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초월의 마탑(1)
3년 전의 다짐.
그것을 지키기 위해, 나는 마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초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9마탑에.
마법 대전 접수는 이미 끝 마친 지 오래였고, 오늘은 개인적인 볼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너, 뭔데!”
“뭐가?”
“뭔데 이런 곳에서 다 만나냐고. 그간 연락 한 통 없었잖아! 말하다 보니까 열 뻗치네. 그래도 친군데 너무한 것 아니냐?”
“연락할 방법은 있었고?”
“…아하.”
내 반문에, 유리나가 그제야 제 머리를 긁적였다.
내전으로 아카데미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고, 생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뿐인가?
나라 전체가 둘로 갈라진 지금.
좌우간의 격렬한 대립으로, 생도들마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눈 상황이었다.
“소식은 들었어. 많이 좋지 않다고 하던데…….”
“안 좋지.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거고.”
“무슨 뜻이야?”
“미안한데, 자세한 건 너한테도 말해줄 수 없어. 이해하지?”
자연스레 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장장 3년이다.
일수로 따져도 1,000일을 훌쩍 넘는 긴 시간.
그 오랜 기간 상대는 전쟁을 치러왔고, 나는 이제 이들에게 철저히 외부인이나 다름없었다.
제 가족이 죽어가던 그 순간에도, 나는 도움은커녕 나라를 떠나 있었으니까.
“…….”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았기 때문일까?
순식간에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비단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꼬박 3년 만에 만나는 두 사람이다.
더군다나, 성인이 되고 난 이후 처음 한 자리에 마주한 남녀 동기였으니.
지금과 같은 어색한 적막감도 한편으로는 당연한 결과였다.
“크흠.”
물론 성격상 이런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유리나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어째 너는 재미가 더 없어진 것 같냐.”
“그러는 너는 어째 실력이 더 없어진 것 같네.”
“…이 새끼가?”
내 말에 유리나가 곧장 발끈했다.
“다짜고짜 시비 거는 거냐?”
“시비 아니고 사실.”
“안 본 사이 재수도 없어졌네. 야,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지껄여?”
“알만하니까.”
“알긴 뭘 알아. 이래 보여도 5써클 마스터거든? 후천적 마나 각성자라고 뻐기는 거야, 뭐야?”
저 나이에 5써클 마스터면 분명 대단한 경지였다.
주변에 누군가만 없었다면.
“제노스 델 카이클은 3년 전 그 당시에 이미 5써클 마스터였던 것 같은데…….”
“그 자식은 처음부터 논외였고!”
민감한 이름이 거론되어서인지 유리나가 대번에 도끼눈을 치켜떴다.
“그러는 넌? 실력은 좀 늘었냐? 겉보기에는 너도 피차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아닐걸?”
“헹, 그러셔? 딱 봐도 연합에서 안 되니까 뒤늦게 마탑의 일원이 되고 싶어 찾아온 듯한데.”
“그건… 반은 맞네.”
“거보라지. 그런데 어째? 여긴 더 쉽지 않거든. 특히 초월의 마탑주는, 다른 탑주들보다도 더 재능 없는 이들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연합에서도 버려진 너야 뭐, 보나마나 아니겠어?”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산 듯싶었다.
허나, 그걸 바로 잡을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호기심이 더 앞섰으니까.
“차라리 진즉 돌아나 왔을 것이지. 그럼 이 누나가 친히 한 수 가르쳐 줬을 텐데.”
“그보다 초월의 마법사 본인도 타고난 천재가 아닌, 후천적 마나 각성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너 모르지? 자격지심은 겪어본 사람들이 더한 거야. 그가 각성하기 전에 얼마나 멸시를 당했을지 상상이나 해봤어? 그래도 마법의 종주국이라 불리는 테라 출신인데.”
“내가 들은 거랑은 좀 다르네.”
“엥? 뭐냐, 꼭 아타락시아 페르잔에 대해 안다는 듯한 그 말투는?”
직후, 내 어깨가 가볍게 으쓱여졌다.
“조금은. 설마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곳에 왔을까?”
“……!”
***
푸른 하늘 아래 우뚝 솟은 녹색의 건축물.
제9마탑.
지금 막 이곳에 도착한 유리나는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상대는 뭐라도 있는 것처럼 얘기했으나, 실상은 전혀 ‘아니올시다’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찾아와서 뭐가 어쩌고 저째? 탑주님이 만나 달라면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 썩 꺼지지 못해!”
높이만 족히 2미터는 됨직한 탑의 입구를 한가득 막아서고 있는 사내였다.
‘진짜 마법사인가?’ 싶을 정도로 떡대 좋은 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올해 마법 대전의 참가 접수는 제1마탑부터 제5마탑까지만 받고 있었다.
처음부터 제9마탑에는 출입할 최소한의 명분조차 없는 둘로서는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뭐냐? 방법 있다며?”
“…내 쪽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나 신경 써.”
“이 싸가지. 걱정해 줘도 말하는 본새하고는.”
“너야말로 무슨 자신감으로 이곳에 찾아온 건데?”
“나야 처음부터 사전 답사가 목적이었거든? 하다못해 전쟁을 하려고 해도 정찰은 필수니까.”
