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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80화 (80/251)

80화. 공왕, 나와(1)

“씨바,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네.”

에이스가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시간을 끄는 것?

이 정도면 충분했다.

하여, 슬슬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디서 자꾸 기어 나오는 거냐고!?”

눈앞의 땀내 나는 사내놈들은 도무지 줄어들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 더 늘어난 느낌이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들만 최소 스물.

허나, 그 곱절은 넘는 인원이 또다시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음은 나요!”

“여기도 있소!”

“아니, 새치기하지 말라고. 내가 먼저라니까?”

“나는 뒤라도 좋소!”

진정 미친 새끼들이 따로 없었다.

특히 마지막에 뒤(?)라도 좋다느니 헛소리를 지껄이던 놈은 꼭 기억해 둘 거다.

억지 부리지 말라며 지랄발광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서로 붙어보겠다며 난리도 아니었다.

하기야, 이해는 간다.

저들이 언제 다른 십이월을 만나나 봤겠는가?

뒤늦게 이성이 든 게지.

강자와의 싸움은 그만큼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애당초 기사라는 족속들이 이런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즉, 명백한 자신의 실책이다.

“걸려도 더럽게 잘못 걸렸네.”

에이스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제는 진심으로 거부 반응이 들었다.

아예 제대로 붙어보겠다며 웃통까지 벗어 던지는 놈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었으니.

“야, 이 새끼야. 당장 그 옷 안 주워 입어?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냐? 춤추러 온 놈이 이런 데서 사내새끼들이랑 웃통 까고 북적대고 있으면, 어? 뭐라고 생각하겠냐고?”

물론 그 자신도 평소 노출증(?)이 있기야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흥. 뭐라고 생각하긴. 우리야말로 진정한 기사들이라고 생각하겠지.”

“그게 말이야, 방구야?”

“그리고 당신이 다 덤비라고 했지 않소! 왜 이제 와 딴소리요?”

“니네가 언제부터 내 말을 그리 잘 들었다고! 일단 옷부터 입어. 이성에는 관심도 없고, 이런 데서 칼부림이나 처하면서 검에만 미쳐 있다고 어디 헛소문이라도 나 봐. 남 혼삿길 다 망칠 일 있냐?”

“내 알 바 아니오! 그리고 이것도 춤은 춤이오. 칼춤!”

“칼춤은 지랄. 캬악~ 퉷. 얼굴에 춤을 뱉어버릴라.”

진저리가 쳐진다.

이 새끼들, 진심이었으니까.

저게 농담이라면,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놈들이 하나둘은 나왔을 텐데.

하나둘은커녕, 하나같이 얼굴이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애당초 짬이 되지 않아 후순위로 밀려난 놈들조차 보는 눈이라도 기르겠다는 건지 작은 동공을 부릅뜨고 있었으니.

기분이 어떻냐고?

수백에 이르는 남자들이 몸 구석구석을 훑는다고 생각해 봐라.

오싹함을 넘어, 소름마저 돋을 지경이다.

그냥 다 쓸어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바로 그때였다.

“거기까지다.”

“……!”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동아줄처럼.

가뭄 끝에 단비처럼.

진심으로 반가운 인물이 등장한 것은.

직후, 에이스의 얼굴 위로 화색이 만연해진다.

“엑스톤, 너 이 자식!”

“에이스 디 파르마. 내가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어. 경고했지. 미안해. 내가 깜빡했어. 앞으로 잘할게. 진짜로.”

“……?”

“어떻게, 이대로 연회장으로 돌아갈까? 아님, 궁을 나가줄까?”

“…뭐?”

“말만 해. 다 들어줄 테니까.”

물론 앞뒤 상황을 알지 못하는 상대로서는 연신 애꿎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지만.

***

저벅, 저벅.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정말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앞장서 걷고 있는 세논 스승님은 왜인지 일부러 붙잡혀 있었던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방금의 모습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으니.

“여, 여기 시신이 있습니다!”

“한 사람도 숨을 쉬지 않습니다! 일 개 조가 모조리 전멸 당했습니다!”

“비상! 비사아아아아앙!”

땡, 땡, 땡, 땡, 땡, 땡.

기어이 요란한 종소리까지 들려온다.

기실, 에이스 스승님이 사라졌을 때도 저 경보음은 울리지 않았었다.

지금 궁에는 수많은 외부인들이 방문해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내부의 변고를 제3자에게까지 알리고 싶지는 않았을 테지.

그럴수록 내 마음은 점차 초조해져만 갔다.

그 순간.

“내가 갑자기 사람을 죽여서 놀랐냐?”

“네? 그야 뭐…….”

“죽을 만한 놈들이었다. 내게뿐만 아니라, 공국의 입장에서도.”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만 하시는 스승님이셨다.

하여, 이번에는 나서기로 했다.

