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축제의 끝(1)
프레이 던 마그마르.
최소 6써클 유저(User)로 추정되는 고위 마법사.
그리고, 그 위명도 자자한 제1마탑주의 직계 제자.
“…어디서 불사조의 깃털을 얻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 뭔 탑주의 직계 제자가 이렇게 말이 많아. 자신 없어요?”
“……!”
“자신 없으면 그냥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씀하세요. 매달릴 생각 없으니까.”
그리 말하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대략 다섯 발자국을 더 움직였을 무렵.
“…멈춰라.”
예상대로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우웅!
더하여, 사뭇 위압적인 기운까지도.
그럼 그렇지.
“…….”
피식 새어 나오려는 실소를 애써 참으며, 나는 곧장 몸을 돌렸다.
“이제 하실 마음이 생기셨나 보네요?”
“좋다. 다만 조건을 변경한다. 내가 이기면, 너 또한 마나의 맹세를 걸고 내가 묻는 물음에 답해야 할 거다.”
“그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죠.”
“…장소를 옮기지. 결승전을 앞두고 괜한 이목을 끌고 싶지는 않으니까.”
“싫은데요.”
“……?”
미간을 찌푸리는 상대를 향해 내가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뭘 믿고 그쪽을 따라가요?”
“잊었나 본데, 나는 마탑주의…….”
“아, 알죠. 당신이 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염화의 마법사님의 직계 제자라는 건.”
“…하면, 네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쓸데없지는 않죠. 당신은 지금, 그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님을 직접 해하려고까지 하고 있잖아요?”
“……!”
그제야 프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옛날부터 이족 보행 동물들은 믿는 게 아니라고들 하더라고요.”
“…유리나 벤 아리에나가 그런 얘기까지 하던가?”
“걔가 얘기해 준 게 아니라, 지나가다가 들었을 뿐이에요. 아주 우연히.”
“…….”
상대에게서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내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겠지.
그럼에도 달리 선택지는 없을 테지만.
“…이건 어떠냐?”
“네?”
“장소는 여기로 하지. 단, 내 입장이라는 것도 있으니, 직접 전투는 벌일 수 없다. 마법사가 싸우지 않고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는 법. 가령 ‘마나 방출’이라면, 가벼운 내기로는 충분하겠지?”
“…….”
누가 마탑 소속 마법사 아니랄까 봐.
마나 방출.
마법대전 예선전 때의, 예의 마나 발현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수정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마나의 색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이 ‘마나 발현’이라면.
방출은, 마법사 스스로의 신체로 직접 마나를 선보이는 것이었으니까.
여기서 드러나는 색깔은 일신의 경지와는 무관했다.
수정구야 애당초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써클에 따른 색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고.
직접 방출의 경우, 마법사 고유의 주력에 따라 드러나는 색이 달랐다.
다만, 마치 연기와도 같은 방출된 마나가 외부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켰을 때는…
약한 쪽이 잡아먹힌다.
“괜찮은데요?”
“미리 말하는데, 나는 네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과 아타락시아 페르잔과의 관계에 대해 물을 것이다.”
역시 알고 있었나.
근데, 그건 또 아니지.
“질문이 두 갠데요?”
“하면, 아타락시아 페르잔과의 관계가 네 진짜 목적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로 정정하지.”
갈수록 말장난까지 심해지는데.
물론, 아예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상대의 의도가 보다 분명해졌으니까.
프레이 던 마그마르는 내가 초월의 마탑에 방문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더하여, 내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의심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내가.
아니, ‘우리’가 테라 출신이기 때문이겠지.
“괜찮으시겠어요? 진 충격으로 내일 결승전까지 영향을 주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미친놈.”
그리 욕지거리를 내뱉은 프레이가 기운을 끌어올린다.
직후, 양손을 펼쳐 보인 내가 마주 써클을 휘돌렸다.
“그럼, 시작할까요?”
***
똑, 똑, 똑.
“노크…?”
순간 방 안에 있던 유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은 마탑 인근의 상업지구.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를 찾아올 손님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 녀석?”
아니, 한 사람 있기는 했다.
같은 숙소에 묵는 것으로 추정되는 녀석.
그리고, 같이 돌아가자 해놓고 예고도 없이 사라졌던 놈.
