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지랄도 풍년이다
같은 시각.
“이런 씨불. 여기도 아니야?”
에이스는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했다.
이미 한바탕 전투가 벌어진 제4마탑부터, 세타가 보호받고 있다고 전해 들은 이곳, 제1마탑까지.
가는 장소마다 번번이 허탕만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얜 어디로 사라진 거야?”
벌컥!
“스승님!”
“…넌 또 왜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남아 있는 거고.”
지금 막 방으로 들어서는 세디스를 발견한 에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특히나, 둘밖에 없는 제자라는 것들은 정말 지독히도 자신의 말을 들어먹지 않았으니까.
호랑이 같은 대장 하나만 믿고, 그간 너무 ‘허허’ 웃기만 했던 탓일까?
이번에야말로 스승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줘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그때.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세타가 탑주들한테 끌려갔다는데!”
“뭣…!”
순간적으로 에이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오면서 못 들으셨어요? 이미 탑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던데…….”
“몰라. 그러니까 자세하게 얘기해 봐. 누가 어디로 끌려가?”
“그게, 마탑은 세타와 칠악 사이에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나 봐요.”
“뭔 개소리야?”
“저도 자세히 들은 건 아니라 그게 뭔 뜻인지는…….”
점차 에이스의 눈빛이 깊게 침체되어 갔다.
어찌 된 상황인지 대충은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멍청한 자식, 그러니까 왜 관련도 없는 일에 쓸데없이 나서서는.”
“그, 그래도 쓸데없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무려 칠악이 나타났는데…….”
“그게 뭐? 마탑은 어디 지나가는 동네 똥개 새끼들이라더냐? 걔들이 있는데 지가 왜 나서냐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마기와 상극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신성력과 빛의 마나잖아요. 최소한 마탑에는 그걸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세타는 아니니까…….”
“하.”
그럼에도 에이스의 인상은 도무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해졌다.
“…대장이라면 분명 세타에게 빛의 마나를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 거야. 만약 녀석이 탑주들 앞에서 그걸 사용한 것이라면, 끌려가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겠지.”
사실과 다소 달랐지만, 에이스는 그렇게 믿었다.
“네? 그게 무슨…….”
“됐고, 거기가 어디라고?”
“아, 탑 최상층이랍니다. 근데 거긴 아무나 못 들어갈 거예요. 설령 스승님이실지라도…….”
“왜?”
“사고 당시 제4마탑에 있던 몇몇 고위급 인사들이 이미 항의 차원에서 찾아갔지만, 모두 정중히 되돌려 보냈다고 하거든요.”
“지랄하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똑같은 반응을 내보인 에이스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스, 스승님?”
“넌 여기 있어라. 이번에도 말 안 들으면, 엉덩이를 평생 짝짝이로 만들어줄 테니.”
움찔.
그 말에 세디스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한결같이 가벼워 보이는 분이지만, 내뱉은 말은 또 철통같이 지키는 위인이 스승님이셨으니까.
“으…….”
점차 멀어져 가는 상대를 보며 괜스레 제 엉덩이를 매만지는 세디스였다.
***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너 이 새끼…….”
제1부탑주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것은.
“방금 뭐라고 지껄였지?”
“들으신 대로입니다만.”
“정신이 온전치 못한 빌어먹을 핏덩이 새끼였군.”
상대의 입에서 재차 거친 욕지거리가 흘러 나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듯, 제1부탑주라는 인간은 제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었으니까.
허나, 그런 그보다 한발 빠르게 나서는 이가 있었다.
“내가 하지.”
“……!”
줄곧 나를 고깝게 보던 또 다른 인물.
바람의 마도사 아이젠버그였다.
휘오오오오오오!
순간 갑작스레 때 아닌 광풍이 휘몰아쳤다.
무려 7써클의 마나가 꿈틀거린다.
부르르르르.
그 힘에 못 이겨 대기 전체가 몸서리쳤다.
이에, 전신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곤두선다.
“윽…….”
그 보이지 않는 힘의 압력은 이내 내 심신을 압박해 왔다.
“알량한 재능 하나 믿고 그리 설치는 모양인데… 네가 지금 어디에 와있는지 내 친히 알려주겠다.”
