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더블워커
“아하하하!”
스노비는 웃었다.
상황은 원래의 계획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데, 화는커녕 자꾸 웃음만 나왔다.
그는 지금 진심으로 즐거웠으니까.
“대체 언제 연락을 취한 거지?”
“영업상 비밀입니다.”
“큭큭큭…….”
마력은 확실하게 차단했다.
통신용 수정구는 애당초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직접 빠져나가 접촉한다는 방법은 더더욱 말도 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눈앞의 애송이가 외출하는 낌새 따위는 느끼지 못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스노비가 직접 뽑은 황궁의 최정예들이었다.
그럼에도 조력자가 나타났다.
그것도, ‘십이월’이라는 제법 그럴듯한 거물이.
“아무렴. 제가 숨겨둔 한 수도 없었을까요?”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진심이야. 마치 베테랑과도 같은 노련미에, 상황을 단숨에 꿰뚫어 보는 직관력. 나는 네가 고작 열아홉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놀라운 일이었다.
누구보다 칭찬에 인색한 그의 입에서 나온 극찬이었으니까.
허나, 정작 당사자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오히려 새로이 나타난 예의 반라의 사내가 제 턱을 추켜세우고 있었으니.
“그럼, 누구 제자인데.”
“그 인상착의. 너는 분명 소문의 에이스 디 파르마겠지?”
“…어린놈이 다짜고짜 반말이네, 싸가지 없는 자식.”
혼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에이스가 곧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은 2황자 전하시죠? 나랏일로 한창 바쁘실 텐데, 아직 제국으로 안 돌아가셨던 모양입니다.”
“그대야말로 근래 조직의 일로 꽤나 바쁜 것으로 아는데, 용케도 예까지 왔군.”
움찔.
순간 에이스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입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는 스스로가 이미 잘 알고 있을 텐데.”
“…….”
대화가 이어질수록 주변의 공기가 급속도로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 즈음하여, 스노비는 다시금 생각했다.
즐거운 건 즐거운 거고, 공사는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다 치워 버릴까?’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허나, 그 선택은 하책 중의 하책이기도 했다.
뒷일이 귀찮아질 것이 자명했으니까.
반대로, 묻고 가자니 그의 드높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최소한, 이 시건방진 놈들에게 도망치듯 떠나가는 그림은 되지 않아야 했다.
“…….”
아주 잠시 동안 스노비가 고민을 이어가던 그때였다.
“황자 전하. 설마 이대로 저들을 보내주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
“저 작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얼굴까지 다 팔린 마당에 이들을 그냥 보내서는 안 됩니다.”
드락서스 리건 트라오레.
이 녀석은 실력만큼이나 식견도 짧은 모양이었다.
분명 에이스 디 파르마라는 이름을 들었을 텐데, 이따위 헛소리나 지껄여 대고 있었으니.
…하지만 괜찮다.
아니, 내심 기뻤다.
“그러면 되겠군.”
지금 막 묘안이 떠올랐으니까.
“제게 수하들을 빌려주신다면 반드시…….”
“수하를 빌려달라… 지금 내게 명령하는 거냐?”
“예?”
서걱!
순간 섬뜩한 파육음이 울려 퍼졌다.
“…컥!”
곧이어 스노비의 검에 점점이 묻은 핏물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장르가 바뀌었다면, 배우 또한 그에 맞춰 써먹으면 그만이다.
“왜… 왜…?”
어느새 목덜미에 한줄기 혈선이 아로새겨진 드락서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한쪽을 바라봤다.
허나, 정작 시선을 받은 스노비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 쌍의 금안은 줄곧 세타만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조금 더 나를 즐겁게 해보거라.”
“…….”
“너라면, 이 또한 능히 극복해 낼 수 있겠지?”
이윽고 말을 마친 스노비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
“…미친놈.”
점점 멀어져 가는 2황자를 보며, 스승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공감한다.
그만큼이나 방금의 광경은 충격적이었으니까.
“우리에게 누명을 씌울 생각인가?”
“아니요. 스승님에게 누명을 씌울 생각인 거겠죠.”
