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통수에 통수(2)
제7마탑.
소위 마탑의 3강이라고 하면, 염화와 초월, 그리고 파괴를 거론하곤 한다.
그리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사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초월의 마탑주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마탑주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고.
두 세력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였다.
염화를 포함한 여섯 마탑주는 제국의 일에 적극 협조하여 탑의 영향력을 보다 넓혀가자는 주의였고.
반대로, 파괴의 마탑주 쪽 사람들은 본연의 일에 충실하자는 의견이 강했다.
표면적인 이유가 그렇다는 거고, 이 또한 일종의 견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염화의 마탑주 쪽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국’ 출신이었으니까.
그리고 이곳은 여러 마탑주들 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인 마법을 구사한다고 알려진 사내의 방.
“왔어요?”
상당히 졸려 보이는 인상을 가진 젊은 사내.
더 나아가, 연신 하품까지 해대던 파괴의 마탑주 잭 디스페로우가 손님을 맞이했다.
평소 그를 아는 사람들이 지금의 광경을 본다면, 무척이나 놀라워할 모습이었다.
실제로 잭 디스페로우는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다만,
“갑자기 이리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손님의 정체는 더더욱 놀라웠다.
외견만 따지면, 서른 안팎에 불과한 푸른 미남자.
무려 염화의 직계 제자인 프레이 던 마그마르였으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혹, 특이사항이라도 있나요?”
“…이번 결승전에 황제가 행차한다는 사실은 알고 계신지요?”
“네. 이미 잘 알려진 얘기잖아요.”
“황제는 오지 않을 겁니다.”
“네?”
“제국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황제가 직접 참관한다는 소문을 만천하에 흘려, 여러 고위급 인사들의 발을 한 번에 묶어두고, 동시다발적으로 정복 전쟁을 벌인다.”
“……!”
“이것이 황제의 진짜 의중이라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꿈틀.
당장이라도 침대로 뛰어들 듯하던 잭 디스페로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진심이라면 정상이 아니네요. 우리 안마당에서 그런 일을 벌이면, 마탑도 다른 왕국들에게도 집중 타겟이 될 텐데.”
“대륙이 제국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정치란 얼마나 ‘튼튼한’ 줄을 ‘빨리’ 잡느냐가 핵심이시라면서요.”
“하아… 이만한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다니. 무언가 사단이 벌어져도, 최소 테라의 내전이 완전히 종식된 이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몇몇 왕국들이 내전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국이 서두른다는 말씀도 덧 붙이셨구요.”
“…….”
순간, 잭 디스페로우의 눈빛이 착 하고 가라앉았다.
“…혹, 제가 당신과 손을 잡은 이유에 대해 설명을 드렸던가요?”
“대충은요. 제가 제국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게 가장 크긴 하죠. 해서 묻는 건데요.”
“……?”
“얼마 전 유리나 벤 아리에나와 개인적으로 접촉하신 것 같던데, 실례가 안 된다면 연유에 대해 여쭈어도 될까요?”
“…….”
예상치 못한 질문에도 프레이가 별반 표정의 변화조차 내보이지 않고 반문했다.
“제게 감시자를 붙이셨습니까?”
“오해는 마시고요. 신뢰를 쌓기에는, 저희가 가까이 지낸 기간이 너무 짧으니까요.”
“…오해하지 않습니다. 저라도 그리했을 테니까요.”
“하면, 제 물음에 답해주시겠어요?”
잠시간 고민하던 프레이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불사조의 정수에 관한 진실을 알려줬습니다.”
“……!”
이번만큼은 잭 디스페로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네. 진짜로.”
“어째서죠?”
“이미 스승님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상황입니다. 진실을 알면 같은 편이 되어줄 것이 확실한 상대가 있는데,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이 또 그렇게 되나요…?”
멍하니 입을 벌린 잭 디스페로우가 이내 제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도 참 지독하네요.”
“저는 욕심이 많으니까요.”
“그야 잘 압니다만… 음. 그 아이만 불쌍하게 되었어요.”
“아직 스승님은 그 아이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하시는 듯하셨습니다.”
“그럴 리가요. 척 보기에도 그 아이는 크루노 님과 많이 닮았습니다. 거기에 불꽃을 주력으로 삼는 점만 봐도…….”
“아시다시피, 스승님은 ‘그날’의 기억을 스스로 지우셨습니다. 완전히요.”
“으으음…….”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잭 디스페로우가 긴 침음을 삼켰다.
“고작 핏덩이일 뿐이지만, 이용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더하여, 이미 알고 계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뒤에 그 아이와 한 번 더 만날 예정입니다.”
“유리나 벤 아리에나와… 말인가요?”
“예. 하니, 혹여라도 오해는 마시길…….”
***
프레이는 예상보다 빨리 유리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역시나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수정구 속 유리나를 보며, 프레이가 짐짓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겠다는 건가?”