“스승님. 무슨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연합으로 돌아가서 다시 계획을 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넌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

“아니, 스승님 혼자만 두고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대체 어쩌려고 이러시는 건데요?”

멈칫.

거침없이 나아가던 세논 스승님이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칠악에 대한 네 얘기도 신경 쓰이고. 무엇보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니까,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뭐냐구요?”

“…….”

잠시간 골똘히 생각하던 스승님이 이내 대답한다.

“…나는 이대로 공왕을 잡으러 갈 거다.”

“네? 누구요?”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그도 아니면, 분노에 이성이라도 날아가신 것일까?

진정 개탄스럽게도 둘 모두 아니었다.

“날 구하겠답시고 지금 에이스가 날뛰고 있다며? 다시 말해, 공국의 시선이 모두 저쪽으로 쏠려 있다는 뜻 아니야?”

“그, 그거 설마…?”

“지금 연회장 내에는 외부인 정도를 제외하면 필수 병력들밖에 없을 테지.”

미쳤다.

그것밖에는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을 통째 쳐부수겠다는 말은 진심이셨던 모양이다.

“…먼저 간다.”

와락 인상을 찌푸린 내가 재차 걸음을 놀렸다.

“아니, 제일 중요한 건 아직 말씀 안 하셨잖아요! 이유가 뭔데요!?”

***

비슷한 시각.

“설계도를 넘겨줬다고?”

연회장 한편에 자리 잡은 실비아와 루나는 소리 죽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작은 루나였다.

“응. 어차피 우리한텐 이제 필요도 없는 물건이잖아? 내용은 이미 내 머릿속에 모두 들어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굳이 그랬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혹시나 중간에 새어 나가면 어쩌려고?”

“그럼 운이 없는 거지.”

“…장난하나?”

“뭘 정색은. 그냥, 목적은 몰라도 저 녀석이 여기서 깽판을 쳐줄수록 우리한테는 유리하다고 판단해서. 그래서 넘겨줬을 뿐이야.”

“왜지? 우리가 여기 온 목적. 분명 우군을 포섭할 생각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말이야.”

“……?”

“최근 공왕의 행동으로 보아, 나는 이미 공국과 제국이 한통속이라고 확실시하고 있거든. 이건 동의하지?”

“그야…….”

물론 이 부분은 루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마침내 공왕이 의식을 회복한 이후.

처음에는 루나 또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명정대하며, 공민의 안녕과 공국의 독립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 공왕이니까.

허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절로 친제국주의를 떠올리게 만드는 공국의 행보는 변하지 않았고, 손바닥 뒤집듯 같은 편인 연합을 적대시하던 배신행위도 여전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공왕이 모두 원상태로 되돌려 놓을 거라 판단했건만,

“애당초 자유 연합은 초대장조차 받지 못했다더라. 그런 상황에서 저 녀석이 왜 여기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래서 설계도를 줬다? 다른 목적이 있어 여기까지 온 것일 테니, 저들을 도와 연합을 끌어들이려고?”

“아니지. 고작 연합만 끌어들여서 뭘 할 수 있다고.”

“…응?”

“쉽게 생각해 봐. 공국과 제국이 손을 잡았어. 이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왕국들이 가만히 있겠어?”

“……!”

“이제 알겠니? 우리가 굳이 나서서 제국의 내전 개입 사실을 폭로할 필요조차 없어졌다는 말이야.”

일리 있었다.

안 그래도 독보적인 힘을 자랑하는 제국이다.

그런 제국이 공국과 힘을 합친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것만으로 여타 국가들은 경계심을 한층 강화할 테니까.

“…처음부터 투 트랙을 생각했던 건가?”

“유리나, 그 성질 더러운 계집애만 믿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

이윽고 루나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앞의 상대.

실비아는 언제나 그림부터 크게 그려놓고 대국을 바라봤다.

아마도 그녀는 이곳에서 제국과 공국 사이의 어떤 연결 고리를 찾으려 했을 테지.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겠다는 목표는 같다.

하지만 경로는 두 개다.

유리나는 마탑으로.

루나와 실비아는 공국으로.

대륙을 집어삼키려 하는 제국의 야망을 알리고.

다른 왕국에 경각심을 심어주고.

종래에는, 하나로 똘똘 뭉친다.

‘…믿음직하군.’

결국, 루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함께하고 나니 비로소 보였다.

마법적 재능과는 별개로, 통찰력이나 직관력은 또래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긴, 줄곧 실비아의 판단은 틀린 적이 거의 없기도 했다.

루나라고 이 미친 행위에 처음부터 동참했겠는가?

사실 그녀는 최초 국경을 넘는 것부터 힘들 거라고 판단했다.

제아무리 타국의 영역이라도 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최소한의 대비는 해두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실비아는 대담했다.

내전 이후까지 생각하는 이들이니까.

