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83화 (83/251)

83화. 탈출(1).

“와, 진짜 하나같이 정상이 아닌 인간들이네.”

실비아가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그 옆에서 루나가 보조를 맞춘다.

혼란을 틈타 연회장을 빠져나온 직후였다.

한데,

채챙! 채채채채챙!

“물러서라! 검로의 범위에 휘말리지 마라!”

“무려 십이월 간의 전투다! 빨리 죽고 싶은 놈들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떨어져!”

마침 그녀들이 나아가는 경로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실비아가 작게 이를 갈았다.

“되는 일이 없네.”

“…….”

“여기서 옆으로 틀자. 중간에 후궁(後宮)으로 옮겨가는 외부인들 사이로 섞여들면, 의심받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 진즉 그랬어야 하는 건데…….”

순간, 한창 말을 잇던 실비아가 멈칫했다.

그제야 무언가 어색함을 느꼈던 탓이다.

이건 꼭, 벽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지 않은가?

“이 미친…….”

예상대로 루나의 시선은 연신 통로 끝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너, 혹시라도 저기 낄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마. 정도껏 해야지, 진짜.”

“…방금 너도 들었지 않나? 무려 십이월 간의 전투다. 살아생전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겠…”

찰싹!

루나는 채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직후, 실비아의 손바닥이 루나의 등짝 위에 통렬하게 작렬했으니까.

“앗…!”

“앗은 얼어 죽을. 얼른 안 뛰어? 시선 거둡니다. 발걸음 빨리합니다. 실시!”

“…….”

“엥? 복명복창 안 해? 네 수준에 딱 맞춰서 내가 지금 맞춰주고 있잖아. 뇌에 근육만 들어찬 기사들의 방식으로다가.”

“…하지만…….”

“뭐? 안 들려. 크게 말해!”

“하지만 보고 싶다고!!!!!”

“……!”

실비아조차 깜짝 놀랄 만한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음은 당연했다.

“어떻게 마법사를 그 정도 수준까지 키웠는지,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단 말이다! 에이스 디 파르마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녀석의 스승이니까!”

“…세타 쿤 이그니스? 아니, 흥분하지 말고 가만있어 봐. 내가 좀 관심을 보인다고, 걔가 뭐 엄청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본데, 실상은 쥐뿔도 없거든?”

“아니! 단언컨대, 세타 쿤 이그니스가 그대로 마법 대전을 속행했다면, 우승도 가능했을 거다. 그 녀석은 순수 근접전만으로도 나와 호각을 이뤘었으니까!”

“뭐? 정말?”

이번만큼은 실비아도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누구던가?

무려 제국에서도 탐을 내는 인재, 루나 틴 론지에가 아니던가!

직후, 실비아는 자초지종을 캐물으려 했다.

허나,

“……!”

실비아는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

이내 그녀들의 눈앞에 뻥하니 뚫린 벽면이 나타났으니까.

아직도 내부에 희뿌연 먼지가 자욱한 것이, 파손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구멍인 듯싶었다.

문제는, 그 흔한 창문조차 없는 방 안이었기에 먼지가 가라앉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거 설마…….”

“…여기로 빠져나갔나 보군.”

희뿌옇게나마 먼지 너머로 두꺼운 출입문이 보였다.

하면 그 인간들은 벽을 뚫고, 저 문을 통해 외부로 빠져나갔을까?

“…그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눈 부릅뜨고 주변을 한번 살펴봐.”

루나는 순순히 실비아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이윽고 차곡차곡 쌓인 내부의 나무상자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 상자들은, 예상컨대…

“여기, 공왕의 선물을 보관하는 창고 같은데?”

“…역시 그런가?”

하지만, 그리 반문하는 루나의 마음은 왜인지 모르게 찝찝했다.

“대게 창고로 이용되는 곳은 습기가 없고 통풍이 잘 되는 장소를 선정하는 것이 기본이거든?”

“…하지만 이런 허술한 곳이 왕의 창고일 리는…….”

“없지. 정확히는 임시 보관소쯤 되겠네.”

“…그런데?”

“그 대상이 왕이야. 상자에 어떤 귀중품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책임자라고 혹시 모를 재수 없는 일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가령 정력제나 고급 마법 재료 같은 건, 조금만 습해도 금세 썩어버리고 마는데.”

“아!”

“다시 말해, 문은 아니야. 저 앞에 병력들이 몰려 있을 게 뻔하기도 하고. 보안상 창문은 만들어 놓기 힘들 테니, 다른 어딘가에 환풍구 정도는 필시 뚫어 뒀을 거란 말이지.”

“거기로 빠져나갔을 거란 뜻이군.”

