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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84화 (84/251)

84화. 탈출(2)

“개소리야.”

역시나,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실비아였다.

물론 부정적으로.

“그게 가능했으면, 개나 소나 궁 안으로 침입할 수 있었겠지. 성벽 밑바닥에는 이중, 삼중으로 덧댄 강철판이 박혀 있어. 그건 어떻게 할 건데?”

“이 부분은 나도 동의. 깊이만 해도 최소 오 미터는 훌쩍 넘는다고 들었어. 상식상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면은 단단해지니, 그 밑으로는 우리가 손댈 수조차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건데…….”

“그 와중에 요란이라도 떨어봐. 바보가 아닌 이상, 저기 있는 기사들이 당장에 눈치챌걸?”

실비아와 세디스가 번갈아가며 태클을 걸었다.

더하여,

“알고 있겠지만, 빛의 구도 안 된다. 땅 밑은 빛 한 점 스며들지 않아 마력이 상당 부분 약해질뿐더러, 모아 둔 힘도 이미 다 써버렸거든.”

지켜보던 스승님까지도.

이게 빛의 구가 만능이 아닌 이유였다.

소리 없는 암살자가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그 임팩트는 사뭇 패악적이었다. 하지만 빛의 구는 지닌바 경지와 상관없이, 한 번 사용하면 꽤나 많은 대기 시간이 필요했다.

예를 들자면, 식물의 광합성이다.

일종의 충전 에너지랄까?

“빛의 구는 처음부터 생각도 안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녹여 버릴 려구요.”

“아, 답답하네. 고작 떠올린 게 불꽃 마법이라는 거? 최소 성벽만 한 두께의 강철판이라고. 실컷 달구다가 땅 밑에서 날 밤 까고 끝낼래?”

“하면 어쩔래?”

“미친, 하면 내가 니 시녀다!”

“…그 말, 분명히 기억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모두 들으셨죠?”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치솟던 짜증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아니, 이제는 절로 콧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실비아, 저 성질 더러운 계집애를 시녀로 부릴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훈육(?)시킬지, 상상만으로도 어깨가 춤을 췄다.

“하? 조건은 너도 똑같다. 못하면 내 종이 되는 거야. 알겠냐?”

“응~ 그럴 일은 없겠지만.”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실소를 애써 삼키며, 이내 나는 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아주 열심히.

***

우르르르!

“찾아라! 아직 성문은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샅샅이 훑어라! 이대로 놓치면 공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이다!”

발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최대한 멀어진다.

그러면서 눈에 띄지 않는 정원의 구석까지 바투 옮겨 붙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소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설마하니 높이 10여 미터가 넘는 거대한 성벽을 어찌할 것이라고는 저들도 생각하지 못할 테지.

장미 넝쿨로 우거진, 외벽 바로 앞.

툭, 툭.

내가 생각한 목표 지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눈속임용 환영 마법을 펼치기에도 최적의 장소다.

인근의 넝쿨들을, 더 길고 무성하게 꾸며주기만 하면 됐으니까.

쉽고 간단할수록 오히려 알아채기 어려운 것이 환영 마법이었다.

물론,

“너… 진짜 아타락시아 페르잔과 같은 케이스였어?”

실비아는 이걸로 내가 올 라운더(All-rounder) 매지션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듯했지만.

지금까지 선보인 마법만 파동에 대지, 환영, 빛, 바람, 화염까지.

그것도 꽤나 수준급으로 다루는 내 모습은, ‘초월’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지.

“글쎄다?”

물론 그렇다고 순순히 대답해 주면 재미없지.

직후, 나는 한 손으로 땅을 파는 디그(Dig) 마법을.

다른 한 손으로는, 일대의 소리를 차단하는 싸일런스를 펼쳤다.

푹! 푹! 푹!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휙!

상당 부분 땅이 깊게 파였다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나는 곧장 아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쿵, 쿵, 쿵.

“여긴가 보네.”

눈앞에, 일견 보기에도 육중한 강철판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이게 성벽 바로 아래에 박혀 있다는 그것이겠지.

