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개막전(2)
이틀이 지났다.
대망의 마법 대전 개막전을 불과 하루 앞두고, 사전 소집이 있는 날.
열두 건축물 중 가장 넓은 공간을 자랑하는 제1마탑은, 지금 층 전체가 참가자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사람 엄청 많네.”
허나, 이를 본 내 감상평은 실로 간단명료하기 그지없었다.
“넌 긴장도 안 되냐?”
“뭐가?”
“첫 상대뿐만이 아니라, 네가 계속 이긴다고 가정해도 4번째는 그 옆에 있던 녀석이라니까?”
“그게 왜?”
“너 걔도 모르지? 현 공식 랭킹 47위, 모래의 마법사 크로커의 혈육이 바로 그 삭막해 보이던 놈이라고.”
“…근데, 언제 내 4차전 상대까지 계산했냐?”
화제를 전환하려 꺼낸 말이었으나, 유리나는 보란 듯 제 턱을 추켜올렸다.
“내가 누구냐? 수식과 계산능력, 이론까지 모두 일등인 유리나 벤 아리에나 아니겠냐?”
“그래, 너 잘났다. 아무튼 결론은 내 대진표가 썩 좋지는 않다는 거잖아.”
내 반응에 유리나가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전승 빼고, 최소 6번은 이겨야 16강인데. 고작 4경기 만에 16강급 상대가 둘이면 그게 안 좋은 정도냐? 죽음의 조지.”
“괜히 제국을 대표하는 마법사들은 아니라는 건데…….”
“이제 현실 자각이 좀 되나 봐?”
“…그런 놈들을 너는 대놓고 무시했지, 아마?”
“야! 그 일은 네가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니깐? 나 아니었음, 넌 그 자리에서 쪽이란 쪽은 다 팔았을 거다.”
“훗.”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아무리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곧장 자리를 박차고 사라지던 유리나도.
그런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버터 녀석의 눈빛도.
덕분에, 얼떨결에 따라 일어선 나도 그날 아침을 쫄쫄 굶게 되었지만.
“여어, 세타!”
“어?”
내가 아주 잠깐 며칠 전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상념을 일깨우려는 양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당연히 유리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기야, 여기!”
“……!”
나를 부르는 이는, 저 많은 사람의 파도 속에 따로 있었으니까.
멀리서도 무수한 시선을 한 몸에 끄는 인영이었다.
브라운 계열 단발머리에, 새하얀 피부가 유달리 눈에 띄는 녀석.
“저 자식, 벌써 와 있었잖아?”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내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유리나의 시선도 자연스레 따라 움직였다.
직후, 왜인지 모르게 두 눈을 샐쭉하게 만들면서.
“…뭐야, 친구라는 게 여자였어?”
물론 상대의 반응이 어떻든,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저 녀석의 이름은 세디스.
내가 세상에서 친우라 부를 만한 몇 안 되는 존재이자, 같은 스승님을 둔 내 ‘사제’였으니까.
***
마탑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유리나는 줄곧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실비아가 써준 전서… 세타 녀석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초월의 마탑주에게 전달할 수 있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유리나는 그 자리에서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이미 상대의 괴팍한 성격을 알고 있기라도 한 건지, 실비아는 반드시 전서‘만’ 건네고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했으니까.
결과야 어떻든, 그녀는 제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뜻이다.
하여 유리나는 이제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해방군에게 도움이 되면서도, 그녀 혼자서도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을.
‘…황제가 친히 대전을 관전한다고 했겠다?’
유리나가 떠올린 생각은, 성공만 한다면 단번에 내전의 분위기를 역전 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명 황제 맥이기.
작금의 내전은, 제국의 군사적 개입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고.
이번 기회에 제국의 숨은 흉중을 파악할 계획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그녀가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물론, 쉽지 않겠지만…….’
무려 제국의 정점이다.
적의 끝자락에 그가 있을 수도 있고,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을 터였다.
자칫 이번 일로 말미암아 그녀가 표적이 될 가능성도 높았다.
허나,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라면, 제아무리 황제라도 쉽사리 해를 가하려 들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
실비아는 이번 마법 대전에서 당당하게 호성적을 거두고, 타국인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우리의 내전에, 당신들이 개입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른 이들이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었다.