“뭐?”
“아시다시피 저는 마법사고, 흉수는 검수이지 않습니까?”
말을 마친 내가 눈짓으로 발아래를 가리켰다.
“반대로 생각하면, 말은 저리해도 저따위는 언제든 처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겁니다.”
한데, 왜인지 스승님의 인상이 팍하고 일그러져 있었다.
“너… 혹시 인성에 문제 있냐?”
“예?”
“내가 네놈 교육을 잘못 시켰구나.”
“갑자기 그게 무슨…….”
“눈앞에서 살인이 벌어졌다. 비록 적일지라도, 사람이라면 망자의 명복부터 빌어주는 게 기본적인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죽을 만한 놈이 죽었는데요, 뭘.”
“그래도 이 녀석이…!”
나는 말없이 발아래의 물건을 주워들었다.
죽은 녀석의 손안에 쥐어져 있던 그것.
지바크의 대못이었다.
“스승님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대상자의 마력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아티팩트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먼저 꼼수를 부렸으니 응당 죽어야 될 놈이다. 그리 말하고 싶은…….”
“그리고, 그 수단은 ‘마기’입니다.”
“……!”
그제야 스승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나와 마기는 상극입니다. 하여, 그 사이한 기운이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여, 대상자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마법을 시전치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네 행동이…….”
“더하여 지바크의 대못이라는 건, 채 10살이 되지 않은 여아(女兒)의 심장에 대못을 박아 만들어지는 미친 도구이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여아를 제물로 지바크라는 마족에게서 힘을 얻는 것이죠.”
“……!”
“제국이 저희 생각보다 흑마법사들과 훨씬 더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이런 놈들에게까지 명복을 빌어주라고 교육받지는 않았습니다.”
“크흠.”
중간쯤부터 이미 표정이 풀어져 있던 스승님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어찌 그리 자세히도 알고 있냐? 꼴통 주제에.”
“그야…….”
여기서는 뭐라고 답변할지 나도 잠깐 고민했다.
사실 이 또한 온전히 아이리스의 목걸이에 잠들어 있던 지식이니까.
참고로 전생과 관련된 얘기는 스승님들에게도 비밀이었다.
“그래도 껍데기는 마법사니까요?”
결국 고민 끝에 내놓은 내 대답에, 스승님이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책이라면 처음부터 질색을 하는 네가?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참나.”
“아무튼, 이제 설명해 봐라. 뭔 일이 있었기에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된 건지.”
“…그 전에, 일단 이것부터 처리하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내가 다시금 아래쪽을 가리켰다.
채 눈을 감지 못한 드락서스의 시신이 그곳에 있었다.
순간적으로 한숨을 내쉰 스승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달리 방법이라도 있느냐?”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시신이라도 가문으로 되돌려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서야 2황자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빼도 박도 못하고 살인자로 내몰릴 가능성이 농후할뿐더러, 그들은 당장에 나를 죽이려 들 테니까.
이건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목적이 분명한 만큼, 황자 또한 지금 당장 남의 집 잔치를 망칠 계획은 없을 터.
쩌적, 쩌저저적!
임시방편으로 일단 대지 마법을 이용해 시신을 땅에 묻은 나는, 2황자와의 악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스승님께 설명했다.
그리고,
“…넌 항상 일을 크게 벌리는구나. 만에 하나 내가 늦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느냐?”
“스승님이시라면 벌써 근처에 와계실 거라고 예상했죠.”
“어디 뒷간이라도 가 있었을 수도 있잖아.”
“에이, 처음부터 지켜보고 계셨으면서.”
“…….”
사실 내가 스승님께 연락을 취한 것은 며칠도 더 전의 일이었다.
‘진짜 안 오실 겁니까?’
‘응, 안 가.’
‘너무하신 것 아니에요? 그래도 제자의 첫 공식 데뷔전인데.’
‘알아서 잘하시겠지. 그리고 너 같으면 할배들만 그득한, 그 고리타분한 마탑에서 아까운 시간을 소비하고 싶겠냐?’
‘애들만 있는 아카데미에는 잘만 오시더니.’
