭐가요.”
“장난하나?”
“모로 가도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된다잖아요. 방금 파장 못 느끼셨어요? 눈도 파래졌을 건데.”
“아니, 그게 아니라…….”
무어라 말하려던 프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노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되었다. 시작하지.”
“그럼, 갑니다.”
쿠구구구구!
말을 마침과 동시에 하늘의 태양이 아래로 하강했다.
프레이 또한 지체 없이 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딴 허풍선이쯤!”
콰콰콰콰콰콰콰콰!
아마도 불꽃도 잡아먹는 염화의 직계 제자이니, 마나운 또한 엄청난 상성을 보일 거라 판단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는, 곧 뼈저리게 느낄 테지.
“나를 뭘로 보고! 내 마나의 불순도는 10퍼센트 미만이다!”
화르륵!
한순간 프레이가 방출하고 있는 마나운의 색이 짙어졌다.
10퍼센트라면, 분명 대단한 수치기는 했다.
상위 200위 이내의 마법사 정도는 되어야 10퍼센트 안팎인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어째.
불순도만 따지면, 지금의 나는 3퍼센트 미만인데.
퍼석!
“……!”
예상대로, 충돌과 동시에 내 마나운이 상대의 마나운을 밀어냈다.
아니, 통째로 집어삼켰다.
“미, 미친…!”
순간, 프레이의 전신이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파르르 떨렸다.
부딪히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리라.
내 마나의 순도는, 진짜배기라는 사실을.
‘자, 그럼 뭘 물어야 잘 물었다고 소문이 날까?’
점차 사그라드는 프레이의 마나운을 보며 나는 잠시간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질문은 단 하나.
이왕이면, 유리나에 대한 일뿐만 아니라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미는지까지 모두 알고 싶었다.
그런 거라면,
“…가만. 분명 ‘거짓 없이, 성실하게’라는 조건을 내걸었으니,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직후, 순식간에 내 입가로 악동과도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
화륵! 화르르륵!
“…잉?”
홀로 땅바닥을 기어가던 럼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실, 이건 럼프의 오래된 습관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본체인 벨제바브의, 마계의 보잘것없는 식마귀였던 시절.
그는 혹시나 먹을 것이 없나, 이렇게 바닥을 기며 샅샅이 훑어대곤 했으니까.
완전해질수록 행동 패턴마저 본체를 닮아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었다.
“이 냄새는…?”
순간 럼프의 코가 크게 벌름거렸다.
그는 마나가 지닌 고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 코끝으로 스며드는 내음이 기억 속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근 수년 이내에, 럼프의 식욕을 가장 강하게 자극했던 그 녀석.
“또 만났네?”
직후, 럼프의 입가로 새빨간 미소가 지어졌다.
이 정도 마나라면, 가히 먹어 달라고 동네방네 고함을 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다.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하게.
두 번째는 명령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으음… 어떡하지?”
아주 잠시간 고민했다.
걱정되는 존재는 넷.
이곳에 있는 앤그리와 서큐버.
그리고 이곳엔 없지만 더 신경 쓰이는 스노비와 대공.
한데 대공은 칩거 중이고, 스노비는 이미 제국으로 돌아갔다.
앤그리는…
솔직히 남 일에 크게 관심이 없을 것 같았다.
잔소리라면 서큐버 쪽이 훨씬 더 심한데.
완전체인 자신이니까, 힘으로 밀어붙이면 결국은 또 잔소리만으로 끝날 것 같기도 하고.
“…먹을까?”
바닥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럼프가 이내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
털썩!
프레이의 무거운 무릎이 지면에 맞닿았다.
“…핫! 하하하하하!”
“…….”
“어이가 없군. 그만한 마나운이 불순도조차 낮다니…….”
연신 고개를 흔들며 중얼대기를 잠시.
이윽고 프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물어라.”
기어이 내게 이리 물어왔다.
“보나 마나 유리나 벤 아리에나에 대해서겠지. 그거라면…….”
“아니요.”
나는 곧장 손을 들어 프레이의 말을 막았다.
“제가 궁금한 건, 프레이 던 마그마르가 요 근래 타인에게 한 모든 거짓말인데요?”
“……!”
찰나, 프레이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따위 두루뭉술한 질문으로 네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나!?”
“이게 얼마나 간단명료한데요? 있으면 다 토해내시라고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거짓말이라고 생각되는 건 전부 다.”
“끝까지 개소리를…!”
질문은 이미 던져졌다.
그 증거로, 잠시간 프레이의 눈동자가 또 한 번 새파랗게 빛났으니까.
맹세는 결국, 자신과의 약속이다.
스스로의 양심에 조금이라도 가책이 느껴진다면, 당장에 마나가 폭주하여 폐인이 될 테지.
그것이 마나의 맹세가 가진 무서움이었으니까.
“이제 말씀하세요.”
“…….”
한차례 움찔 몸을 떤 프레이가 이내 물음에 술술 답했다.
“…먼저 네 친구, 유리나 벤 아리에나에게 거짓을 말했다.”
“계속하세요.”
“…그녀를 이용하여 전쟁에 참전할 명분을 얻으려 했다. 그녀는 테라 해방군 내에서도 무시 못할 위치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그녀가 감히 탑주를 암살하려 한다면, 우리에게도 테라를 칠 명분이 생기니까.”
“뭐, 뭣…!?”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니까, 마탑이 전면에 나서서 전쟁에 참전하겠다? 제국을 돕는 게 아니라요?”