최소한의 경계와 관심.
그거면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거, 더럽게 신경 쓰이네.’
지금 막, 그 막중한 임무만큼이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또 생겼다.
“이것도 공식전이라고 좀 떨린다, 야.”
“떨리긴 뭘. 확신하는데, 넌 최소로 잡아도 8강이야. 아마 어지간한 사람들은 네 존재만으로도 깜짝 놀라고 말걸? 기사 대전과 마법 대전, 둘 모두에 참가할 수 있는 건 오직 너뿐일 테니까.”
“이거 왜 이러실까. 내가 최소 8강이면, 넌 최소 우승이고?”
“그건 아니고. 나도 장담하지 못하는 괴물 녀석이 하나 있거든.”
“답지 않게 약한 모습이네?”
“진짜야. 세디스 너도 알려나 모르겠네. 나랑 같은 아카데미 출신인데, 생도 시절에는 나 따위랑 비교도 안 되는 괴물이었거든.”
그제야 여우같은 브라운 머리칼의 계집애가 멈칫했다.
“그거 혹시, 제노스 델 카이클?”
“알아?”
“지금 대륙에서 마나 물 좀 먹은 마법사들 중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하긴…….”
“쫄지 마라.”
“안 쫄아.”
“내가 장담한다. 진짜로 네가 이겨. 내 또래에서, 너만 한 괴물은 없다고 나는 확신하거든.”
아주 주변 가득 훈풍이 불었다.
반대로, 유리나의 마음속에서는 삭풍이 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배배 꼬여가는 그 감정은, 이내 외부로 표출되고 말았다.
“팔자 좋네. 누구는 나라 걱정에 쪽잠도 못 자고 있는데, 누구는 머나먼 이국까지 와서 꽁냥꽁냥.”
“…응?”
그 비아냥거림에 상대의 눈빛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누구야?”
“내 동기. 언제 한번 얘기했던 것 같은데? 유리나 벤 아리에나라고…….”
움찔.
쟤가 내 얘기를 했다고?
하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자, 예의 요망한 계집애가 묘한 콧소리를 냈다.
“흐응. 듣던 대로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런 대냐? 꼭 질투라도 하는 사람처럼.”
“질투는 무슨. 그냥 원래 성격이 저래.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건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거든. 참을 줄도 모르고.”
“아하. 어울리네. 한마디로 불같은 성격이라는 거잖아. 일종의 다혈질?”
“비슷하지.”
유리나의 이마 위로 희미한 십자 마크가 아로새겨졌다.
“다 들리거든?”
“어, 미안.”
“초면에 웬 시비래. 그리고, 내가 저런 낙제생 따위를 두고 질투를 왜 하냐? 격 떨어지게.”
“뭐, 다른 건 모르겠고… ‘남자’ 사이를 질투하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긴 하지.”
“…어?”
무언가 이상했다.
남자?
“그게 무슨…….”
“지금부터 개막전, 그 영광의 추첨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허나, 유리나의 의문 가득한 목소리는 금세 묻혀졌다.
1층 정중앙.
어느새 단상 위로 오른 사회자가 마나를 실어 목청을 높이고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서 자질구레한 규칙 설명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사전 소집은, 이름 그대로 투명한 개막전 추첨을 위해서 마련된 자리니까요.”
대륙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시합.
마법 대전 개막전.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시간이 없는 저 위의 높으신 분들은 대게, 축하 인사 겸 첫 시합인 개막전 정도만 관전하고 돌아갔으니까.
그러고 한 16강쯤 되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려나?
그사이 기간이 최소 일주일은 되었기에, 다시 본래의 일터로 돌아가 바쁜 일상을 보내는 것이다.
다른 의미론, 시시한 대전은 모조리 건너뛰겠다는 뜻이겠지.
상황이 이러니, 첫 시합의 중요성은 더 거론할 가치조차 없었다.
“자 그럼, 시간관계상 바로 추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꿀꺽.
어느새 다른 둘의 대화도 잊은 채 유리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추첨 방식은 간단했다.
단상 위에 올려진 커다란 두 개의 박스.
