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61화 (61/251)

61화. 일촉즉발

“의리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자식.”

유리나가 콧김을 펑펑 뿜어댔다.

애당초 특별한 기대 따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열이 뻗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어차피 이길 거니까 볼 필요도 없을 거라고?”

그만큼 너를 믿는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차라리 흔해 빠진 응원이나 한마디 해줬다면, 이런 격렬한 감정까지 느끼지는 않았을 텐데.

“아주 그냥 지 꼴리는 대로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중에서도 정말로 화가 나는 것은, 세타가 철저하게 제 비밀을 감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친구인데…….

아니, 그 정 없는 자식이 정말로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하기나 할까?

“확 그냥 태워 버릴까 보다.”

화륵! 화르르륵!

허언이 아니라는 양, 순간적으로 유리나의 손에서 거센 불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끄으으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발밑에서 들려오는 낮은 신음 소리.

마법사임이 분명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내가 유리나의 아래에 엎어져 있었다.

본래 꽤나 고급스러웠을 법한 로브는, 여기저기가 불에 타 넝마가 된 채였다.

그는 유리나의 마법 대전 1차전 상대였다.

세타에 대한 분노가 애꿎은 이에게 분출된 결과물이었다.

“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아오, 열 받아!”

화르륵!

“…헙!”

또 한 번 토해지는 불줄기에, 사내가 재빨리 기절한 척을 했다.

마음속으로는 사회자가 어서 빨리 시합 중단을 알리기를 기도하면서.

때마침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오매불망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A조 4차전. 승자, 유리나!”

“에잇!”

이내 유리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발아래에 깔려 있던 사내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그가 한 일이라고는, 단 두 가지밖에 없었다.

보기 드문 미인인 상대를 보고 감탄한 일이 첫째요.

그 미인에게 추파를 던진 일이 둘째였다.

추파라고 해봐야, 시간 되면 끝나고 밥이나 한 끼 먹자는 말 한마디를 건넨 것이 전부였지만.

직후, 상대는 대답 대신 커다란 불의 주먹을 쏘아 보내왔다.

캐스팅조차 없이 시전된 3써클 마법, ‘파이어 피스톨’은 실로 빠르고도 정확했다.

단지 주변 땅을 때렸을 뿐인데, 그 폭발력만으로 일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으니까.

“제, 젠장.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우르르 나타난 건지…….”

지금 막 몸을 돌리는 유리나를 보며 사내는 생각했다.

올해 마법 대전은, 특히 테라 출신들이 유독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고.

이런 생각은, 비단 그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유리나… 유리나라…….”

“예?”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할 일이 많은 여러 고위급 인사들은 물론이고, 탑주들마저 각자 제 구역으로 돌아간 자리.

4층 가장 앞 열에 마련된, 최고 귀빈석.

“아는 아이입니까?”

“…글쎄. 나도 햇갈리는군. 성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치 불꽃을 연상케 하는 머리칼을 가진 미남자가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상관을 바라보며, ‘제1부탑주’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중년 사내가 재차 묻는다.

“저만한 실력을 가진 아이가 뒷배 하나 없을 가능성은 전무하지요. 일부러 성을 숨긴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요즘 아이들이랑은 다르군요. 대게 젊은이들은 제 가문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어 할 텐데…….”

“아니면, 감추고 싶은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도 모르지.”

만약 제3자가 이 모습을 본다면, 상당히 어색해했을 것이다.

과장 좀 보태, 아들 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인 사내가 연이어 상대에게 말을 낮추고 있었으니까.

곧 예의 미남자가 턱을 쓰다듬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노을을 닮은 머리칼에,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가진 스물 전후의 여자아이.

그럴 리야 없겠지만, 퍽이나 닮았다.

수십 년 전 ‘불꽃’의 마법사이자, 그의 몇 안 되는 동기였던 녀석과 무척이나.

‘설마… 아니겠지?’

***

하루가 지난 제9상업지구 인근 평야.

“…….”

오후의 2차전을 앞두고, 나는 어제와 같은 장소에 와 있었다.

제국의 2황자.

스노비 벨 그레이스는 말했다.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면, 내 목숨과 더불어 테라의 운명까지 주겠노라고.

