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대세논 구출 작전(2)
공국 제일의 기사.
달리 십이월의 ‘강철’이라고도 불리는 엑스톤은 지금 무척이나 짜증이 났다.
고작 세 명이다.
하물며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이는 단 하나.
소수라고 방심을 한 것도 아니었다.
대상이 그와 같은 십이월이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면목이 없었다.
눈앞의, 왕좌에 앉아 가만히 이쪽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태양에게.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기뻐했던가?
꼬박 수년 만에 그의 왕께서 깨어났다는 소식에.
당신은, 공국의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성군 중의 성군이었다.
행하는 일들 하나하나가 모두 국민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하여, 당신께서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어딘가 모르게 사람이 달라졌다는 느낌은 끝끝내 지울 수 없었지만…….
‘기감으로 느껴지는 기운은 전하가 분명하다. 의심되는 악기(惡氣)조차 없어. 하니, 이 모든 일 또한 분명 공국에 도움이 되는 것일 터.’
“가까이 오시오, 엑스톤 경.”
“예, 전하.”
이내 상념을 털어낸 엑스톤이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아직 연회가 한창인 와중이었다.
누가 봐도 호위 기사임이 분명한 이가, 왕좌에 다가서는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에이스 디 파르마 때문이오?”
“……!”
찰나, 엑스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왜 모르겠소. 애써 관심 없는 척, 신경 쓰지 않는 척하고 있지만… 내 눈은 줄곧 그에게만 향해 있었거늘.”
“죄송합니다. 지은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경이 무슨 죄가 있겠소. 다만…….”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고민하던 공왕이 눈을 빛냈다.
“그가 사라진 지도 벌써 20여분. 혹, 낌새라도 눈치챈 것은…….”
“그건 아닐 겁니다. 곧장 지하 쪽을 살폈으나, 아직까지 확인되는 특이징후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불행 중에 다행이기는 한데, 영 신경 쓰이는군요. 내 궁에 불순한 움직임이 이토록 많으니…….”
직후, 엑스톤의 시선이 왕을 따라 움직였다.
새까만 피부에, 그와 대비되는 구름 같은 모자가 유독 눈에 띄는 두 여인이 시야로 들어왔다.
물론 그는 저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명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내쫓겠습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요. 아직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는 파악조차 하지 못했으니.”
“…….”
엑스톤은 이번 연회에 참석하는 이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직접 살폈다.
특유의 꼼꼼하고도 신중한 성격 탓도 있지만, 구린 일을 할수록 뒤처리도 확실히 해야 했으니까.
저기 있는 두 여인은, 스스로를 트루크 왕국인으로 소개했다.
밀피오레 후작가의 차녀와 그녀의 호위 기사라고 했던가?
물론, 우정국에서는 트루크 왕국에도 초대장을 발송했다.
혹여나 제 나라만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면 곤란했으니, 세간에 알려진 대표 가문 딱 다섯 군데 정도만.
사실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트루크 왕국은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거리도 거리였지만.
야만인들만 사는 그곳은, 일 년 사이에도 지배층이 수십 번도 바뀌곤 하는 곳이니까.
오지 않을 것이라 보고 대충 구색만 갖춘 것이었는데, 실제로 찾아온 이들이 있어 의아했다.
아니, 찝찝했다.
트루크 왕국은 게이트조차 없는 곳이라 당장은 확인도 불가능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륙에는 정보로 생을 연명하는 무수한 길드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이용했고, 그래서 안다.
저들은 ‘가짜’다.
“…참,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군. 초대장은 분명 마탑 편으로 직접 부쳤을 텐데, 어찌 저것이 중간에서 새어 나갔을까?”
“애당초 마탑으로 향하던 와중에 샜을 가능성이 클 듯합니다. 그게 아니면, 트루크 왕국에 다른 커넥션이 있는 거겠지요.”
“정체는 확인되오?”
“전력으로 파악 중입니다만… 아직 밝혀진 건 없습니다.”
그의 강렬한 시선을 느낀 것일까?