“제국을 도와 대륙을 정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종 목표는 그게 아니다.”
“그럼요?”
“우리 마탑도 우리만의 영토를, 오직 우리만의 나라를 갖는 것.”
“……!”
“테라 따위가 아니라, 진정한 마법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다.”
미친.
그러니까, 제국 또한 목표를 위한 이용 수단 중 하나라는 거잖아.
한데, 이러면 또 앞뒤가 안 맞다.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말대로라면 마탑에는 두 세력이 있고, 그 두 세력은 끊임없이 반목해 왔다고 했으니까.
그 말인즉…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 스승이랑 목표가 같잖아요? 염화의 마탑주가 원하는 것이 마법 제국이라면서요. 당신 꿈도 그거고요. 근데, 고작 불사조의 정수 때문에 그 꿈을 포기해요? 그것도, 스승까지 배신해 가며 파괴의 마탑주와 손을 잡고?”
“…….”
술술 불어대던 프레이가 이번에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내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무렵.
“헉!”
마침내 나는 목도하고야 말았다.
프레이의 두 눈에 선 핏발을.
하물며 그곳에선 피눈물마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으실 텐데?”
“잭 디스페로우… 그에게도, 거짓말을…….”
쿨럭!
순간 프레이가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그리곤 곧바로 기절해 버리고 만다.
와.
방법 한번 신박하다.
스스로 정신을 잃게 만들어 일종의 최면 상태에서 벗어날 줄이야.
“…그래도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으니까.”
잠시 프레이를 내려다보던 내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
지금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
빠르게 걸음을 놀린 지 대략 10분 정도나 지났을까?
일부러 외곽지로만 에둘러 움직이고 있는데, 꼬리가 붙었다.
문제는 그 기운이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사실이었다.
“나와.”
“…….”
깊은 밤, 올빼미 울어대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유리나. 나오라니까?”
“……!”
주춤주춤.
언뜻, 나무 뒤로 주홍빛 실타래가 내비치는 듯했다.
잠시 후, 예상대로 유리나가 그곳에서 걸어 나왔다.
“야.”
“뭐.”
“나 다 봤어.”
“그러니까 뭘.”
“너 프레이 던 마그마르랑…….”
투콰아아아아앙!
“……!”
유리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굉음이 천지를 집어삼켰으니까.
직후, 희뿌연 흙먼지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전신으로 벌레가 기는 듯 불쾌한 감각이 뒤를 잇는다.
이 느낌은 분명,
“오랜만이다아아아아아!”
녀석이다.
칠악의 하나이자.
내 대전 상대로도 일을 벌였던 존재.
그리고 학장 할아버지의 원수 중 하나.
“럼프…….”
절로 속에서 침음이 새어 나왔다.
프레이 던 마그마르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다.
럼프의 본체.
그러니까, 식탐의 주인은 그 위명도 자자한 칠죄종의 벨제바브니까.
그의 이명은 ‘죽은 자를 다스리는 자’다.
마계에서는 달리 언데드 왕이라고까지 불리는 존재였다.
다만,
‘일대일 승부라면…….’
내 시야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건가?”
낌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절로 기분이 나빠지는 마기도, 다른 어떤 기운도.
“단숨에 먹는다아아아!”
투콰콰콰콰콰콰!
“……!”
…방금까지 했던 생각은 취소다.
이번에는 작정이라도 한 건지, 럼프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빠직! 빠지지직!
마기가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한다.
이건 위험하다.
- 볼수록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네놈은 누구지? 설마 마족은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럼프의 목소리가 아닌, 마치 머릿속에 웅웅 울리는 듯한 괴음이 들려왔다.
완전체와 비완전체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칠죄종에게만 주어지는 권능을 얼마나 많이, 완벽하게 펼쳐 낼 수 있느냐.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드러나는 광경.
바로 본신과의 ‘일체화’다.
이대로라면, 승산이 없었다.
으득.
‘방법은…….’
입안에서 비릿한 혈향이 번져 갔다.
혼자라면 본체가 완전히 현신하기 전에 도망칠 자신도 있었지만.
지금은 곁에 유리나가 있다.
도주는 불가능.
지금 이 상태로는 이길 가능성 또한 전무한 상대.
하면, 방법은 하나다.
짤랑!
투명 마법에 가려져 있던 물건이 내 목덜미로 드리워졌다.
목숨을 걸고.
목걸이의 조각을, 하나 더 해방시킬 때였다.
***
유리나는 오늘, 평생 놀랄 일을 한 번에 다 겪는 듯했다.
마치 다 안다는 듯 약속 장소에 나타난 세타도.
코앞에서 그 무시무시한 칠악이 마기를 뿜어내고 있는 점도.
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예의 덩어리의 상태는 이전과 또 달랐다.
쩌저저저적!
마치 책에서 본 악마처럼.
커다란 덩어리에 불과했던 존재의 모습이 변해갔다.
이마 위로 삐죽이 솟은 두 개의 뿔.
등 근육을 뚫고 펄럭이는 거대한 날개.
더하여, 입 밖으로 흉물스럽게 삐져나온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도망쳐.”
“……!”
“도망치라고! 그러니까 왜 말을 안 들어선!”
움찔.
순간 유리나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러니까 왜 말을 안 들어선…?
그러니까, 저 녀석은 이걸 다 예상하고 내게……
“…너. 그런 거였어?”
이걸로 유리나는 확신했다.
역시나 저 녀석은, 이 모든 상황을 다 예측하고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