‘그거야 네 다른 스승이 가라니까 어쩔 수 없던 거고. 하나밖에 없는 직속상관의 명인데 나라고 선택권이 있을까?’
‘혹시 또 아나요? 이곳에서 스승님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운명의 상대를 만나실지.’
‘마법사들은 다 또라이라서 싫다. 무슨 뜻인지는 더 말 안 해도 알지?’
‘다 이를 거예요.’
‘일러라, 이 자식아.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생각해 보니까, 그때도 인재 영입이 목적이셨죠?’
‘뭐?’
‘이번에도 세논 스승님께 똑같이 건의 드리면 되겠네요. 마침 조직의 촉망받는 두 유망주가 참가하는 대전이기도 하니까요.’
‘와, 너는 3년 동안 내 밑에서 잔머리만 늘었냐?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능력 있는 스승님께서 초야에만 묻혀 지내시는 게 제자로서 보기가 좀…….’
‘그냥 나만 노는 게 아니꼽다고 솔직하게 말해라, 새꺄.’
‘오실 거죠?’
‘안 가! 배 째!’
그 길로 나는 정말로 세논 스승님에게 연락을 취했다.
내 혜안을 높게 평가한 2황자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사건의 진짜 전말이었다.
‘운이 좋았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린 내가 말했다.
“그래도 세논 스승님이 무섭긴 하신 모양이네요.”
“시끄럽고. 남은 시합은 자신 있냐?”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은 스승님이 물었다.
“기껏 귀한 걸음 했는데 우승 못하기만 해봐라.”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내가 네 시합을 관전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황자 때문이죠?”
“그래. 미리 대비는 해야지. 안 그래도 공국의 일만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제길.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어.”
“크게 보시죠. 어차피 끝은 제국이잖아요?”
“일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야. 뭔 일 있으면 곧장 연락하고. 자신 있지?”
이윽고 한차례 손을 휘저은 스승님이 멀어지려 했다.
“…….”
그 순간, 나는 목격하고야 말았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스승님의 걸음걸이를.
말은 저리하고 계셔도 속으로는 걱정된다는 뜻이시겠지.
자연스레 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뭐, 제가 붙게 될 상대에 대해 조금 알아는 봤는데요.”
멈칫.
거짓말처럼 스승님이 고개를 돌린다.
“근데?”
“적어도 2, 3차전은 30초 안에 끝낼 자신은 있습니다.”
“…응?”
“아니, 30초는 너무 긴가? 그럼… 10초?”
“…….”
그 상태로 한참이나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스승님이 말했다.
“너 그거 아냐?”
“네?”
“지금 되게 재수 없는 거.”
“사실인데요, 뭘.”
내 호언장담에, 이내 스승님이 픽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이리 자신해 놓고 막상 대전을 질질 끌게 되면 부끄러워 고개조차 못 들 테지만.
아주 당연하게도, 그런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
“대공.”
어둠 속에서 투명한 수정구가 밝게 빛났다.
- …스노비?
“민감한 시기에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
- 괜찮아. 무슨 일이지?
“그게, 아무래도 내가 대공이 찾고 있던 아이를 발견한 것 같거든.”
- ……!
스노비의 말에 수정구 속 목소리가 대번에 일변했다.
- 정말인가?
“응. 혹시나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올 생각은 하지 마. 지금 대륙의 모든 눈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 하지만…….
“내 말대로 해. 대공의 능력은 알지만, 너무 위험해.”
- …….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리하지.
“레이지랑 다른 애들은?”
- 모두 무사하다.
“좋네. 그래서 말인데…….”
- ……?
“대공 말고, 럼프 녀석을 이쪽으로 보내줄 수 있겠어?”
- 럼프는 왜…?
“대공이 바라는 걸 이루어주기 위해, 녀석의 능력을 빌려볼까 하거든.”
- ……!
마치 뱀을 연상케 하는 스노비의 눈동자가 완연한 호선을 그렸다.
“벨제바브가 먹은 마족 중에는, ‘외형’ 정도는 흉내 낼 수 있는 녀석도 분명히 있었지,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