- 당신의 목표물이 내게는 원수니까요. 손해 볼 게 없죠. 스승을 해하려는 제자의 반인륜적 행위에 적극 동참해 드리죠.
“훗. 그건, 나를 믿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 당신을 믿는다기보단, 앞뒤 정황상 그럴 듯하다고 판단했을 뿐이에요. 단, 나도 조건이 있어요.
“조건?”
- 그의 배를 산 채로 가르는 일은, 내게 맡겨주셔야 해요. 물론 불사조의 정수는 당신이 가지고요.
“…그거야 어렵지 않은 조건이다.”
- 그래서, 내가 무얼 해주면 되죠?
“결승전이 끝나면, 16강 이내에 든 호성적자들은 제1마탑주와 독대를 하게 되어 있다. 인재를 한발 먼저 포섭하려는, 일종의 영업이지. 나는 그때가 기회라고 생각한다.”
- 들어보죠.
프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세부 계획은 나중에 따로 전달하겠다.”
- 나중에요?
“수정구는 도청의 위험이 있으니까.”
- 직접 만난다니,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한 거 아닌가요?
“괜찮아. 이래 보여도 제법 따르는 팬들이 많거든. 너도 내 수많은 팬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할 거다.”
- …….
수정구 속, 유리나의 얼굴이 마치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변해갔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얼굴 하나는 봐줄 만한 사내였지만 그녀의 취향은 결단코 아니었으니까.
쌍꺼풀이 진한 것이, 느끼하게 잘생겼다고 해야 하나?
- 알겠으니까, 저녁에 봐요. 그럼.
“나중에 보지.”
허나, 두 사람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단 말이지?”
유리나가 있는 방문 밖에서, 이 모든 대화를 듣고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
루나가 잡은 숙소는, 유리나가 묵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벌컥!
“비상!”
“……?”
닫혀 있던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무언가를 하고 있던 루나가 딱하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 복장이며 자세가 사뭇 오묘했다.
일자로 쫙 펴진 두 다리에.
몸에 달라붙는 타이트한 옷은 분명 기사들이 실내 수련을 할 때나 이용하는, 그레이 웜(Gray worm) 소재의 훈련복이었다.
신축성이 좋고 땀을 잘 흡수하여 기사들이 애용하는 의류 중 하나였다.
다만 색깔이 회색이다 보니, 몸의 굴곡이나 땀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어, 미안.”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허나, 정작 당사자는 전혀 괘념치 않는 눈빛이었다.
아니, 아직 눈치채지 못한 건가?
들어갈 때는 확실하게 들어가고, 나올 때는 또 확실하게 나온 군살 없는 몸매가 도드라졌다.
한데 질끈 묶은 흑발 사이로, 새하얀 목덜미가 유독 시야를 사로잡았다.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제야 루나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곤, 대번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시뻘게졌다.
“…나가.”
“넵!”
쾅!
먼저 문을 닫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흠’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제 들어와도 된다.”
“그, 그럼 실례할게.”
어느새 편안한 흰색 티셔츠에 가죽바지로 갈아입은 루나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렇게 마주하고도 우리 사이에는 한동안 적막감이 이어졌다.
“그… 논의가 필요한 문제가 하나 있거든?”
“…논의?”
“유리나에 대한 얘기야.”
“……?”
루나의 얼굴 위로 짙은 의문이 떠올랐다.
직후, 나는 아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해줬다.
“프레이 던 마그마르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구린내가 나지 않아?”
“…분명.”
“도와야겠지?”
“그러고야 싶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한테 생각이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
고개를 끄덕인 루나가 내게 바싹 다가붙었다.
잠깐만, 이건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우선 조금만 떨어져 줄래?”
“…아.”
고작 다섯 평 남짓한 방이다.
화들짝 놀란 루나가 재빨리 내게서 멀어졌다.
한차례 헛기침을 한 나는, 이내 생각한 계획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
기나긴 대화를 마친 직후.
나는 다시 유리나의 숙소로 향했다.
아예 같은 건물에 방을 잡고, 1층에서 죽을 치고 있을 작정이었다.
한데…
“…너도 여기다 방 잡았냐?”
때마침 2층에서 유리나가 내려왔다.
물론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의뭉을 떨었다.
“어. 너도?”
“나야 뭐… 근데 갑자기 왜 돌아온 거래?”
“그래도 결승전은 봐줘야지.”
“…참나.”
반응을 보니, 여태 내게 삐져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같이 돌아가자고 해놓고 혼자 쏙하고 다른 곳으로 빠졌으니.
“그보다 너. 뭐 고민 있지?”
움찔.
나는 봤다.
순간적으로 유리나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고민은 무슨… 그런 거 없는데?”
“없긴. 꼭 범죄라도 저지를 듯한 얼굴이구만.”
“뭐, 뭔 헛소리야?”
“흐음…….”
내가 의심의 눈빛을 지우지 않고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자,
“그, 근데 진짜로 그런 게 티가 나?”
