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69화 (69/251)

69화. 열두 마탑주

‘네 덕분?’

‘진짜야.’

‘그러니까, 무슨 뜻?’

‘우리 할아버지. 친구.’

그리 입을 오물거린 유리나가, 곧 눈앞의 블레어 마탑주를 가리켰다.

그런데, 할아버지 친구라고?

진심?

‘뻥.’

소문은 익히 들어왔지만,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믿기지 않았다.

이런 잘생긴 아저씨가 여든.

그것도 친구의 할아버지와 동년배라니…….

‘뻥 아니라고!’

‘네네, 당연히 그러시겠죠.’

“아이씨, 도와줘도 지룰이야.”

…마지막은 육성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먼저 몸을 돌려 떠나려고까지 하는 유리나였다.

잠시 우리 둘이 그러고 있자,

“휘익! 연애 사업이 잘 안 되어가나 봐? 얼른 쫓아가서 붙잡아야 할 것 같은데?”

“사랑싸움은 집에 가서 좀 해라. 썩을 핏덩이 연놈들아.”

“못생긴 애가 진짜 재주도 좋네. 어떻게 저런 이쁜이를 꼬셨대?”

“에잉, 요즘 어린 것들은. 쯧.”

차례로 로마르니, 아타락시아 페르잔, 제6과 10마탑 주인들의 목소리였다.

“끙…….”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하여, 상대를 향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또 보지.”

예의 방 주인의 인사를 뒤로하고, 나는 부리나케 이곳에서 벗어났다.

***

한 사람이 떠나간 자리.

“…….”

삽시간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견 차가워 보이는 냉미녀가, 조용히 블레어 마탑주의 곁으로 다가섰다.

“정말 저대로 보내도 괜찮을까요?”

“그게 아니네.”

“네?”

“이번 일은 우리의 명백한 잘못이고, 여기 이렇게 보호자까지 직접 오게 만들었네. 지금은 응당 사과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나?”

“…….”

예의 냉미녀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이젠버그.”

“아, 예.”

“다시 말하지만 제발 그 성질 좀 죽이게. 내 누누이 말해왔을 텐데?”

“…면목 없습니다.”

예상외로 아이젠버그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블레어 마탑주가 이내 한숨과 함께 뒤를 돌아봤다.

“그대에게도 마탑을 대표하여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뭐, 됐습니다. 기분이야 나쁘지만, 결과적으로 딱히 피해 본 일은 없으니까요.”

“…하면, 이번에는 내가 한 가지 물어도 되겠는가?”

“예?”

이어지는 블레어 마탑주의 말에, 에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가 속한 조직. 연합의 의중이 무엇인지 궁금하네.”

“의중이라니, 어떤…?”

“저만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자유 연합의 일개 대원일 리가 없지 않은가? 최소한 자네나 그보다 윗선이 직접 키우고 있는 ‘제자’ 정도라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

“아니, 자네는 검사니까 그 윗선의 제자가 맞겠군.”

실제로는 둘 다였지만.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어느새 에이스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갔다.

“연합주는… 잘 있는가?”

“그걸 왜 제게 물으시는지요.”

“오해는 말게. 그저 순수하게 궁금했을 뿐이니까. 자네 상관에 대한 얘기야, 외부인들에게는 소문만 무성하지 않던가?”

“…….”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합주를 조직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가상의 인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네. 실제로 당사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기도 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드릴 말씀이 없군요. 인정한다는 게 아니라, 워낙 제멋대로인 상관이라서요.”

“달리 말하면, 대답하기 싫다는 뜻이군.”

블레어 마탑주가 쓰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됐네. 뭐, 곧 있으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

“연합주의 이름으로 공국에 초청을 받았지 않던가? 설마 이번에도 자네가 대신 참석할 생각인가?”

“설마 간자를 심었…!”

블레어 마탑주가 에이스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간자 따위가 아니네. 이건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라, 어지간한 고위급 인사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일세.”

주르륵.

순간 에이스의 등 뒤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기다렸다는 듯, 저릿한 기운이 동시다발적으로 느껴졌기에.

잠시 깜빡했다.

이곳이 어디인지를.

아무래도 그의 대답이, 여기 계신 인물들의 심기를 퍽이나 건드린 모양이었다.

‘…사방이 적.’

심지어 그 적은 강하다.

조심스레 그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 순간에도 에이스의 머리는 주변을 분석하고 있었다.

적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로, 이들에 대한 간략한 평을 해보자면.

먼저, 정면.

제1마탑주, 염화의 마법사 블레어 던 마그마르는 합리적이고 공명정대한 인물이다.

실제 나이가 어떻든, 자신만큼이나 잘생겼다.

소문대로 그 속내까지 어떨런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 옆, 제2마탑주, 빙결의 마법사 에르사 아인하르트는 냉혈한이다.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뼛속까지 차가운 여자였다.

제3마탑주, 치유의 마법사 스실라 샤르넬리는 조직의 엄마 같은 존재였다.

뛰어난 포용력과 따뜻한 리더십으로, 휘하 마법사들은 물론 외부에도 평이 좋았다.

제4마탑주, 전투의 마법사 로마르니는 단순하다.

소문만큼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이는 아니었지만, 성격이 직설적이고 화끈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차라리 이런 유형의 사내가 얘기는 훨씬 더 잘 통할 것 같았다.

제5마탑주, 정신의 마법사는… 이름이 뭐였더라?

다른 이들에 비해 존재감이 없었을뿐더러, 여태 구석에서 퍼질러 자고 있어 특별히 관심도 가지 않았다.

오히려,

제6마탑주, 소환의 마법사 레이나 더글린… 저 여자는 못 말리는 얼빠였다.