나라에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반란군이니까, 많은 인원은 투입하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그러더니 과감하게 국경을 넘자고 했다.

고작 단 둘만으로.

중간 중간에 꽤나 위태로운 상황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잘 해결되었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한때 왕국 제일의 정보 조직을 이끌었던 루나인 만큼, 대륙 곳곳에 조력자들이 있었다.

실제로 내전 이전부터 외지로 파견을 나가 있던 정보원들은 여태 복귀조차 시키지 않았다.

만약 내전에서 패하게 되면, 후일을 도모해야 했으니까.

그 부당함을 알릴 이들이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걔 중에는 대륙 최남단의 트루크 왕국에 자리 잡은 정보원들도 있었다.

하여, 이번 일에 그들을 이용했다.

말을 맞추고, 거금까지 들여 초대장을 사들였으며, 신분은 빌렸다.

실제 트루크 왕국인들은 머나먼 이국의 연회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제 싸움을 치르기도 바쁜 이들이니까.

어차피 가지도 못할 쓸모없는 종잇장.

그걸 웃돈을 줘 가며 산다고 하니, 저들이라고 거절할 턱이 있겠는가?

“근데 그 녀석도 제법 잘해주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 녀석?”

“저길 봐봐.”

곧 실비아가 손가락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지, 때마침 중 갑옷을 착용한 기사들이 우르르 출입문을 나서고 있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 말대로 언젠가부터 삼엄했던 호위 병력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분명히.”

“역시 내가 보는 안목이 있다니까?”

으스대는 실비아를 보며 루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세타 쿤 이그니스. 너는 내 생각보다 그를 훨씬 더 믿는군.”

“믿어야지 어쩌겠어. 투자한 게 얼만데.”

“투자…?”

이내 실비아가 피식하고 웃는다.

“그냥 뭐, 그런 게 있어.”

***

굳게 닫힌 연회장의 정문 앞.

부르르르.

내부 안내를 도맡던 시종은 어느새 구석에 처박혀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문지기를 자처하던 두 기사는 이미 스승님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기절한 상태였다.

“왜 굳이 정문으로…….”

“할 거면 정문이 낫잖냐.”

“지, 진짜 하시게요?”

“쫄리냐?”

“쫄린다기보단,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요?”

“뭘, 여기 올 때부터 이 정도는 각오하고 온 거면서. 정 겁나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애송아.”

“공왕은요? 붙잡은 이후에는 어쩌실 건데요?”

“글쎄. 아직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아서.

“…….”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일단 잡아 놓고 심문하지 뭐. 왜 날 가두었는지. 진짜 목적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건 모조리 실토하라고 할 거야. 수틀리면, 반 죽여서라도 불게 만들어야지.”

“…잊으신 건 아니죠? 상대는 일국의 왕이에요.”

“뭐 어쩌라고. 지가 먼저 날 건드렸는데.”

“…….”

곧장 입을 다무는 나를 향해 스승님이 눈을 빛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너한테도 기회를 주마.”

“네?”

“마탑에서 제법 이름을 알렸다지? 근데, 그땐 지금처럼 가짜 얼굴이었다며.”

“그게 왜요?”

“이번에야말로 세간에 정식 데뷔전을 한번 치르자는 거지. 네 진짜 얼굴로다가.”

“……?”

“아, 더럽게 감 떨어지네. 이 안에 외부인들도 많잖냐. 생각해 봐라. 연합에서 쳐들어온 단 세 사람… 아, 세디스를 까먹을 뻔했네. 단 넷이서 일국의 궁을 쓸어버리고, 왕까지 붙잡았어. 누가 우리를 우습게 보겠니?”

“……!”

“그 선봉의 영광을 지금 내가 너한테 양보하겠다는 거야. 할래, 말래?”

끝은 의문이었지만, 내용은 순 협박이다.

나는 안다.

여기서 거절하면, 그저 무자비한 구타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하, 하겠습니다.”

“이왕 할 거면 패기 있게 해라? 지켜볼 거야. 내 마음에 안 들면… 알지?”

꿀꺽.

한차례 마른침을 삼킨 내가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달리 생각이 있으시겠지.

지금은 그리 믿는 수밖에 없었다.

“흐읍…….”

대게 이런 일은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

쾅!

직후의 나는, 가장 먼저 출입문을 세게 찼고.

“……!”

마나가 실린 발길질에 거대한 출입문이 통째 뜯겨 나갈 듯 휘청였다.

한순간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었음은 당연했다.

음악이 멈추어간다.

그사이 무수한 사람들이 멍하니 나만을 쳐다본다.

저 멀리, 상석의 공왕조차도.

허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려야 했다.

지금 스승님께서 바라시는 게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여기…….”

“목소리 작으면 뒤져?”

순간 내가 있는 힘껏 복부의 근육을 쥐어짰다.

“여기, 연합의 대마녀와 그 수제자 등장이시오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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