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통수에 통수(1)
예상치 못한 둘만의 예정이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멈춰라.”
“…….”
이런 작은 이벤트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을 타고 수도를 벗어나 꼬박 반나절을 내달렸을 때였다.
해가 완전히 뜬 걸로 보아 정오쯤이나 되었을까?
복장조차 통일되지 않은 일단의 무리가 길 한복판을 막아섰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포장된 도로가 아닌 산길을 이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리고 나는 저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역시, 산적은 어딜 가나 국가적인 룰이지.”
“곤란하군. 이 산만 넘으면 데브라 도시에 설치된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을 텐데…….”
워프 게이트는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에만 설치되어 있었다.
사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듯이, 연합 내부에도 자체 게이트는 설치되어 있었지만 두 가지 이유로, 그것은 이용할 수 없었다.
첫째, 오십 이상의 대인원이 게이트를 이용할 때는 출발지와 도착지 관할 책임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출발지야 승인받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문제는 도착지였다.
이만한 대인원이 움직이면, 그곳 책임자는 연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려 할 테니까.
필연적으로, 우리의 동선을 동네방네 노출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둘째는 마탑이다.
게이트를 이용하는 모든 이들의 정보는, 마탑에도 공유된다.
제국의 편임이 분명한 그들에게 혹시나 최종 목적지가 들통 나게 된다면, 추후의 행동에 크나큰 제약이 따른다.
위와 같은 이유로, 자체 게이트는 처음부터 탈출 방법에서 배제되었다.
다만, 이렇게 둘만 따로 움직이면 얘기는 또 달랐지만.
“내가 할까?”
“아니, 내가 하지.”
“그래. 네가 해.”
“……?”
인심 썼다.
직후,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루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저 해주시겠다는데, 내가 구태여 나서서 힘을 뺄 필요는 없으니까.
한데,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척 보기에도 ‘나 두목이요’라고 써 붙여 놓은 듯한 털복숭이가, 인파를 가르며 앞으로 나섰다.
머릿수만 따지면 대략 스물이나 될까?
소규모 산적을 이끄는 두목치곤 그 인상이 사뭇 험악스러웠다.
“거기 아가씨. 너무 내 스타일이잖아?”
“휘이이이이이익!”
제 죽을 무덤인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몇몇 인원들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나는 가만히 그들의 명복을 빌어줬다.
“근래에 밥벌이도 시원치 않은데, 이게 웬 횡재냐. 척 보기에도 어디 귀족가 아가씨처럼 보이지 않냐?”
“흐흐. 저는 이대로 굶어 죽는 건 아닌가 걱정까지 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우리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령이 내려진 지도 벌써 3개월이 훌쩍 지났으니…….”
“씨펄, 전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가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나라에서 토벌령씩이나 내리는 건지.”
…잠깐만.
“방금 토벌령이라고 했습니까?”
“뭐냐, 저 애송이는?”
“애송이가 저승 가기 전에 궁금증이나 풀고 가고 싶어서요. 공국에서 산적을 상대로 토벌령을 내렸다는 말씀이십니까?”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양 나를 쳐다보던 산적 하나가 의외로 순순히 답해줬다.
“산적뿐이겠냐? 나라 안의 나쁜 놈들이란 나쁜 놈들은 전부 다 포함이다. 쫓기고 쫓겨 국경지대 인근까지 도망쳤는데, 거기에는 아예 중무장한 군대가 대기하고 있으니. 씨펄! 그냥 다 뒈지라는 건지.”
“뭐, 그 덕에 이리 돌아와 지금처럼 큰 선물까지 받았잖냐?”
“하긴, 흐흐흐.”
이건 이상했다.
고작 도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극히 예민한 국경지에 군대를 파견해?
“…공국도 전쟁을 준비하는 건가?”
아무래도 루나도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역시 그렇지?”
“집안이 평안해야 바깥일도 도모할 수 있는 법이니까.”
