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탈출(3)
지금부터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연회를 조기에 파할 수는 있었다.
허나, 체면 때문에라도 공국이 당장 대병력을 움직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스스로의 무능함을 만천하에 알리는 꼴이니까.
고작 단 세 사람에게 궁을 털렸노라고.
하니, 최소한 스승님이 언급한 자정까지는 안전할 것이다.
힐끗.
생각과 동시에 실비아 쪽을 돌아봤다.
“…쳐다보고 지랄이야.”
“어허.”
“지랄이세요.”
…그냥 이참에 저것부터 훈육해 둘까?
그도 아님…
‘…아참!’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지금 내 품 안에 스승님이 맡겨두신 아공간 주머니가 있었다.
내면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하나쯤 몰래 슬쩍해도 들킬 확률은 낮지 않을까.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그 왜,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아, 고민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무척이나 탐이 나는 물건이 지금 이 안에 있었다.
심지어 그 물건은 스승님조차 눈여겨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고.
내 머릿속 지식이 정확하다면, 그것의 이름은,
‘불사조의 깃털.’
달리 피닉스라고도 불리는 신수.
1,000년에 한 번만 대륙을 비행한다고 할 정도로 보기 드문 마물이었다.
특히나 불 계열 마법사들에게는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하는 생명체이기도 했다.
다만, 그것에서 떨어져 나온 깃털은 별 볼 일 없었지만.
이 시대의 의원들은 말한다.
체온이 1도가 낮아지면, 인간의 면역력은 30퍼센트씩 떨어진다고.
일단 면역 체계가 무너지면, 사람은 온갖 합병증에 시달리게 된다.
물론 반대로 체온이 1도 올라가면, 면역력은 30퍼센트 증가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불사조의 깃털은 효과가 뛰어났다.
그저 지닌 것만으로도 체온을 크게 높여 갖가지 병치레를 막아줬으니까.
허나, 단지 그뿐이다.
마법사들이 불사조의 깃털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이었다.
구하기는 극도로 어려우나 막상 손에 넣어도 쓰임새는 보잘것없었으니까.
다만,
‘그 보잘것없는 깃털을 잘만 쓰면 불사조의 둥지를 찾는 데 이용할 수 있지.’
그냥 당당하게 지분으로 때어 달라고 할까?
아무리 그래도 이걸 보상으로 요구하기는 아쉬운데…….
내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세타 쿤 이그니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를 불렀다.
“응?”
“잠깐만 시간을 내어줄 수 있나?”
“……?”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의 루나를 보며 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여태 트루크 왕국인으로 변장한 그녀의 모습은 그 나름의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간? 나랑?”
“그래.”
그녀와의 첫 만남은 썩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다.
초면에 웬 반말이냐며 눈살을 찌푸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으니까.
더욱이 신분의 차이 또한 엄청났으니, 애당초 어색할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뜻이다.
그나마 유리나와 실비아와는 아카데미라는 접점이라도 있었지.
“싫은가?”
“아, 물론 내어줄 수 있지. 근데…….”
“……?”
“우리, 이제 완전히 말 놓기로 한 거지?”
“…….”
심지어 그녀는 나보다 3살이나 더 많았다.
***
“스노비~”
서큐버가 앙증맞은 날개를 파닥이며 다가선다.
그 앞, 어딘지 모를 방의 탁자에서 스노비 2황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좋은 소식 하나랑 안 좋은 소식 하나를 가져왔는데. 뭐부터 들을래?”
“…좋은 소식부터.”
“그럴 줄 알았지.”
‘짝!’ 하고 손뼉까지 친 서큐버가 눈웃음 지었다.
“럼프와 앤그리에게서 연락이 왔어. 시킨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고 말이야. 트라오레 백작이 눈에 불을 켜고 흉수를 찾고 있다는데?”
“다행이네. 안 좋은 소식은?”
“스란에 심어둔 우리 편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빛의 마녀를 놓쳤다나 뭐라나.”
멈칫.
이 부분에서는 스노비도 미간을 찌푸렸다.
“놓쳐? 그러니까, 빛의 마녀가 도망쳤다는 건가?”
“응. 왜? 이미 예상했던 일 아니야?”
“파괴도 아니고 도망…? 최소 궁 하나는 날려 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노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탈출했는지가 의문인 것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능히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였으니까.
조직을 위해 비사(祕史)를 듣고도 잠자코 있던 여인이다.
만약 독하게 마음먹었다면, 스노비 그 자신도 해할 수 있었겠지.
