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공국의 연회(2)
연합의 건물을 뒤로하고.
우리는 중심가를 향해 걸어 나갔다.
마차는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걸어서 가도 공국의 궁까지는 30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으니까.
더하여, 스승님은 이런 우리의 움직임을 철저히 비밀리에 부치셨다.
비단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까지도.
세논 스승님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연합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질 것을 우려한 선택이었다.
그 결과, 대세논 구출 작전의 구성원은 고작 세 명.
비밀은 확실히 지켜질 것이다.
세실리아 씨만 입을 맞춰주면, 다른 연합원들은 여태 우리가 아직 마탑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다만, 그 탓에 스승님은 한층 더 강해진 세실리아 씨의 의심을 받았지만.
“저기가 궁의 정문이다.”
“와…….”
순간 귀청을 때리는 스승님의 목소리에, 내 잇새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도시 정중앙에 위치한 크고 웅장한 건물.
테라의 왕궁에 비해 크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공국의 궁은 그 나름의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이곳의 특징은, 여타 다른 나라의 궁들과는 달리 옆으로 넓게 퍼져 있다는 점이었다.
소위 높으신 분들은 누구나 자신의 궁을 높게 건축하고 싶어 한다.
마치 하늘의 신과 가까워지려는 듯.
그 자신을 신처럼 대하라는 듯.
그런 점에서 공국의 궁은 특별했다.
높이는 기껏해야 3층 가량에 불과했으니까.
다만, 넓이는 어지간한 궁이 두 개도 들어설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내가 그 멋스러운 브라운 계열의 외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기를 잠시.
“자. 과연 공왕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환영할까? 그도 아니면 불쾌해할까?”
“물론 환영하겠죠. 그것도 아주 두 팔까지 다 벌리고서요.”
“이유는?”
“만약 세논 스승님이 정말로 붙잡힌 상황이라면. 이건 일거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기회일 테니까요.”
“일리 있군.”
내 대답에 스승님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저희 둘은 괜찮을까요?”
이번에는 세디스가 물었다.
“뭐가?”
“연합이야 그렇다 쳐도, 공국에서 저희까지 환영해 줄 것 같지는 않아서요.”
“아마도 더 환영해 줄걸?”
“왜요?”
“생각해 봐. 그래도 내 위치가 있는데, 고작해야 코흘리개 둘만 일행이랍시고 데리고 온 걸 알게 되면.”
“아하.”
그제야 세디스가 손뼉을 쳤다.
“더욱이 니네는 이제 타국에도 제법 얼굴이 팔렸잖냐? 탐이 나는 인재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 테고, 가능하다면 포섭도 시도하려 하겠지.”
“헹. 정작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꿈들이 크네요.”
“뭐, 여기까진 순전히 내 생각이고… 들어가기 전에 일단 정보부터 수집해 보자. 이 근방에서 말이야.”
그리 중얼거린 스승님이 곧 주변을 둘러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꽤나 부유해 보이는 상인 하나가 시야로 들어왔다.
스승님은 거침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예?”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공국은 초행길인지라… 괜찮은 숙소가 있다면, 추천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로브까지 뒤집어쓴 스승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타국에서 오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싸고 깔끔한 곳을 찾으시는 거라면 조금 외곽이지만 3번지도 괜찮습니다. 중심가인 1번지는 시설도 고급스럽고 음식도 맛있지만, 숙박비가 제법 비싸거든요.”
“돈은 상관없습니다. 혹, 남은 방은 있겠습니까? 듣기로, 이 앞의 궁에서 어제부터 연회가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여기서부터가 본론이었다.
“연회? 아, 공왕 전하의 회복을 기념하는 연회 말씀이시군요.”
“네, 바로 그겁니다.”
“근데, 그 연회라면 어제가 아니라 오늘부터 시작일 텐데…….”
“……!”
순간 스승님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음… 제가 잠시 착각했나 봅니다.”
찰나, 상대의 두 눈에 의심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기야 이번 연회는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니까.
외부인이랍시고 접근한 시꺼먼 로브인들이 이리 물어오면, 의심을 살 만도 하지.
“…….”
왜인지, 자책하는 스승님의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이런 일은 보안이 생명이다.
만약 이따위 어이없는 실수로 정보라도 새어 나가게 된다면, 작전은 실패였다.
“아이참.”