“동감이야.”
하지만, 움직임이 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최소 테라의 내전이 끝난 뒤에나 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 둘이서 뭘 그리 소곤거리나? 내 말만 잘 들으면 목숨은 살려주지. 일단 가진 거 다 내놓고, 여자는 입고 있는 갑옷도 벗어놔.”
“갑옷 받고, 속옷도요. 두목!”
“이 새끼가, 지금 두목의 여자에게 눈독 들이는 거냐?”
“에이 참, 형님! 이런 소규모 인원으로 뭔 놈의 두목, 부두목입니까? 먼저 양보할 테니, 맛만 봅시다. 맛만.”
“니미, 저 아가씨가 음식이여? 맛은 옘병.”
“거, 그런 말씀하시기 전에, 입가에 흐르는 침부터 닦으쇼.”
“…….”
예의 두목이 곧 멋쩍은 얼굴로 입가를 훔쳤다.
그리곤, 홀로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터벅, 터벅, 터벅.
“스읍. 내가 언제 침씩이나 흘렸다고…….”
서걱!
“……?”
순간 그의 얼굴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니, 다른 모든 이들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레 루나가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사박.
예의 두목의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언제…?”
푸-확!
목을 잃은 시신이 뒤늦게 피 분수를 뿜어냈다.
휘리릭! 퍼억!
유려하게 몸을 휘돌린 루나가, 떠오른 머리를 마치 공이라도 차듯 발등으로 쏘아 보냈다.
쐐애애애애액! 퍼억!
“으악!”
부지불식간 날아오는 머리통과 정면에서 부딪힌 자칭 부두목 사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 얼굴이 사뭇 애처로웠다.
나라도 놀랐겠다.
방금 전까지 울고 떠들던 제 상관이, 한순간 목 없는 시신이 되었으니.
저걸로 조금은 정신을 차렸을까?
“쏴! 쏴라아아아아아아!”
“어휴.”
직후, 내 잇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쯤에서 그만했으면 됐을 텐데.
저들은 사선(死線)을 넘어, 아예 지옥 강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티티티티티티티팅!
그래도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 있는 듯, 화살 비는 나름 똑바로 루나를 노렸다.
하나가 사라졌으니, 그 수가 정확히 열아홉.
따다다다다당!
루나는 검 면을 이용해 날아드는 화살들을 모두 쳐냈다.
비록 그 활이 조악하기 그지없다는 점을 감안해도.
역시나, 절로 감탄이 나오는 몸놀림이었다.
왕국 제일의 기사 유망주라는 타이틀은 공짜로 따놓은 것이 아니라는 듯이.
다만,
“앗.”
칭찬하기 무섭게 루나의 신형이 크게 휘청였다.
미처 발밑을 살피지 못한 건지, 시신의 다리를 밟은 직후였다.
그 즉시, 나는 미리 캐스팅해 둔 단거리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터엉!
“……!”
쉴드 마법을 이용해 날아드는 두어 발의 화살을 막아낸 내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주저앉은 루나가 멍하니 이쪽을 올려다본다.
“괜찮아?”
“고, 고맙다.”
부끄러웠는지, 옅게 얼굴을 붉힌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굳이 네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드물게 변명까지 덧붙이면서.
“응, 그러시겠지.”
“진짜다.”
“…알겠다니깐?”
벌떡!
루나가 빠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다. 근래에 조금 많은 일이 있다 보니… 아니, 예상치 못한 사건이 계속 터지니까 정신이 없어서…….”
“…….”
아무래도 그녀는 앞전의 일까지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괴, 괴물!”
“으아아아아악!”
그 증거로, 줄행랑을 치는 산적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내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으니까.
***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지도 만 하루가 지났다.
그럼에도 유리나의 감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불구가 된 아빠.
결국, 반란군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당신.
심지어 할아버지는 가장 믿었던 친우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한다.