물론 나를 노린다는 이가 누구인지는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하여, 나 또한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었고.

“생각은 충분히 했나?”

“아니요.”

“……?”

“간밤에 잠을 설쳐서요. 제가 자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변태 같은 아저씨들이 어찌나 많으시던지.”

내 대답에 2황자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수하들의 충성심이 과했군. 네가 이해해라.”

“아, 물론 이해하죠. 만약 도망이라도 갔다면, 여기서 저하와 이리 마주하고 있지조차 못했을 테지만요.”

“큭… 여전히 재미있는 놈.”

날이 선 내 반응은 안중에도 없는지, 2황자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어지간히도 얄미워, 나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요. 그 부탁이라는 게 무엇일지.”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닐 거야. 막상 듣게 되면 너무 별 게 아니라서, 오히려 김이 빠질 수도 있고.”

“어렵진 않더라도 제 신념과 반대되는 일일 수는 있겠죠.”

“세상에 목숨보다 중한 신념도 있던가?”

“때로는요.”

“호오?”

“일단 제 추측이 맞는지, 황자 전하의 말씀부터 한번 들어볼까요?”

피식 웃음을 터뜨린 2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지. 너와는 아카데미 동급생이던가?”

“예?”

“너도 오며 가며 봤을 거다. 이곳에 온 ‘제노스 델 카이클’을.”

멈칫.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의 등장에, 자연스레 내 미간이 좁혀졌다.

“보지는 못했고, 소식이야 접했습니다만.”

“분명히 얘기하지만, 이건 우리 계획에 없던 일이다. 녀석의 돌발 행동이 우리를 꽤나 곤란하게 만들고 있어.”

“…그 말씀은, 테라의 내전에 제국이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훗.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아니었나?”

내 말에 능청스레 대꾸한 스노비 2황자가 계속 말을 잇는다.

“나는 주인의 명을 듣지 않는 졸은 필요 없어. 하여, 그걸 대체할 새로운 말을 찾고 있지.”

“다시 말해, 저를 이용해 테라를 보다 손쉽게 지배하겠다… 그런 뜻이신가요?”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글쎄요. 그도 그럴 게, 저하 입장에서야 저라는 졸이 편하시기는 할 테니까요.”

“이유는?”

“세력은커녕 부모도 없는 천애 고아에, 국적이 테라라는 것 빼고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애송이. 그럼에도 실력은 제법 봐줄 만하니까요.”

2황자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큭… 과대평가라는 말은 취소하지. 하지만 너는 평민이다. 그 어떤 나라도 평민 따위에게 중책을 맡기지는 않아.”

“그러니까요.”

“……?”

“다른 나라가 아닌 테라니까. 마법사를 그 어떤 이들보다 존중하는 테라니까, 해볼 만하다고 판단하시는 거겠죠. 특히나 지금과 같은 난세라면 더더욱.”

“…….”

정곡이었던 것일까?

그제야 2황자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저를 도와 해방군에게 힘을 실어주고, 두 세력이 알아서 피를 흘려주는 것. 무엇보다, 제게는 ‘자유 연합’이라는 그럴듯한 껍데기도 있으니까요.”

“…….”

“설령 그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한쪽의 세가 약해진다면 그걸로 좋겠죠. 약해진 먹잇감을 물어뜯기만 하면 될 테니까.”

이윽고 내가 말을 마치자, 2황자 대신 그 옆의 복면인이 조용히 나섰다.

“…죽일까요?”

“…….”

“고작 열아홉 먹은 어린아이치고는 눈치가 보통이 아닙니다.”

“신경 쓰이나?”

나지막한 2황자의 반문에, 예의 복면인이 곧장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모든 것은 저하의 뜻대로.”

“괜찮아. 이 정도도 해주지 않는다면, 귀한 걸음을 한 의미도 없을 테지.”

“예.”

이내 복면인을 뒤로 물린 2황자가 내 쪽을 빤히 바라봤다.

“구태여 내게 이런 얘기들을 늘어놓는 이유… 달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겠나?”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

“부탁이 저하의 개가 되라는 것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테라의 국익에 저해되는 일은 딱히 하고 싶지 않아서요.”