세타 쿤 이그니스.
그 녀석이 틀림없었다.
똑, 똑…….
“꺼져. 너랑 할 얘기 없으니까.”
…또옥.
마치 사람처럼, 노크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말이 너무 심했나?
아니,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애당초 먼젓번의 일에 대한 사과부터 했다면, 이렇게까지 열이 뻗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한데, 밑도 끝도 없이 불사조의 알이 어떻다느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질 않나.
아예 마탑에서 떠나달라는, 웃기지도 않는 부탁까지 해댔으니.
“공짜로 알려줄 것도 아니면서 뭔…….”
“유리나.”
“…어? 루나?”
잠시 후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리나가 화들짝 놀랐다.
“이곳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였군. 들어가도 되나?”
“아, 물론이지. 들어와.”
벌컥.
역시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인영은 루나였다.
“미안. 넌 줄 몰랐어.”
“괜찮다. 한데, 세타 쿤 이그니스랑 같이 있던 것 아니었나?”
“뭐…? 내가 그딴 놈이랑 뭣 하러?”
“……?”
다소 날이 선 반응에, 루나의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그와 따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일은 무슨… 갑자기 찾아와선 별 해괴한 말들만 늘어놓던데.”
“…실없는 농담이나 해대는 사내는 아닐 텐데.”
“엥?”
순간 유리나의 눈빛이 새초롬하게 변했다.
“뭐야, 그 애정 가득한 말투는?”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그는 네 걱정을 많이 했으니까.”
“…어?”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긴급 상황에서도 마탑에 들르려 한 건, 세타 쿤 이그니스 하나뿐이었다.”
“걔, 걔가 왜?”
이제 유리나는 말까지 더듬거렸다.
‘설마, 진짜로 나 때문에?’ 하는 표정을 한가득 떠올리고서.
“처음에는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이리 오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걸 보면, 네가 목적이 맞는 것 같군.”
“…흥. 지도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이지, 뭐.”
“아무래도 둘 사이에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 같다만, 오해는 빨리 푸는 게 나을 거다.”
“그, 그래서. 아까 말한 긴급 상황이라는 건 뭔데?”
“…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 연합이 우리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뭐, 진짜!?”
“그들도 공국에게 배신을 당했으니까. 자유 연합주는, 조직이 더 이상 방랑자로 떠돌아다니는 게 싫다고 했다. 이번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살아갈 곳을 쟁취하고 싶은 거겠지.”
“하, 하긴 연합의 입장에서라면 분명…….”
“더불어, 공국에서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그러니 특별한 계획이 없다면, 우리도 곧장 귀국하는 게 옳은 순서인 것 같다.”
“…….”
직후, 유리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다른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먼저 돌아가라느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부탁을 했던 거였나.
조금씩 오해가 풀리는 기분이다.
“…근데 너희 둘, 정말로 아무런 사이도 아닌가?”
“사, 사이는 무슨!”
힐끗, 창밖을 확인한 유리나가 갑작스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다녀와서 마저 이야기하자. 밤은 기니까.”
“갑자기 어딜…?”
“약속이 생각나서. 금방 올게!”
그리 말한 유리나가 후다닥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
순식간에 홀로 남게 된 루나만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
***
아스라이 쏟아지는 달빛 아래.
우웅! 우우우웅!
수차례 공명음이 울려 퍼진다.
써클이 진동하고, 대기는 그 충격으로 몸서리쳤다.
화르르르륵!
순간 프레이의 전신으로, 마치 불꽃과도 같은 맹렬한 마나가 타올랐다.
그것은 이내 큼지막한 한 폭의 화염이 되었고.
솨아아아아!
당장에 나를 잡아먹을 듯, 그 요사스러운 혀를 날름거렸다.
“…….”
그에 비해 내 주변은 줄곧 한없이 고요했다.
방출된 기운의 크기는, 지닌바 마나에.
농도는, 써클의 경지에 비례한다.
프레이 던 마그마르는 이목을 끌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어지간한 집채 3개를 합쳐 놓은 듯한 저 정도 마나라면, 주변에서 당장에 웬 불이 났냐며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왜 마나를 방출해 내지 않지?”
“죄송한데, 이게 방출한 거거든요?”