순간적으로 호위 기사 쪽 여인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직후, 엑스톤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다시 봐도 놀라웠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저만한 나이에, 어찌 저 정도 경지까지 올랐을까?
“혹, 테라는 아니겠소?”
“테라… 말씀이십니까?”
순간 엑스톤이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 없이 이런 의문을 품을 분이 아니셨으니까.
더욱이 위치상 대륙 중부에 위치한 테라와 스란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허나, 잘 알려졌다시피 지금의 테라는 내전이 한창이다.
이런 외부에까지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을 터.
그럼에도 저들이 진짜 테라인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해방군 쪽일 듯합니다. 타국인들이 여럿 모인다고 하니, 우군이라도 포섭할 생각일지도요.”
“역시 엑스톤 공작은 하나를 얘기하면 열을 아는군. 든든하오.”
“그저 면목 없을 따름입니다.”
“진짜 테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라면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겠군요.”
찰나 희미한 미소를 지은 공왕이 이내 여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게 해방군이든 반란군이든.
테라는 곧 ‘국파(國破)’의 운명을 맞이할 나라였으니까.
“일단은 관심 정도만 두고 있지요. 지금은 연합 쪽이 더 문제인 듯하니.”
엑스톤이 예를 다해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
손안의 종잇장을 보며 떠돌아다니기를 십여 분.
“오?”
나는 곧 하나의 출입구를 발견했다.
실비아가 건넨 것은 역시나 궁 내부의 설계도였다.
이런 물건이 어째서 실비아의 손에 있는 것일까?
물론 이게 없었더라도 목적은 결국 이루었을 테지만 말이다.
바람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일단 목적지를 지하로 선택한 이상.
아래쪽에 최대한 기감을 집중하면서, 대기의 흐름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내기만 하면 됐다.
사방이 막혀 있는 곳은 바람이 존재할 리도 없었으니까.
다만, 이 또한 시간 싸움이다.
가로 길이만 따지면 대륙 최대라는 제국의 황궁보다도 더 넓은 이곳이다.
특정 출입구를 찾아내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나라고 알 도리가 없었다.
이번에 실비아가 내게 큰 도움이 됐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녀석, 역시 투자 감각이 제법이다.
‘최소 열.’
안쪽에는 또 얼마나 많은 병력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출입구 주변으로 확인되는 병력은 열.
그것도 모두가 일정 경지에 오른 기사들이다.
비록 그 대상이 여타 다른 나라들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공국의 기사들이라고 하더라도…
‘다수의 기사들을 한 번에 상대하는 건 나도 힘들지.’
아니, 애당초 저들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볼 수나 있을까?
무려 십이월 휘하의 직속 기사들인데.
하여, 나는 스승님처럼 무식하게 정면승부를 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뭘로 저들을 쓰러뜨려야 할까…….’
아주 잠시 동안 고민했다.
파동처럼 요란한 마법은 기각이다.
같은 의미로, 여타 다른 자연 계열 마법 또한 보류.
환영 마법을 이용하자니, 기사들의 감각을 속아 넘기기 힘들 듯하고…
‘…그게 좋겠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딱히 하나의 주력만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특히나, 나처럼 여러 주력들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존재라면 더더욱.
마법사들 중에는 상성이 좋은 두 가지 주력을 합쳐 전혀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내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이걸 위해서는, 기본 전제가 최소 두 가지 주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열두 마탑주의 일인이자 조합의 마법사, 간다르 테이들러였다.
그는 네 가지 주력을 수준급으로 다룰 수 있는 쿼드 메지션이면서, 상성의 조합을 통해 전혀 새로운 마법을 선보이곤 했으니까.
각설하고,
사방이 밀폐된 좁은 통로.
퇴로는 지하로 가는 출입문 단 하나.
되도록 살생은 피하면서 조용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런 거라면 ‘그’ 마법이 제격이었다.
뭉클!
생각과 동시에 오른쪽 손에서 희미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물론, 이건 일반적인 안개가 아니었다.