“고생하기는 했는데, 이제 어쩌시려고?”

어느새 구덩이로 고개를 들이민 실비아가 한껏 비아냥거렸다.

쾅! 쾅!

“그러니까 안 된다고. 딱 봐도 무지막지하게 두껍지 않냐? 그걸 불꽃으로 녹이려면, 같은 곳만 몇 날 며칠을 쪼아대도 부족할…….”

“아,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 거, 되게 땍땍거리네.”

“……!”

언제 그녀가 이런 취급을 당해봤겠는가?

또 쌍시옷 소리가 섞인 욕지거리가 나지막이 귀청을 때리는 듯했다.

“못 뚫기만 해봐라.”

이윽고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내가 하나의 마법을 캐스팅했다.

“파이어 스피어(Fire Spear).”

“헹? 고작 한다는 게 파이어 스피어? 진짜 어이가 없어서, 3써클 마법으로 뭘 어쩌겠다고…….”

화륵! 화르르르륵!

실비아의 목소리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집중에 집중을 거듭해야 할 때니까.

순간적으로 심장의 써클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그러자 손안의 불꽃이 거칠게 타올랐다.

부글부글.

그러고도 모자라 주변의 흙더미들마저 일부 녹여대기 시작한다.

“뭐… 뭣!?”

열에 강한 흙을 녹이려면, 얼마나 높은 고온을 품어야 할까?

불꽃도 온도에 따라 색깔이 달랐다.

다시 말해, 화염에도 종류가 있다는 뜻이다.

염화(炎火)는 불꽃 안에 불꽃을 하나 더 만든, 일종의 이중 불꽃이다.

더하여, 폭발력까지 지녔다.

가히 일대 다수의 전투에서 제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청화(靑火)는 차가운 불꽃이라는, 다소 모순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겉은 차가우나 속은 그 어떤 불꽃보다 뜨겁다.

최초 불꽃에 접촉된 대상은 한기를 느끼나, 미처 인지할 새도 없이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이게 상성 면에서 제법 골치 아픈 것이.

냉기와 열기를 동시에 품고 있는 불꽃이었기에, 다루기도 까다로웠지만 맞서는 적의 입장에서는 극악이었다.

마지막으로, 흑화(黑火).

지옥 불을 그대로 소환해 낸다고까지 알려진, 초고온의 화염.

같은 불꽃마저 잡아먹는다고 알려진 검은 화염이다.

물론, 8써클 헬파이어와는 위력 면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지만.

당대에 헬파이어를 쓸 수 있는 이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걸 흉내라도 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흑화는 불꽃 계열 마법사들에게 꿈의 경지나 다름없었다.

앞선 염화와 청화는 오직 특수한 훈련 과정을 거쳐야만 다룰 수 있었다.

흑화는 거기에 더해 재능까지 타고나야 했다.

단, 이것들에도 각기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그 예로,

쯔어어어엉!

순간, 내 몸 안의 마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대략 전력의 절반쯤 되는 마나가 소진되었을 때, 손안의 불꽃 창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타닥! 타다닥!

이전처럼 거칠게 타오르지는 않았으나, 고요하게 강한.

흑화의 창이다.

‘그래 봐야 모두 기교일 뿐이지만.’

직후, 나는 그걸 망설임 없이 철판을 향해 찔러 넣었다.

치이이이이이이이이이!

희뿌연 연기가 주변을 잠식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

해가 완전히 저문 저녁.

“설마 이런 게 가능할 줄이야…….”

우리는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다.

발칵 뒤집힌 내부와는 달리, 외부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과일 상 앞에서 흥정을 거듭하는 저 멀리 사내도.

연인 관계인지, 팔짱을 끼고 으슥한 곳으로 향하는 한 쌍의 남녀도.

이미 거나하게 술에 찌든 채 삼삼오오 모여 2차를 가는 무리까지.

곧, 우리는 조용히 그 번화가 사이로 섞여들었다.

“아,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어깨가 다 결리네.”

“…….”