“…뭐?”
상대와 나의 거리는 대략 10여 미터.
이미 해가 완전히 넘어간 저녁이었기에, 오직 프레이의 주변만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만, 시야가 어둠으로 가려졌다곤 해도 감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인즉.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장난 아니고요.”
“…물리력은 없어도, 상대의 마나에 완전히 잠식당하면 정신이 미쳐 버릴 가능성도 있다.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하는 편이 나을 텐데?”
아무래도 내가 지레 겁을 먹고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적당히 조절할 테니, 시도라도 해보지 그러나?”
“그러니까, 이미 방출했다니까 그러네.”
“…진짜 미친놈이었군.”
한차례 고개를 휘저은 프레이가 이윽고 이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냥 미친 상태로 부랑자가 되거라. 추궁할 이가 너 하나뿐인 것도 아니니까.”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건가?
내 어깨가 절로 으쓱여졌다.
스스로의 힘에 심취한 것이라면, 그것대로 괜찮을 테지.
“다 좋은데, 이쪽이 아니라 손을 위로 향하는 편이 나으실 텐데요.”
“…위?”
직후, 프레이의 고개가 하늘을 향했다.
곧이어…
“마, 말도 안 되는…….”
화르르르르륵!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아래보다 수배는 더 큰.
아니, 가히 작은 태양이라고 해도 무방한 마나의 덩어리였으니까.
원하는 마력을 선택하여 방출해 낼 수 있는 신위.
거기에 더해, 마나를 이격(離隔)한 채 유지할 수 있는 신기까지.
두 가지를 동시에 선보인 내 마나는 지금, 상대의 불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울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아니, 그 이전에 저 엄청난 마나는 뭐지?”
“…….”
“너, 정말로 인간이 맞나?”
경악으로 가득한 프레이의 감정이 이곳까지 전해졌다.
애당초 같은 6써클이라면, 이런 마력 싸움으로 내가 질 리가 없었다.
오직 세논 스승님만의 수련 방법으로, 마나의 불순도를 극한까지 걸러낸 지금의 나라면.
“쟤는 대체…….”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한편에 숨은 인영이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
같은 시각, 제2마탑 인근.
스노비의 부탁대로, 일단 서큐버는 다른 두 동료와 접촉했다.
앤그리와 럼프.
각기 분노와 식탐의 죄악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서큐버의 눈앞에 있었다.
“3년 전, 테라 아카데미에서의 일 기억나?”
“기억한다.”
“아 참. 그때 너희는 구경도 못 했지? 일을 벌인 건, 지로시랑 슬로우스였으니까.”
이번에는 앤그리가 아닌 럼프가 대답했다.
“재미는 지로시 혼자서 다 봤었지!”
“럼프. 너도 어느 정돈 즐겼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 방해꾼이 있었으니까. 아무튼, 이번에는 마음껏 먹어도 된다는 거지?”
“응. 스노비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야.”
말을 마친 서큐버가 제 꼬리를 살랑거렸다.
“최대한 난리를 피워줘. 죽으면 안 되는 인간들은 따로 표식을 해둔다니까, 알아서 걸러주고.”
“뭐야, 결국 가려서 먹으라는 뜻이잖아…?”
“정이 먹고 싶으면, 해치우고 실수라고 둘러대던가. 물론 책임은 내가 안 진다?”
럼프의 표정이 당장에 시무룩해졌다.
“기왕이면 외부인들 중심으로. 특히나 좀 높아 보인다 싶은 사람들은 다 먹어. 그건 스노비가 책임진다니까.”
순간 키가 2미터에 이르는, 지로시만큼이나 장신인 앤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스노비의 명인가?”
“맞아.”
“…대공은? 아직도 칩거 중인가?”
“응. 지저 세계에서 얻은 것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던데?”
“…처음 나왔을 때는, 분명 세타 쿤 이그니스인가 하는 녀석을 당장에 찢어 죽일 듯이 얘기했던 것 같은데…….”
“앤그리.”
“……?”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혹시 잊은 건 아니지? 대공이 없을 땐, 스노비가 우리 리더 대리야.”
“…….”
평소의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내보이던 서큐버가 이내 생긋 미소 지었다.
“그러니, 믿고 따라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