대상에게 강력한 환각을 내보이는 일루전 포그(Illusion fog).
일대에 광범위한 독무를 만들어내는 포이즌 포그(Poison fog).
적을 질식시키는 초크 포그(Choke fog)까지.
숫자는 극소수지만 안개를 주력으로 삼는 마법사들은 제 힘을 폭넓게 이용했다.
특히나 다수와의 전투에서 이들의 힘은 빛을 발휘한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죽음의 기운이 다가온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오싹했다.
그 치명적인 안개들 중에서도 나는…
휘오오오오!
반대편 손에서 피어오른 바람이 은밀하게 바닥으로 내리깔린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전방을 향해 나아간다.
그 무형의 힘으로, 희미한 안개를 통째 옮겨내듯이.
일명 언더 윈드 슬리피 포그다.
캬, 작명 센스 한번 기가 막힌다.
“응?”
선두의 기사가 잠시 이상 반응을 보였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왜 갑자기 다리가 시리지?”
“어디 창문이라도 열린 것 아냐? 아님, 지하실 쪽에서 불어오는 우풍이거나.”
“우풍이면 몰라도, 여기 창문이 어디 있다고?”
“아님, 겨울이니까 너 혼자 추위를 타는 걸 수도 있지. 약하네, 제임스. 마누라 말로는 요새 밤일도 시원치 않다던데…….”
“뭐? 네 마누라가 나 밤일 약한 걸 어떻게 알아?”
“여자들끼리 모이면 할 말이 그런 것밖에 더 있겠냐?”
“…이 여편네가 진짜…!”
두 사내의 대화에 다른 기사들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분위기가 좋았다.
앞으로 약 5초.
그 이후에는, 내가 기대하는 광경이 드러날 것이다.
털푸덕!
“…어?”
생각과 동시에, 갑작스레 선두의 제임스라 불린 기사가 모로 쓰러졌다.
그제야 일이 잘못됐음을 느꼈는지 다른 이들 또한 기민하게 움직인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어, 어?”
털썩! 쿵! 쾅!
검을 뽑는 자세 그대로 고꾸라지는 기사.
아프게 안면을 벽면에 꼬라박는 이.
뇌진탕이 오지는 않을까, 걱정마저 들게 하는 뒤로 쓰러지는 사내까지.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데?”
나는 빼꼼이 고개만 내밀어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난 뒤에야 움직였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한다.
스승님처럼 정면승부만을 고집해서는 내 몸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까.
***
문을 통과하자 예상대로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나타났다.
한데, 그 안에도 생명의 기운이 존재했다.
대상은 둘.
허나, 그 둘에게서는 지금껏 상대해 왔던 그 어떤 이들보다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이 안쪽에 스승님이 계신다. 분명해.’
보이진 않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스승님까지 총 셋인가?
아니…
“…넷?”
순간 내 고개가 홱 하니 뒤로 돌아갔다.
사뿐, 사뿐.
저 멀리,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기사들 너머.
복도 끝에서부터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하물며, 그녀는 내게도 안면이 있는 여인이었다.
“역시 여기 있었네?”
“당신은 아까 연회장에서…….”
순간 실책을 깨달은 내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지금 예의 원래(?)의 평범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으니까.
“호호.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리 숨기지 않아도 돼.”
“…평범한 귀족가의 영애가 아니었군요.”
“어머. 그렇게 봤니?”
“정체가 뭡니까?”
“음~ 내 정체? 글쎄, 뭘까나…….”
순간 상대가 자못 뇌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아쉬워라. 불과 얼마 전이었음, 고민도 하지 않고 알려줬을 텐데. 나 사실, 너한테 첫눈에 반했거든.”
“뭔…….”
“지금까지 내가 본 그 어떤 존재들보다도 네 본판은 매력적이야. 그건 인정할게. 근데 말이지…….”
직후, 그녀가 마치 피를 연상케 하는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나. 그 훌륭한 첫인상을 이리 실망시켜도 되는 거니?”
“……?”
“난 제가 한 약속도 못 지키는 남자는 별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