탑주들의 흥미 가득한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누군가는 눈까지 반짝이며 이쪽을.
또 다른 누군가는, 차마 다음 광경을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신경이 분산된다.
하여, 직후 나는 그쪽에서 완전히 시선을 거두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이 압력의 바탕은 바람. 만약 다른 탑주가 나섰다면 또 모르겠지만…….’
내게 주력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주력 간의 격차까지 동등하냐고 묻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일례로 ‘빛’은 아직도 어려웠다.
허나, 적어도 그게 바람이라면,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라. 하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인즉.”
상대는 내게 강요하고 있었다.
감정을 굽히라고.
곧장 굴복하여 묻는 말에 순순히 응하라고.
다시 말하지만, ‘지랄’이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족속들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우웅! 우우웅!
“오?”
내 마나가 일으키는 공명음에, 눈치 빠른 몇몇 이들이 가벼운 휘파람을 불었다.
내가 무언가를 하려는 걸 이들 또한 단번에 눈치챈 것이다.
굴복과 대항.
물론 내 선택은 후자였다.
“건방진…….”
곧 아이젠버그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혀졌다.
그의 입장에서야 기도 차지 않겠지.
상대는 그 위명도 자자한 바람의 마탑주였으니까.
빠그극. 빠그그그극.
한순간 주변의 압력이 올라가는 것이 절실히 느껴졌다.
펑! 펑!
이내 공기마저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연이어 터져 나가기 시작했으니까.
“크으으…….”
절로 내 이마에 희미한 힘줄이 불거졌다.
단순한 기 싸움일 뿐이건만.
지금까지 상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개차반 같은 성격과는 별개로, 역시나 탑주라는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람에 대한 이해도라면 설령 상대가 아이젠버그라도 자신 있었다.
‘이 압력에 대항하려면 더 강한 압력으로 밀어내거나, 아니면…….’
지금 실력으로, 상대보다 더 강한 압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하여, 나머지 다른 방법을 떠올린다.
정신을 한 점에 집중하는 거다.
지금 필요한 건, 새하얀 도화지 위에 콕 찍힌 흑점 하나.
그거면 충분했다.
파르르.
이제 핏줄은 이마를 넘어 내 온몸 위로 울긋불긋 솟아났다.
‘…지금!’
푸슈우우우우.
순간, 마치 김이 빠지는 듯 힘없는 바람 소리가 퍼져 나갔다.
“……!”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최소한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프레스 써클에… 구멍을 뚫었어?”
탑주들의 놀라움 가득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프레스 원.
말 그대로, 바람의 마나를 이용해 일종의 ‘구’를 만들어내는 수준 높은 마법이다.
구 내부에는, 인간의 피육 따위는 단숨에 찌부러뜨릴 수 있는 고압력이 존재했으니까.
아이젠버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이것은, 압력을 최대로 높일 시 강철조차 우그러뜨릴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만,
‘마법은 연산과 과학, 그 모든 학문의 집합체. 밀폐된 공간에 구멍이 생기면 자연히 압력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힘 대 힘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나.
이 커다란 압력 구에 손가락 마디만 한 구멍을 뚫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 일을 해내기도 했고.
“헐… 바람 아저씨의 프레스 써클에 구멍을 뚫다니. 저게 가능한 일이었어?”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하겠죠. 바람에 대한 이해도, 세밀한 마나 컨트롤, 집중력까지 두루 갖춘다면 또 모르겠지만.”
“저 아이, 적어도 마법적인 부분에서만큼은 확실한 천재군.”
“역시. 얼굴은 못생겨도 재주는 있다는 걸까나?”
다른 탑주들이 제각기 숨기지 않고 감상평을 내어놓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들 또한 탑주가 아닌 한 명의 마법사이자 탐구자라는 듯.
허나, 그 모습이 끝내 상대를 자극한 모양이다.
“이놈…!”
아이젠버그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다른 방법을 준비하려는지 일대의 마나가 진동을 일으켰다.
주변의 대기가 다시 오므라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래서야 답이 안 나왔다.
상대가 죽기 살기로 덤벼들면,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만하세요.”
“비키시오, 스실라!”
“더 이상은 안 됩니다. 결코 조직에 득이 되지 않는다구요. 분명히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큭…….”