“…의외로군. 충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애국심 같은 건 조금도 없지만, 지금도 노력하고 있을 제 친구들을 배신할 수는 없지요.”

“친구라…….”

순간 내 말을 따라 중얼거리던 2황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아직 어려. 설령 목숨을 잃더라도 말인가?”

“그럴 리가요. 단지, 이곳에서라면 저하께서 제게 해코지를 하지 못하실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입니다.”

“뭐라?”

“마법 대전 기간 동안 그 구역 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면, 누가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까요?”

“훗.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마탑을 믿겠다?”

“아니요. 정의를 믿겠다는 겁니다.”

태연하게 대꾸하고 있지만, 말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내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벌써부터 주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으니까.

“혹여나 이런 일이 생길까 미리 배우를 하나 섭외해 뒀는데… 결과론적으로 옳은 판단이었군.”

“……?”

순간적으로 내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직후, 나를 둘러싼 인영들 중 하나가 복면을 벗었다.

의외인 것은, 예의 그가 내 기억 속에도 있는 얼굴이라는 사실이었다.

“드락서스 리건 트라오레…?”

다름 아닌 내 1차전 상대였으니까.

지금쯤 좌절하여 제국으로 돌아갔어야 할 녀석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만에 하나 네가 잘못되더라도 죄를 대신해 줄 이가 필요했거든. 마침 그 역할에 딱 어울리는 아이가 있었고.”

아아.

살인 사건을 한 개인의 복수로 둔갑시키겠다는 건가.

그래서 순순히 하루의 시간을 내줬던 거였군.

“구면이지? 덕분에 쪽이란 쪽은 있는 대로 다 팔았다. 제노스 델 카이클, 그 시건방진 놈을 위해 준비한 이것은 써먹지도 못하고 말이지.”

곧 씹어 내뱉듯 중얼거린 드락서스의 손안에서 묵빛의 무언가가 밝게 빛났다.

물론 나는 저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바크의 대못.

오래전, 지바크라는 이름을 가진 흑마법사가 만든 회심의 역작이자.

일시적으로 대상의 마나를 ‘0’으로 고갈시키는 금지된 아티팩트였다.

물론, 저건 암시장이 아니라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마도구다.

제노스를 상대로 저걸 사용하려 했던 모양인데, 마법 대전에서는 도구의 사용 자체가 명백한 실격 사유였다.

“…어차피 썼어도 졌을 테지만.”

“뭐?”

“내가 그 괴물을 좀 알거든. 걘 마법적인 재능만 가진 게 아니라서.”

“개소리를!”

부르르르!

순간 지바크의 대못이 거칠게 진동했다.

쯔어어엉!

직후, 그것에서 발생된 일시적인 마력의 파동이 나를 향해 뻗어왔다.

마치 늪에 빠진 듯한 기분 나쁜 감촉이 뒤를 이었다.

“큭큭큭… 이번에야말로 죽여주마. 버러지 같은 새끼.”

“…….”

자.

마력은 제한받고 있고.

정체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무수한 강자들이 나를 포위하고 있는 지금.

그야말로 절체절명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흐읍.”

판단을 마친 내가,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살려주세요!!!!”

삽시간에 쩌렁쩌렁한 고성이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

그런 내 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던 드락서스가 곧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미친놈. 고민 끝에 한 말이 고작 ‘살려달라?’. 그것도 이런 허허벌판에서?”

“…….”

“내가 이딴 병신 같은 새끼한테 패했다니… 씨발, 복수를 해도 문제로군. 혀를 깨물고 뒈져야 할 판이야.”

재차 귀청을 때리는 상스러운 욕지거리에, 내 어깨가 가볍게 으쓱여졌다.

“그럼 그냥 혀 깨물고 죽으면 되겠다. 복수는 이미 물 건너간 것 같으니까.”

“…뭐?”

“여기예요, 스승님!”

휘오오오오!

허언이 아니었다.

한줄기 바람과 함께, 곧 익숙한 뒷모습이 내 시야를 가득 매웠으니까.

지금만큼은 평소 저 꼴사납던 복장조차 예쁘게 보이는 반라의 사내.

그리고.

“뭐야, 진짜 황자잖아?”

그는, 내 두 스승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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