그 순간, 살포시 로브를 젖힌 세디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자기야. 요새 부쩍 건망증이 더 심해진 것 알아? 왜 그새 까먹은 건데? 내가 엄청 기대해 온 연회라고 몇 번이나 말해왔는데.”
“뭔…….”
“아님, 연회 말고 다른 데 관심이 팔려 있는 건가? 만드라고라, 만드라고라 그렇게 노래를 불렀잖아.”
“…….”
“요즘 좀… 시원치 않기는 했지?”
그러면서, 힐끗 스승님의 신체 아래쪽을 훑어대기까지 하는 세디스였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 간드러지는 목소리 하며.
어지간한 여인의 뺨을 후려갈길 정도로 고운 외모에, 교태 섞인 몸짓까지.
덕분에 상대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다만,
“…커험. 거, 남자분이 능력이 좋으신가 보구먼.”
비록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다곤 해도.
얼핏 봐도 띠 동갑 이상은 차이가 날 듯한 둘의 모습에, 상대의 의심은 점차 경멸로 뒤바뀌어갔다.
아니, 경멸이 아니라 질투인가?
“…외모를 보니, 어디 귀하게 자란 가문의 아가씨쯤 되는 모양이군. 아무튼, 이곳에선 좋은 추억만 쌓고 가시길 바라겠소. 여긴 제법 볼거리도 많거든. 아마 방은 남아 있을 거요.”
“어머. 말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커험.”
세디스가 입을 가리며 눈웃음치자, 한차례 헛기침을 한 상대가 이윽고 멀어져 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풋.”
나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경고하는데, 웃지 마라.”
“어험. 흐흐흐흐…….”
“진짜 뒤진다?”
“…끅, 세디스. 너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다. 옆에서 보는 내가 다 설레더라, 야.”
“…….”
“거기가 시원치 않… 푸하하하하!”
한바탕 폭소를 쏟아낸 직후.
“…합!”
순간적으로 나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는 세디스뿐만이 아니라, 스승님마저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계셨으니까.
“…스승님. 여기서 제가 얘를 패면, 합법적인 폭행인 거죠?”
“물론. 죽이지만 마라.”
“얘 하는 거 봐서요.”
연신 손목을 꺾어대며 ‘뚜둑’ 하는 소리까지 낸 세디스가 기어이 주먹을 높게 치켜들었다.
“넌 오늘 뒤졌다.”
***
세논은 공국의 수많은 지하 감옥 중 한 곳에 갇혀 있었다.
양쪽 발목과 손목에는, 특수하게 제작된 마나 속박기까지 채워진 채로.
“…젠장.”
그녀는 진심으로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런 질 떨어지는 함정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것도.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한 부분도, 모두 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스러워졌다.
공왕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국은 의심을 벗어내기 위해서라도 진짜 연회를 시작할 것이다.
최소한 그 기간 사이에는, 자신을 어찌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어딜 가나 피 냄새에 민감한 이들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연회가 끝나고 나면…
“…젠장. 세논아, 너는 아직 멀었다. 제 몸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수천 가족들과 연합을 책임지겠다고…….”
뚜벅, 뚜벅, 뚜벅.
순간, 고요하기 그지없는 지하에 나지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창은 많았으나 죄인은 단 한 명도 없는 장소였다.
일반 죄수가 아닌, 고위급 인사들만 따로 가둬두기 위한 감옥 같은데.
그러다 보니 발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세논이 고개만 들어 철창 너머의 어두운 통로를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
이윽고 드러나는 상대의 정체는, 세논으로서도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경악’이라는 두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낼 정도로.
“…2황자?”
“오랜만이군.”
컴컴한 어둠 속에서 눈부신 금발이 반짝였다.
그 즉시, 세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스노비 벨 그레이스.
제국의 차기 대권 후보 중 하나이자.
동료들이 몰살당했던, ‘그’ 끔찍한 사고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흉수 중 하나.
그녀가 필사적으로 감정을 가라앉히며 상대의 두 눈을 마주 바라봤다.
“설마 이것도 전부 당신이 꾸민 짓이었나?”
스노비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보다, 감정을 제어하는 실력이 상당하군. 이래서야 대화가 되지 않는데.”
“뭐라고…?”
미리 심리부터 흔들어놓을 생각인가?
허나, 뜻대로는 안 될 거다.
그녀는 이렇게 질질 끌려만 다닐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니까.
“최소 10년. 그 오랜 기간, 우리 뒤를 쫓았겠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대 추측이 맞아.”