대체 그녀에게는, 왜 이런 불우한 일들만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일까?
“…유리나 벤 아리에나?”
“……!”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대와 맞닥뜨렸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곳은 제1마탑.
더욱이 내일이면 바로 마법대전 결승전이 있을 예정이니까.
“…제노스 델 카이클.”
속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반란군의 수괴인, 카이클 공작의 혈육.
꽉 쥐어진 주먹 사이로 손톱마저 파고들 정도였다.
허나…
스르륵.
이내 주먹에서 힘이 빠졌다.
아빠는 틈만 나면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윗세대의 싸움은 윗세대의 싸움일 뿐이라고.
혹여나 친우의 가문과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도, 아랫세대까지 불편해질 필요는 없다고.
그 대상이 세드릭 가문이 되든, 카이클 가문이 되든…….
허나, 그리 얘기하던 아빠는 결국 카이클 가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아빠, 난 절대로 저 녀석을 용서할 수 없어요.’
내심 또 한 번 다짐한 유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안 된다.
여기서 난리를 피우면, 해방군 전체에게 피해가 갈 테니까.
지금의 제노스에게 승산이 전무하다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로.
‘차라리 그 사람을 도와 할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저 녀석까지…….’
갈등이 점차 깊어져만 간다.
“…….”
그런 와중에, 제노스가 천천히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살기를 숨기는 능력부터 길러야겠군.”
“……!”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알겠는데, 여기서 이래 봐야 너만 손해야.”
“…젠장!”
결국 유리나는 이를 앙다문 채 멀어져 가는 제노스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
대도시 데브라에 설치된 게이트를 이용해, 우리는 마침내 제1마탑에 도착했다.
여기서만큼은, 루나의 용병패가 빛을 발했다.
그것으로 게이트를 아주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으니까.
마법 대전은 대륙적 인기를 자랑하는 축제인 만큼, 전역에서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웅성웅성.
결승전은 내일이었고, 모여든 인원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하여, 검문 또한 다소 느슨해진 덕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거기! 빨리빨리 나가세요. 게이트 밀립니다!”
“순서대로 방문첩 작성해 주세요! 확인 안 되면 입장 못 하십니다!”
다만,
“…….”
이제야 제 능력을 보여줬다는 듯, 줄곧 루나의 어깨도 미세하게 치솟아 있었지만.
“…난 잠깐 개인적인 볼일부터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럼 나는 인근 숙소로 먼저 돌아가 있지.”
“통신용 수정구는 가지고 있지?”
“물론.”
품 안에서 투명한 수정구를 꺼내든 루나가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근데, 저 사소한 동작조차 왜 저렇게 신이 나 보이는 건지.
“일 끝나는 대로 그 주파수로 연락할게.”
“기다리겠다.”
루나가 미련 없이 뒤로 돌아섰다.
아마 탑 인근 숙소를 중심으로 유리나를 찾아 나설 생각인 모양인데…….
“너…?”
“어?”
루나와 헤어진 지 이제 10분이나 지났을까?
탑 1층을 둘러보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위층에서 내려오는 유리나와 딱하고 마주쳤다.
…이제부터 단단히 마음먹어야겠다.
앞으로 루나가 하는 일이라면, 일단 막고 보겠다고.
“뭐야 너. 떠난 것 아니었어?”
“방금 돌아왔지. 그보다, 얼굴이 왜 그래?”
“내 얼굴이 뭐가?”
화들짝 놀란 유리나가 제 얼굴을 매만진다.
그제야, 다소 뜨거워진 체온을 느낀 것일까?
“나, 나 먼저 간다. 약속이 있어서.”
“야, 야. 잠깐!”
그리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탑을 뛰쳐나가는 그녀였다.
아니, 사람 말은 다 듣고 갈 것이지.
“…근데, 쟤 울고 있던 건가?”
한차례 고개를 갸웃한 내가, 이내 유리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