역시나 스실라 씨는 상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 아이젠버그가 저대로 물러설까?
고위 마법사 중에서도 정점에 위치한, 저 정도 위인들은 자존심이 상상을 초월했다.
“…나도 그녀의 말에 동감이야.”
“아타락시아 페르잔. 당신까지…! 허나, 이대로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소!”
예상대로, 아이젠버그는 나를 향한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스실라 씨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갔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나는,
“음…….”
…솔직히 쫄았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 아타락시아 페르잔조차 찔끔하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으니까.
오직 완전히 눈이 돌아간 아이젠버그만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
당장 스실라 씨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두가 긴장하던 그 순간이었다.
“저리 안 비켜?”
“못 갑니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여기가 아니라, 이 대륙에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 꺼져!”
이 목소리는…
“…스승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익숙한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안 비키면 강제로 치워 버릴 거다.”
“…억지도 정도껏 부리시지요. 자꾸 이러시면, 저희도 강제력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호오?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해보시던가.”
흘러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제는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시선도 모두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보내줘.”
곧이어 또 다른 목소리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타, 탑주님…….”
“그는 자격이 있어.”
벌컥.
이윽고 출입문이 완전히 열어젖혀졌다.
가장 먼저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불꽃을 연상케 하는 깔끔한 미남자였다.
180센티미터 가량의 당당한 체구에 기껏해야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
물론, 나는 저 얼굴을 잘 알고 있다.
외모에 속아서는 안 된다.
실제 그는 여든을 훌쩍 넘긴 노인이었으며, 이곳의 누구보다 최고 연장자였으니까.
듣기로 1,000년에 한 번 세상에 나오는 환수, 피닉스의 심장을 취해 저런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달리 ‘불의 정수’라고도 불리는 그것에는 여러 가지 효능이 있었으니.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타고난 불꽃의 마나를 강화시킨다던가, 수명을 늘리고 ‘육체의 노쇠화를 늦춘다’던가 하는.
“일에 순서가 있는 법이고, 순서에는 원칙이 따르는 법이야. 이게 뭣들 하는 짓인가?”
“탑주님…!”
예의 제1부탑주라는 인간이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려댄다.
진짜 주인이 나타났으니 그럴 수밖에.
반응은, 다른 탑주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탑주들 사이에, 표면적으로 지위고하의 차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허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열두 탑의 최고 권위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제1마탑주라고.
“…….”
자연스레 내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상대의 한마디로, 앞으로 내가 어찌 될지 결정될 거라고.
“제1마탑주, 블레어 던 마그마르일세.”
“세타 쿤 이그니스입니다.”
저런 얼굴로 노인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도 우스웠지만, 일단은 친절히 마주 인사해 줬다.
실제로도 노인이기도 하고.
살길이 보이는 이상, 이제는 생존이 우선이었으니까.
“동료의 무례에, 마탑을 대표하여 사과하겠네.”
“…진심이십니까?”
“물론 정식 사과는 조직 차원에서 다시 한번 하겠네. 보다시피, 저 친구가 눈이 돌아가면 나도 잘 말려지지 않거든.”
사과?
저 자존심 드센 마탑이?
다른 누구도 아닌, 조직의 정신적 지주라고까지 불리는 염화의 마탑주가 직접 내뱉은 말이었다.
혹시나 말을 바꿀 세라, 내가 재빨리 반응했다.
“그럴 수도 있죠. 어린 저도 조금 선을 넘긴 했으니까요.”
“크으으…….”
‘조금’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강조하는 나를 보며, 아이젠버그가 낮게 이를 갈았다.
그쪽을 향해 한차례 짧은 미소를 지어 보인 내가 다시 상대를 돌아봤다.
“그럼 저는 이만 가봐도 될까요?”
“…원한다면 가도 좋네.”
설마 진짜로 보내줄 줄은 몰랐기에, 나와 뒤쪽에 자리한 스승님의 표정까지 순식간에 밝아졌다.
“야!”
“……?”
그때, 어디선가 극도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자.
“여기!”
블레어 마탑주의 등 뒤.
그러니까, 스승님보다도 더 뒤에서 유리나가 빼꼼이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이거 다 내 덕분이다?’
보란 듯 이렇게 입까지 뻐끔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