이제는 그녀도 진실에 확실하게 다가섰으니까.
“곤란하군.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내가 알아볼까?”
“…아니.”
잠시 고민하던 스노비가 고개를 저었다.
“네게는 따로 부탁할 일이 있어. 난 이대로 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어, 진짜?”
“들어서 알겠지만, 최근 1황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거든.”
“그러니까, 본격적인 황위 쟁탈전이네?”
“슬슬 후계 책봉일도 다가오니까. 황제의 성격상, 본인이 바라 마지않는 땅따먹기를 누가 더 잘하느냐에 따라, 황태자도 결정되겠지.”
“흐응~”
“그러니 넌 이대로 ‘혈우(血雨)’와 접촉해 봐.”
“……!”
순간 서큐버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누, 누구? 혈우?”
“그래.”
“암살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필요하다면. 그보다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선부터 대어두려는 거지만.”
“…정말 괜찮겠어? 걔네들, 어지간한 금액으로는 들은 척도 안 할 텐데?”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돈으로도 안 될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지.”
“…아니, 움직일 수밖에 없어. 내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줄 예정이니까.”
“음… 아무리 그래도 느낌이 세한데…….”
서큐버조차 그들을 꺼리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혈우.
그 이름의 기원은 머나먼 동대륙에 있다고 들었다.
다만, 내포한 뜻은 무척이나 광오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핏빛 비가 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더하여, 혈우의 의뢰 성공률은 백 퍼센트.
현시점 대륙 제일의 암살조직이었다.
***
“…….”
숨 막힐 듯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루나의 요청으로, 지금 나는 그녀와 단둘이 길을 걷고 있었다.
그사이 세디스와 실비아는 서문 주변을 정찰하고 있기로 했고.
한데, 내게는 이게 꽤나 고역이었다.
“어디까지 가려고?”
척 보기에도 얼음 그 자체인 기사 아가씨에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더욱이 우리 사이에는 3년이라는 긴 공백이 있지 않던가?
“일단… 고맙다.”
“…갑자기?”
“테라로 돌아와 주기로 해서. 우리를 도와주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아아, 그 뜻이었나.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너뿐만 아니라, 네 동료들까지 모두. 일단 그곳에 들어서면 오늘처럼 쉽게 탈출하기는 힘들 거야. 그래서 미리 얘기하는 거다.”
“너희는 탈출했잖아?”
“같은 실수를 반복할 이들이 아니니까.”
“하긴…….”
“나는 네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네가 왕국에 그리 좋은 감정이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
말을 이어 나가는 그녀의 진심이 절절히 느껴졌다.
하여, 가만히 듣고만 있었는데…
“다만… 방금의 말들과는 별개로 세디스라는 그 아이는…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
잘 나가다가 여기서 세디스가 왜 나와?
잠시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혹, 그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겠나?”
“그건 왜?”
재차 이어지는 내 물음에 한차례 한숨을 내쉰 루나가 말을 잇는다.
“…알다시피 동대륙에서나 사용하는 스네이크 소드. 그러니까 연검은 그리 흔한 무기가 아니다. 내가 알기로, 이그란트 대륙으로 한정하면 딱 한 곳 정도가 있지.”
“거기가 어딘데?”
“총인원이 고작 스물밖에 되지 않는, 대륙 최악의 암살단.”
“암살단…?”
“은사(銀絲)와 연검은 오직 그들만의 전유물이다. 다루기도 극히 까다로울뿐더러, 그만한 숙련도라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거듭했겠지. 하니…….”
그러고 보니 론지에 가문은 왕국 최대 규모의 정보 조직을 운영했지.
뒷말은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근심으로 가득한 저 표정이 확신을 주고 있었다.
음지에 사는 이들은 으레 뒤통수를 치곤 했으니까.
한편이 된 지금은 훨씬 더 불안할 터였다.
“얘기 중에 미안한데.”
“……?”
“난 내 동료를 믿어.”
“…….”
“혹시나 세디스에게서 그런 낌새가 보이거든, 네가 먼저 내 뒤통수를 쳐. 상대가 루나 틴 론지에라면, 기꺼이 맞아줄 수 있으니까.”
“……!”
살포시 눈을 크게 뜨는 루나를 향해,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뢰를 담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린, 동료잖아?”
***
자정 무렵, 서문 인근.
마침내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성문을 두고, 우리는 한곳에 모여 있었다.
물론 하나같이 한 보따리씩 짊어진 도합 일백여 명의 사람들도.