사회자는 그 안에서 각각 종이를 한 장씩을 뽑는다.
거기에, 개막전의 영광을 품에 안을 주인공들이 적혀 있었다.
“제 손을 한번 봐주시지요.”
곧 예의 박스 안에서 종이 두 장이 딸려 나왔다.
마법의 힘이라도 빌린 것인지, 손안의 글자는 이내 허공 위로 크게 투영되었다.
왼손의 종이에는 F.
그리고 오른손 종이에는 숫자 12가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보시다시피, 개막전의 주인공은 F조 12차전 참가자들입니다.”
“……!”
사람들이 웅성댄다.
그럴수록 유리나의 눈동자도 점차 커져만 갔다.
한 번 본 것은 쉽게 잊지 않는 그녀의 영민한 머리가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F조 12차전.
그건, 다름 아닌 세타의 시합이었다.
***
추첨식이 진행되고 있는 1층이 아닌, 탑의 최상층.
제1마탑, 부탑주의 방.
“드락서스. 자신은 있겠지?”
그곳에, 두 명의 중년 사내가 마주 앉아 있었다.
한쪽은 방의 주인임이 분명한 마탑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물론입니다.”
“반드시 이겨야 할 게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 폐하께서 관심을 표명하신 대전이니까.”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겠습니다. 이리 손까지 써주셨는데요.”
“알면 잘하거라.”
두 사람 앞에 꿇어앉은 청년.
자신과 무척이나 닮은 드락서스의 말에,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로 현 공식 서열 38위에 랭크된 파동의 마법사 트라오레 후작이었다.
“도와줘서 고맙네.”
“우리 사이에 뭘. 별일도 아닌데…….”
“이게 별일이라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 거네. 나는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야.”
“내가 한 일이라고는, 자네 아들이 개막전을 치렀으면 좋겠다고 넌지시 말만 던진 일뿐이야. 하니, 부담은 갖지 말라는 뜻이네.”
“아네, 알아. 내 자네 마음을 모를까.”
두런두런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드락서스가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게 진정한 친우겠지.
부친에게 저런 믿음직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못내 자랑스러운 그였다.
“외람되오나, 존경하는 염화의 부탑주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다는 그 포상이 무엇인지, 부탑주께서는 알고 계신지요? 벌써부터 대륙 전체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음,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만…….”
찰나, 말끝을 흐리던 그가 눈을 빛냈다.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10대 보물 중 하나. 그중에서도 마법사와 관련된 보물이라는 것 정도는 얼핏 들은 것 같다.”
“……!”
이미 아는 건지, 표정 변화가 없는 트라오레 후작과 달리, 드락서스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아버지…?”
“제국에서 전폭적인 후원을 약속한 만큼, 마탑은 올해 마법 대전에서 한 가지 예외적인 방침을 허용했다고 하는구나.”
“예…?”
의아한 표정을 짓는 드락서스를 보며 제1부탑주가 말했다.
“그 얘긴 내가 하지.”
“부탁하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마탑은 마법 대전 기간 동안 외부 집단의 스카웃을 엄격하게 금해왔네. 죽 쒀서 개 주는 꼴을 대놓고 보이게 되면, 마탑의 위신이 크게 훼손될 테니까.”
“그 말씀은…?”
“올해 마법 대전에서는, 제국과 관련된 집단만큼은 예외 규정을 뒀다는 뜻이야. 황제께서 우리 인재를 빼앗아 가시더라도, 달리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지.”
“아,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큰 후원자시라지만, 그리되면 마탑은 가장 우려하는 일을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 아닙니까? 굳이 왜…….”
“괜찮아. 탑은 이미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황제께 약속받았거든.”
“……!”
고요한 침묵 속, 이번에는 트라오레 후작이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너는 우승만 생각하거라.”
“아버지…….”
“그리만 되면 마법사들이 그토록 원하는 아티팩트도, 니가 바라마지 않는 제국의 광활한 영토도 모두 얻게 될 테니까. 이건 내가 장담하마.”
“……!”
부르르르.
꽉 쥐어진 사내의 주먹은 이제 짜릿한 전율로 쉼 없이 떨려대고 있었다.
“반드시. 그리 해보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