“어. 엄청.”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내가 맞은편의 의자를 툭툭 두드렸다.
“와서 얘기해 봐. 뭔데?”
“…그냥 물어본 거거든? 없다고, 그런 거.”
끝까지 숨기시겠다?
정 그렇다면야.
“나한테 삐지셔 말 안 하는 건 아니고?”
“뭐래. 내가 애냐?”
“내가 잘못한 건 사실이니까.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나부터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해주려고.”
“……?”
“그 왜, 염화의 마탑주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 미남이잖아? 외부인들이 그 얘기를 떠드는데, 자연스럽게 불사조의 정수에 대한 내용도 나왔거든.”
“……!”
순식간에 유리나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런데?”
“사실은 포획한 불사조한테 알이 있었다나 뭐라나.”
“불사조의 알!? 진짜?”
진짜겠냐.
물론 구라다.
나는 단지 사람 잘 믿는 유리나에게,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고 싶은 것일 뿐이니까.
불사조의 정수를 빼앗겠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마당에, 그 알이 나타났다?
누가 봐도 앞뒤가 안 맞지 않은가?
정수만은 못하지만, 불사조의 알은 그 자체로 불꽃에 대한 친화력을 대폭 상승시켜 준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응. 빠른 시일 내에 마탑주가 따로 인원을 꾸려서 가지러 갈 거라더라. 근데 정확한 위치는 아직 못 찾고 있대.”
“그, 그렇겠지. 불사조가 어디 동네 똥개 이름도 아니고…….”
“나는 아는데?”
“……!”
순간 유리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개구라 치시네!”
“진짠데.”
“웃기지 마. 증거 있어?”
“뭐, 믿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어, 어디 가?”
“애초에 내가 그걸 알려줄 의무라도 있냐?”
“아니 그게 뭔… 그럼 차라리 처음부터 말을 하지 말던가!”
“네가 내 말을 믿는 척이라도 했으면, 순순히 알려주려고 했지.”
“그, 그건… 아니, 누구라도 갑자기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나 같은 반응 아니겠냐?”
저 다급한 표정 좀 보라지.
거의 다 넘어왔군.
절로 내면에서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뭐, 관심 있으면 얘기해. 옛정을 생각해서 귀띔 정도는 해줄 수 있거든.”
“……!”
“대신, 너도 내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는 걸로.”
“그게 무슨…?”
멍하니 반문하는 유리나를 보며 내가 싱긋 미소 지었다.
“지금 당장 마탑에서 떠나주라. 그게 내 부탁이야.”
***
미끼를 꿰었으니, 이제는 물가로 던질 차례였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저문 저녁.
“저기요.”
“……?”
“프레이 던 마그마르 님이시죠?”
상업지구에서도 외곽지라 인적 자체가 드문 곳이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천천히 이쪽을 돌아봤다.
“여유로우시네요. 내일 결승전을 치르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요.”
“…날 어떻게 알아봤지?”
“우연찮게 들어서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유리나랑 제가 친구거든요.”
“친구…?”
“정식으로 소개하죠. 저는 세타 쿤 이그니스라고 합니다.”
“…역시 개막전의 그 녀석인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로브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에 비해 나는 맨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어 놓고 있었으니.
예의 마법 대전 때의, 평범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래서 꽁지를 말고 스스로 대전을 포기한 도망자께서, 내게는 무슨 볼일이시지?”
“어휴. 무서울 만도 하죠.”
“…뭐라고?”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제노스 델 카이클. 걘 진짜 괴물이거든요.”
피식.
사내의 입가로 명백한 조소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더 겁쟁이였군.”
“그런 의미에서, 프레이 님은 이길 자신이 있으신가요?”
“물론. 설마하니 내가 그딴 핏덩이에게 질 것 같나?”
“그리 자신 있으시면, 저랑도 한번 붙어보실래요? 간단한 몸풀이로다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에이, 뭐 어때요. 몸풀이 정도로는 좋잖아요?”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다만, 상종할 가치조차 없군.”
사내가 몸을 돌렸다.
허나, 내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저한테 이기시면 이거 어디서 구했는지 알려 드릴게요.”
“……!”
내가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불사조의 깃털이었다.
실제 나이가 마흔을 넘어선 프레이 던 마그마르는 불사조를 직접 목격하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그가 수습 마법사였던 시절, 탑주의 제자인 그도 원정대에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걸… 어디서 구했나?”
“알려 드릴 순 있는데, 먼저 제 조건부터 수락하셔야죠. 만약 프레이님이 지면, ‘마나의 맹세’를 걸고 제 질문에 한 가지 답해주시는 걸로.”
“뭐…?”
“싫음 말고요.”
대게 이런 일은 배짱이 중요했다.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표정으로, 이번에는 내가 몸을 돌렸다.
그 상태로, 고개만 삐딱하게 꺾으며.
“어때요,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