원래 각 성문은 당일 저녁 8시부터 익일 6시까지 일제히 폐쇄되었으나.
지금은 외부인들도 방문하는 연회 기간이었기에 24시간 상시 개방되어 있었다.
솔직히 이것도 조금 걱정했는데, 공국에서 따로 손은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뭔 작전 회의씩이나 하냐. 그냥 뚫지? 서문은 궁이랑도 거리가 가장 멀어서,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가는 게 답이라니까?”
“당연히 그러시겠죠. 연합주님은 정면 돌파 아니면 속전속결. 그런 생각들밖에 못 하시니까요.”
“어허. 어딜 제자의 하녀 따위가 이 몸의 의견에 토를 다느냐?”
“…수준 떨어져서 정말.”
실비아가 상종할 가치도 없다는 듯 팩하고 고개를 돌렸다.
“근데, 에이스 스승님은요?”
“걱정 마. 궁 바깥으로 빠져나간 것까지는 확인했으니까.”
“다행이네요.”
“말했잖냐. 도망치는 거 하나만 따지면, 녀석은 십이월 중에서도 제일이니까.”
밤은 점차 깊어져만 갔다.
우리가 영양가 없는 대화만 이어가고 있을 때, 이번에도 예상외의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 말한 루나가 성큼성큼 성문을 향해 다가가려 했다.
신호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건, 타고난 그녀의 성격인 모양이다.
“자, 잠깐만. 뭘 어쩌려고?”
“내게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물건이 있어서.”
“물건…?”
실비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야, 뭐야. 저 박력 넘치는 여기사님은?”
세디스는 아예 눈까지 초롱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말대로 루나의 모습은 위풍당당 그 자체였으니까.
머리 위의 우스꽝스러운 구름 모자는 벗어 던진 채였고.
햇빛에 그을린 피부조차 원래의 희고 깨끗한 색깔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와중에, 검은색 두 눈에서는 오묘한 광채까지 흘려대고 있었으니.
저건 누가 보더라도…
“우와, 얼굴이 무슨 깡패…!”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리던 문지기 병사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남자라는 생물은 다 똑같았다.
허나,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처억.
어느새 서문 바로 앞까지 다가선 루나가 망설임 없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B, B급 용병패?”
“……!”
이미 우리가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오던 병사가 눈을 치켜떴다.
루나가 내민 것은 무려 B급 용병패였다.
단순하게 비율로만 따져도, A급 용병패는 상위 1퍼센트.
B급은 상위 10퍼센트에게만 지급되어 있었다.
바야흐로 용병 1,000만 시대.
실로 엄청난 신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대부분이 D급 이하의 용병이고, C급조차 20퍼센트를 넘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으니까.
무엇보다, B급 용병부터는 최대 이백 명으로 이루어진 용병단을 꾸릴 수 있었다.
언제 저런 것을 준비한 건지.
그런 신분 탓인지, B급 용병패는 일단 확인만 되면 일행들까지도 통과시켜 주는 것이 관례였다.
가령 최고위 귀족이 성문을 통과하는데, 그 아래의 수많은 식솔들까지 일일이 검문하지는 않았으니까.
그 자체로 결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저 바보…….”
무슨 이유에서인지, 실비아가 제 이마를 탁하고 쳤다.
“저럴 거였으면 애당초 들어왔을 때처럼 트루크 왕국의 신분패를 이용했겠지.”
“저걸로도 통과가 어려울 거라는 뜻이야?”
“…공왕이 머저리가 아니라면.”
내 시야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글아이 용병단…?”
잠시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던 문지기가 중얼거렸다.
“근래 용병단이 성도 내로 출입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였는데…….”
“들어올 땐 남문으로 들어왔어요. 약 1시간 전에.”
“한 시간 전에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왜 벌써…?”
“긴급 의뢰를 받아서, 이리 급하게 떠나게 됐어요.”
루나의 대답에도 문지기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남문이라고 하셨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시간이 없습니다.”
아직 궁의 소식은 듣지 못한 것일까?
예상외로, 잠시간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던 문지기가 이내 길을 열었다.
“통과하시지요.”
“…고맙습니다.”
순간 루나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치솟았다.
그리곤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아, 일행 분들도 각자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명패를 제시해 주시지요.”
“에?”
“위쪽의 지시입니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궁 내부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왕명이니, 부디 협조에 따라주시길.”
“…….”
궁 내부에 그만한 변고가 생겼다.
자세한 내막은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이 정도 검문 강화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어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비아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다 된 밥에 루나 뿌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