지금도 자신의 위아래를 샅샅이 훑어대며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까.

제7마탑주, 파괴의 마법사 잭 디스페로우는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인간이 그였으니까.

성격은 줄곧 입 한 번 뻥긋거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다만, 에이스는 안다.

그는 소리 없이 강했다.

파괴의 마법사라 하면, 염화의 마법사, 초월의 마법사와 더불어 소위 마탑의 3강 중 하나였으니까.

제8마탑주, 뇌전의 마법사 엑스토나 제우스는 성정이 급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지금껏 나서지 않고 있는 이유는, 곁의 9마탑주가 여태껏 목에 올라타 친히 입을 틀어막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당장에 사달이 벌어졌겠지.

제9마탑주, 초월의 마법사 아타락시아 페르잔.

외형과 더불어, 현 시점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상당히 지랄 맞은 성격으로, 어린 외모에 속아 여럿이 피를 봤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소문의 그라면 뇌전의 마법사와 함께 깽판을 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왜 저리 얌전히 있는지.

제10마탑주, 조합의 마법사 간다르 테이들러는 마법과 연구에 미친 인간이었다.

어찌 보면, 유일하게 나이에 맞는 외형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로, 실제 탑주들 중에서도 둘째가는 연장자였다.

제11마탑주, 바람의 마법사 아이젠버그는 깐깐하다.

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결코 그냥 넘기지 못하며, 소위 말하는 꼰대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다.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이였기에, 한때 에이스가 꽤나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는데…

고작 반나절을 가지 못했다.

그 정도로, 파면 팔수록 흥미를 식게 만드는 사내였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제12마탑주, 환상의 마법사 에반젤린 패리시.

그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로마르니와 더불어, 비교적 최근에 탑주에 오른 인물이었으니까.

허나, 실력만큼은 확실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상 12인.

이들 중 그 누구와도 쉬이 승부를 점칠 수 없었다.

대인전이라면 검사가 더 강하다?

그것도 일정 수준까지다.

이만한 초인들이 상대라면, 일대일의 이점 따위는 큰 의미도 없었다.

아무튼, 에이스는 온통 적뿐인 이런 장소에서 추호도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고.

“…피차 좋은 감정이 없는 듯하니, 저도 이만 떠나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그러시게.”

“아,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던 에이스가 멈칫했다.

“지금부터는 그 누구라도, 제 제자를 건드리는 이는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설령 그게 여기 계신 탑주님들일지라도요.”

“…….”

***

내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같이 가!”

“꺼져.”

“아니,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데?”

“너 같으면 화 안 나게 생겼냐? 빡치게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알았으니까 얘기 좀 해봐. 블레어 마탑주가 너희 할아버지와 친구 사이라니. 그게 진짜야?”

움찔.

그제야 성큼성큼 걸어가던 유리나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도 불친이라더라.”

“…불친?”

“불아…ㄹ… 크흠, 아니지.”

“…….”

“그냥 진짜 친한 친구라고. 그 피닉스를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것도 우리 할아버지시라고 하니까.”

…아.

생각해 보니 유리나의 할아버지는 수십 년 전 불꽃의 마법사셨지.

염화와 불꽃.

같은 듯 비슷한 부류인 두 마법사가, 화(火)의 환수라고까지 불리는 피닉스에 눈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은 어디 계시는데?”

“돌아가셨어. 그 피닉스를 포획하던 중에.”

“…미안.”

실수였다.

하긴, 피닉스 정도 되는 환수가 인간의 손에 쉽게 잡힐 리가 없겠지.

전설에 따르면, 피닉스의 신체 온도는 태양에 비견될 정도라고 한다.

일반인이라면 접근은커녕, 보는 즉시 한 줌의 재로 화할 거라고.

…한데 왜일까?

유리나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찝찝한 이유는,

“…미안하면 밥이나 사라.”

“엉?”

“나 배고프다고. 저녁까지 얻어먹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퍼억!

“억!”

결단코 약하다고는 할 수 없는 강도로 내 어깨를 친 유리나가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물론 지은 죄가 있기에, 내게는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이내 콧잔등을 긁적였다.

‘피닉스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한번 물어봐야겠네.’

***

제3마탑.

“스실라 씨. 안에 있지?”

“네. 들어오세요.”

벌컥.

허락과 동시에 로마르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아니. 지금은 이 궁금증부터 풀어내는 게 우선이라.”

“……?”

“설마하니, 그 불같은 인간이 묻지도 않고 그 아이를 보내줄 줄은 몰랐거든.”

“아… 그거야 우리의 명백한 실수였으니까요.”

“약속은 못 지켜서 미안. 중간부터는 내가 나설 상황도 아니었어. 이해하지?”

“이해해요.”

방 한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스실라가 맞은편의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이제야 한숨 돌리겠네. 온종일 이게 뭔 고생인지…….”

로마르니가 순순히 의자에 앉으며 말을 잇는다.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뭐가요?”

“먼저 세간에 연합주로 알려진 인물. 그러니까 빛의 마녀는 이미 오래전에 실종된 거 아니었어? 그런데 블레어 님은 왜 그녀가 당연히 공국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세논은 무사할 거예요. 반드시.”

“…스실라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한데 더 의문인 건, 그 세타라는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 같던데? 당신이 내게 말해준 그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서 말이야.”

“…그건 저도 의문이네요. 8월의 검사님은 대강 아는 듯한 눈치셨지만…….”

“하기야 알았다면 그냥 있지는 않았겠지.”

턱을 괴고 있던 로마르니가 이윽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다.

“‘아락사스’들을 몰살시킨 게 실은 마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곳의 유일한 생존자로 추정되는 빛의 마녀도. 그녀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이 있어 보이는 그 아이도, 복수를 생각하게 될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