“……?”
“아락사스의 몰살을 주도한 건, ‘우리’라는 뜻이야.”
“……!”
***
제9마탑.
“녀석이 인사를 전해달라더군.”
지금 막 이곳에 도착한 유리나는 진심으로 황당했다.
아니, 짜증이 났다.
“별 미친…….”
주저 없이 욕지거리를 토해내려던 그녀가 멈칫했다.
눈앞의 상대는 아직도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유리나는 너무도 화가 났다.
이럴 거면 같이 돌아가자는 말이나 하질 말던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요. 그보다, 전해달라는 말은 그게 다였나요?”
애써 미소 지은 유리나가 그리 물었다.
“…혹시나 네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들어주라는 부탁도 했다.”
“……!”
유리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곳에 찾아온 목적.
분명 세타에게도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가 이곳에 찾아온 목적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눈앞의 상대를 만나는 것이었지 않던가?
그때에는 분위기에 압도당해 모두 다 말하지 못했지만,
‘…진짜 뭐 하자는 건데?’
새삼 세타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그녀였다.
인사는 핑계고.
사실은 이걸 위해 상대와 자신을 만나게 했다던가.
그런 거라면,
“약속이니 어지간하면 들어줄 생각이다. 나도 녀석에게 원하는 게 있거든.”
“…….”
“내게 달리 부탁할 일이라도 있나? 반반한 곱등아.”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절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러니까, 뭐를?”
“정확히는 저와 당신의 고국. 테라를요.”
“…….”
말과 동시에.
전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얼굴이 굳어갔다.
“무슨 뜻이냐?”
“아시다시피, 테라는 아직도 내전의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 내전을 도와달라? 착각하나 본데, 내게 고국은 없다. 그따위 것은 이미 버린 지 오래거든.”
“…….”
“저울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왕국이 페르잔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움찔.
순간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선을 넘으려 하는구나, 곱등아.”
“만약! 정말로 만약에, 그 일을 주도한 자들이 지금 반란군 중 하나라면요?”
“뭐라고…?”
“반란군의 수괴 중 하나가 페르잔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 몰락을 주도했고, 그 이후에는 갖가지 이점으로 휘하 가신들을 포섭하여 철저히 무너뜨렸다고 들었어요. 필요하시다면, 제 친구가 증거까지 제시할 수 있다고 했구요.”
“…친구?”
“실비아 스필 세드릭. 3대 공작가인 세드릭 가문의 핏줄입니다.”
“…….”
그 이후, 아타락시아 페르잔에게서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통신용 수정구를 연결해라.”
“그 말씀은…?”
“직접 들어보고 판단하겠다. 다 지난 일을, 고작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이 지랄을 떠는 것이라면… 내가 직접 그 해방군이라는 것들을 갈가리 찢어버릴 테니까.”
***
연회가 오늘이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스승님은 정면승부를 택했다.
물론 나도 동의했다.
만약 목격자가 아무도 없는 거라면, 상황은 훨씬 더 급박하고 심각했으니까.
“준비들은 됐겠지?”
“넷.”
“넵.”
스승님의 물음에, 세디스와 내가 힘차게 대답했다.
어느새 높다란 궁의 정문을 코앞에 둔 상황이었다.
평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오늘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마도 연회에 참석할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서겠지.
참고로 우리는 초대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뿐인 그것은 이미 세논 스승님이 가져가셨으니까.
“정지!”
곧 마차조차 타지 않고 걸어오는 우리를, 근위 기사들이 멈춰 세웠다.
“어디서 오시는 분들이십니까?”
“아, 그게…”
여기서부터의 대답이 중요했다.
초대장도 없는 의문의 손님.
심지어, 하나하나가 시꺼먼 로브까지 뒤집어썼다.
누구라도 이런 우리를 본다면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는데.
과연 스승님은 어떻게 저 문을 통과하려는 것일까?
“자유 연합에서 왔는데.”
“……!”
나는 보았다.
그 말과 동시에, 근위 기사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가는 것을.
“공국의 십이월. 그 음침하기 그지없는 철의 기사는 잘 있나 모르겠네.”
“로브를… 벗어주십시오.”
스승님은 순순히 상대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어지간한 기사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잘생긴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서, 설마…!”
“들어가서 전해. 연합의 2인자이자 십이월, 에이스 디 파르마님께서 직접 이곳에 오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