“어디 여관 하나 잡아서 안마나 받고 갈까? 마침 전용 시녀도 있겠다.”

“이 씹새…….”

“어? 방금 뭐라고?”

“…잊었나 본데, 위험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거든?”

“말이 짧다?”

“…요.”

“뒤에 주인님도 붙이셔야지.”

“…….”

직후, 입만 ‘주인님’이라고 오물거리는 실비아였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처음이니 이 정도로 봐주기로 했다.

기분이 가히 나쁘지 않았으니까.

애당초 저리 말을 듣는 것만 해도 어딘가?

“진즉 너한테 맡길 걸 그랬다 야.”

“앞으로 애용해 주시지요. 제가 아카데미 때부터 저 녀석 전문 일진이었거든요.”

“그래? 큭큭큭. 좋아, 좋아. 그보다,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예?”

내 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나는 일단 연합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 혹시나 몰라 세실리아에게 미리 언질을 해둔 게 있지만… 성격상,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

“그런 거라면 같이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오히려 우르르 몰려다니면 괜한 의심만 받게 될 거야. 자정에 서문 앞에서 보자. 거기가 그나마 경비가 적고, 본사와도 제일 가까우니까.”

연합이 외곽지를 자처한 또 다른 이유였다.

최초, 공국에서 세금 감면을 포함한 각종 특별한 혜택을 제공해 준 것에 대한 답례로.

연합은, 서문 인근의 외곽지에 본사 건물을 짓기를 자처했다.

최고 중심지를 내어주려 한 공왕의 배려까지 거절하고 말이다.

스스로 성문의 한 축을 담당함으로써, 공국의 인력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 한 것이다.

그 탓에 다른 문들에 비해 서문은 유독 경비 수가 적었다.

물론 그게 오늘날 이리 요긴하게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내일이면 그 서문조차 경비가 대폭 강화될 거야. 외부로 파견 나가 있는 인원들은 당분간 복귀하지 말라고 명해뒀고. 지금 본사에 남아 있는 건… 대략 백 명 정도? 그 인원만 데리고 곧바로 공국을 탈출하자. 이 밤이 끝나기 전에.”

“음…….”

“나머지는 세타. 너만 믿는다?”

잠시 고민하던 내가,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세요.”

***

그 무렵, 궁 내부에는 잊혀진 한 사내가 있었으니.

“거기 서라!!!!”

“너라면 서란다고 서겠냐!?”

“에이스 디 파르마! 뭇 기사들에게 존경받는 십이월의 일인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느냐!?”

“존경은 씨바, 그게 밥이라도 먹여 주냐? 그리고, 하나에 떼로 덤비는 놈들이 개소리야.”

연신 기나긴 복도를 내달리며 에이스가 고함쳤다.

가로막는 이들?

물론 있었다.

다만,

퍽! 퍼어억!

“…컥!”

검 등을 이용한 칼질 한 방에, 그 모두가 가을바람의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졌지만.

대장을 포함하여 두 제자가 외부로 빠져나간 것은 이미 확인했다.

이제 그 자신만 궁을 탈출하면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갑자기 왜 눈물이 나려고 하지? 망할…….”

테이블 위에 차려진 갖가지 산해진미.

귀를 즐겁게 만드는 감미로운 음악.

주변에 산재한 각국의 미녀들이, 잠시간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듯했다.

한데도 그는, 아닌 달밤에 사내놈들과 이따위 추격전이나 벌이고 있었으니.

“진짜 다 죽여 버리고 싶네.”

그렇다고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엑스톤 폴 다우니스.

앞뒤 꽉 막힌 그 철의 기사에게, 일말의 여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까.

만약 생각대로만 된다면,

‘공국과 척을 지지 않아도 된다.’

날듯이 뛰는 에이스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번져 갔다.

“뒤를 잡아라! 포기하지 마라! 아예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늘어지란 말이다!”

“가장 먼저 잡는 이에게, 십이월과의 처음(?)을 양보하겠다!”

물론, 그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니네는 좀 닥쳐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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