직후, 루나가 곧장 눈을 감았다.

전신의 감각으로 바람이 통하는 곳을 느끼기 위해서.

휘오오오!

“…있어!”

오래지 않아 천장 한편에서 서늘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지극히도 평범한, 직사각형의 대리석이었지만.

자세히 보자 아주 미세하게 틈이 벌어져 있었다.

아마도 세게 밀면 일정 범위까지 돌아가는 구조일 테지.

우르르르르!

마침 뒤쪽에서 무리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도 가지.”

루나가 선두를 자처했다.

사뿐히 뛰어오른 그녀가 눈여겨 봐둔 특정 부위를 힘껏 밀었다.

그르릉!

가벼운 소음과 함께 천장 한 면이 휘리릭 돌아갔다.

그 즉시, 루나가 구멍 사이로 쏙 들어간다.

“내 손 잡아!”

“하다하다 이제는 이런 짓까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방법이 없었다.

질끈 입술을 깨문 실비아가 지체 없이 루나의 손을 붙잡았다.

곧이어,

“차, 창고가 털렸다!”

이윽고 천장이 원래대로 돌아가자, 타이밍 좋게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찰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둘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 이내 전면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

“푸하!”

실비아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환풍구의 끝은 역시나 궁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허나,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본궁 앞에는 드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다시 그 정원을 지나 외벽까지 넘어야 완전히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으니까.

“…근데, 탈출에 성공하면 이대로 귀국할 생각인가?”

“뭘 물어. 당연한걸.”

“마탑은?”

“여기서 마탑은 또 왜 나오는데?”

“그곳에 유리나가 있고, 무엇보다 3일 후면 결승전이 있으니까.”

“…….”

“제노스 델 카이클… 그 녀석을 봐두지 않아도 되겠나?”

루나의 물음에도, 실비아에게서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그냥 해본 말이다. 대평야를 거쳐 테라까지… 그냥 돌아가는 것보다 최소 일주일은 더 소요되는 일정이니까. 우리에겐 너무 위험하겠군.”

“…아니.”

“응?”

“괜찮은 것 같은데? 우리가 생각하는 걸 쟤들이라고 하지 못하겠어? 한 번쯤 경로를 틀어주는 게, 도주에는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진심인가?”

“애당초 탈출에 성공만 하면 우리 쪽은 쉽게 포기할걸? 공국의 입장에서야, 그 미친 작자들에게 초점을 맞추려 할 테니. 보물까지 털린 마당에, 아직 정체도 불확실한 우리에게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어?”

“…분명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그러니까, 우리는 그 인간들을 미끼로 느긋하게 유람이나 하면 된다는 거…….”

실비아는 채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어?”

그 포커페이스인 루나조차 순간적으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니네 뭐냐?”

“세타 쿤 이그니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옆쪽.

그리 멀지 않은 풀숲 사이에서, 그 당사자들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

공국 본궁 앞의 거대한 정원.

최초 철의 기사와 마주했던 그곳에서, 나는 실비아들과 합류했다.

내 쪽에서야 쉬운 결정이었다.

어차피 테라로 갈 거라면, 그녀와 함께하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테니까.

다만, 상대방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대체 우리가 왜 네 죄를 같이 뒤집어써야 하는 건데?”

“왜, 나한테 투자하는 것 아니었어?”

“미친놈아. 이렇게 내 목숨까지 올인할 생각은 없었거든?”

“나한테 욕할 기운 있으면, 여기서 어떻게 탈출할지부터 생각해 보시지.”

“…진짜 짜증난다, 너.”

“감사.”

순간 나와 실비아가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풀숲 너머로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심지어 그 움직임조차 사뭇 부산했다.

“이제 어쩔까요, 스승님?”

“…그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네? 갑자기요?”

“너 말고. 거기 있는 세드릭 가문의 아이에게 말이다.”

설마 여기서 자신을 지목할 줄은 몰랐는지,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요?”

“네 나라에 대한 이야기. 세타에게 모두 들었다.”

“…….”

“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우리가 너희를 도와 반란군을 몰아내면, 해방군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직후, 내가 황급히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스, 스승님.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하실 말씀은…….”

“이런 상황이니까 하는 말이다.”

“…….”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 번 배신을 경험한 스승님이니까.

여기서 내가 무어라고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

“그 말씀, 진심이신가요? 솔직히 지금의 전, 할 수만 있다면 농가의 아낙네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라서요.”

“너희가 무엇을 줄 수 있느냐에 따라 내 대답도 달라지겠지.”

“…손을 빌려주신다면 제가. 아니, 저희가 책임지고 폐하께 건의드려서, 연합을 하나의 가문으로 만들어 드리겠어요.”

“……!”

스승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만큼 방금 실비아가 한 말은 놀라웠으니까.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하시는 것보다, 차라리 한 나라의 번듯한 공신 가문이 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글쎄.”

허나, 예상외로 스승님은 고개를 저었다.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 내가 집단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것이지. 연합이 아니라 한 나라의 가문이 되는 순간, 국명(國命)은 거스를 수 없게 된다.”

“…….”

“나는 이미 일국의 왕에게 배신을 당한 몸이다. 실로 무능한 수장이지. 허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머저리까지 되고 싶지는 않아.”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실비아가 답했다.

“…이해해요. 그럼 이건 어떠신가요?”

“……?”

“만약 연합의 도움으로 반란군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독립된 하나의 ‘자치구’를 제공하겠습니다. 정부의 그 어떤 지침에도 따르지 않아도 무관한, 대륙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죠.”

“……!”

이번만큼은 스승님의 동공도 거칠게 요동쳤다.

“그런 엄청난 일을… 너희 왕이 허락할 것 같나?”

“네.”

스승님의 물음에 실비아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응수했다.

“제가 반드시 그리되도록 만들어 보이겠어요. 저, 실비아 스필 세드릭의 이름을 걸고.”

“…….”

***

비슷한 시각, 제1마탑.

“저 괴물 자식…….”

아직 탑에 남아 있던 유리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 막, 연무장 위의 제노스가 승부를 결정짓고 있었다.

그리고 저 승리로 녀석은 결승전으로 가는 티켓을 손에 쥐었다.

“…하아. 근데 나는 왜 이 꼴이냐.”

그에 비해 유리나는 진즉 8강에서 탈락했다.

상대가 무려 마탑주의 직계 제자였으니까.

허나, 이토록 어이없게 패할 것이라고는 그녀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하물며 상성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애당초 같은 ‘불꽃’ 계열 마법사 사이에, 상성이랄 게 무에 있을까?

다만, 그보다 더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건.

탈락이 확정된 뒤, 상대와 나눴던 대화였다.

‘역시 스승님의 말씀대로군.’

‘하아, 하아. 뭐, 뭐요?’

‘불꽃에도 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염화(炎火), 청화(靑火), 그리고 흑화(黑火). 허나, 너는 이중 그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였지. 처음부터 네게 승산 따위는 없었다는 의미다.’

‘지금… 고작 한 번 이기셨다고 저를 모욕하시는 건가요?’

‘그는 이걸 잡기술 따위로 폄하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 점이, 불꽃의 마법사가 시대에서 도태된 이유라고 생각한다.’

‘……!’

이때 유리나가 느꼈던 감정은, 그 어떤 문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너! 방금 뭐라고…!’

‘방금 내가 한 말의 의미가 궁금하다면, 마법 대전이 모두 끝나고 제1마탑으로 찾아와라.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말이다.’

질끈.

애써 그때의 기억을 지워내며 유리나가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불꽃에도 격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상대가 말한 불꽃의 마법사.

앞뒤 정황상, 그건 분명 할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일 테니까.

“빌어먹을, 찾아오라면 못 찾아갈 줄 알고?”

본능이 말해준다.

저들과 할아버지 사이에, 유리나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노라고.

그것도 꽤나 더러운 방향으로.

***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방식은?”

“그런 무식한 방법은 이제 그만하죠. 더군다나, 여긴 뚫고 싶어도 뚫을 벽도 없다구요. 엄폐물 하나 없는 정원에서 무슨…….”

“그럼 뭐, 정면 돌파 말곤 답이 없겠네.”

“그게 더 무식하거든요?”

“아, 뭐 어쩌자고!”

“보다 합리적이면서, 이성적인 방법을 같이 생각해 봐야죠. 마법사시잖아요?”

“…별 씹. 야, 세타. 네 친구 원래 이렇게 재수 없냐?”

“어머. 말씀 좀 가려서 해주세요. 저희, 이제는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 동반자 아니던가요?”

“더도 말고 딱 한 대만 쥐어박게 해주라. 제발.”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여태 티격거리는 스승님과 실비아였다.

“이제 그만들 하시고요.”

다만, 이 와중에도 한 가지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서로의 이익을 따져대던 대화의 분위기가, 이제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지로 바뀌어 있었으니까.

암, 이래야지.

“정 방법이 없다면, 이건 어떠세요?”

“……?”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툭, 툭.

직후, 내가 발바닥을 들어 지면을 두어 번 내리 찼다.

“위로 빠져나왔으니까, 이번에는 아래를 한번 뚫어보는 걸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