“그래? 그럼 나도 뭐, 그 정찰이라는 걸 좀 해볼까?”
“줄기차게 헛소리만 늘어놓네. 상대가 저리 나오는데 정찰은 어찌하겠다고?”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듯,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안 꺼져?”
가까이 접근하자 입구를 막아선 예의 사내가 당장에 주먹을 휘두르려는 시늉을 취했다.
“잠깐만요.”
“잠깐이고 뭐고…….”
“이걸 보여주면, 탑주님이 만나주실 거라던데요.”
“……?”
내 말에, 사내가 턱짓으로 눈앞에 들이 밀어진 물건을 가리켰다.
“뭔 헛소리냐? 그게 뭔데?”
“제 스승님이 주신 물건이요.”
“큭… 간혹 너 같은 놈들이 있지. 네까짓 애송이의 스승이라고 해봐야, 별 볼일도 없는 동네 훈장님일 텐데. 그런 촌뜨기에게 받은 물건으로 뭘 어쩌라고?”
그 말, 후회할 텐데.
한데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한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상대의 오만함이 정도를 넘어섰기 때문일까?
이번만큼은 유리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봐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뭐, 불만 있냐?”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마탑은 원래 손님 대접이 이래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 너흰 내게 충분히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상대이고.”
“당신이 뭘 안다고…!”
성난 표정으로 목청을 높이려는 유리나를 막아선 내가, 다시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일단 제가 드리는 물건을 탑주님께 보여나 주세요.”
“불가.”
“손해 보실 일은 전혀 아닐 텐데요. 이게 별거 아니라면 욕 한번 먹고 마실 테지만, 별거면 어쩌시게요?”
“…….”
이어지는 내 말에, 그제야 사내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장에 우리를 쫓아 보내고 싶겠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찝찝할 것이다.
그러니 저런 표정을 보이는 것이겠지.
예상대로, 그가 곧 털이 수북한 제 손을 내밀었다.
“줘봐.”
“여기요.”
“…잠시 기다려라. 잘 알겠지만, 그사이 허튼 짓을 했다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가 어디인데요.”
“크흠!”
한 차례 불편한 헛기침을 내뱉은 사내가 곧장 탑 내부로 사라져 갔다.
쾅!
물론 입구의 출입문은 확실하게 닫아 놓은 채로.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유리나가 물었다.
“야, 저게 뭔데?”
“말했잖아. 나를 이곳의 주인과 만나게 해줄 물건이라고.”
“웃기지 마. 저 덩치도 말했지만, 마탑주가 어디 시골 똥개냐? 저딴 물건 하나로 그 높은 사람을 단번에 만날 수 있게?”
“일단 지켜나 보라고.”
“나참.”
대화가 끝나고도 유리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는 탑주와의 만남을 위해 무려 마법 대전의 ‘우승’까지 꿈꾸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고작 물건 하나로 만날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진즉 그리했겠지.
쿵쾅쿵쾅!
그리 오래지 않아 문 너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오는지, 두꺼운 출입문을 뚫고도 울림이 다 느껴질 정도였다.
이즈음에서 유리나는 확신했다.
저 함악한 기세를 보아 상대는 지금 극도로 화가 난 상태임을.
“야… 지금이라도 튈래?”
“왜?”
“저 소리 안 들리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쫄리면 너라도 먼저 가라.”
“쪼, 쫄리긴 누가!”
순간 울림이 멎었다.
곧이어,
벌컥!
“너, 너…….”
지금 막 문을 열어젖힌 예의 사내가 이쪽을 향해 삿대질을 시작했다.
“뭐라시던가요?”
“그게…….”
힐끗 눈치를 살핀 사내가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오, 올라가라.”
“에엥?”
그 즉시, 유리나의 잇새로 기괴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말뿐만 아니라 상대는 행동으로 길을 터주고 있었으니까.
“…와, 진짜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오네.”
“크흠, 탑주님께는 말 좀 잘 부탁한다.”
“야.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냐? 이러면 나는 지금껏 뭔 헛짓거리를 하고 있던 건데?”
허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곧 있을 일에 비하면 이건 황당함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
방 주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극도로 깔끔한 방이었다.
100평은 됨직한 넓이에도, 있는 것이라고는 책상과 의자 하나가 전부였으니까.
하물며 손님이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
“거, 진심 괜찮은 거냐?”
“뭐가?”
“듣기로 제9마탑주는 성격이 상당히 괴팍하다던데…….”
“알면 입조심 좀 해. 들으면 어쩌려고?”
“…합!”
그제야 유리나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드, 들은 건 아니겠지?”
“글쎄.”
“하… 진짜로 이게 뭔 일이다냐.”
“놀라기엔 아직 이를걸?”
“어?”
“내 용건은 지금부터가 진짜거든.”
“그게 무슨……”
“잡담은 이만하고, 이 방의 주인이 오면 본격적으로 얘기해 보자고.”
나라님도 제 말하면 온다는 격언은, 여기서도 통용되는 것일까?
저벅, 저벅, 저벅.
순간 방 안에 딸린 또 다른 출입문 뒤편에서 나지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꼴깍.”
이에, 유리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초월의 마법사 아타락시아 페르잔.
그에 대한 소문은 실로 믿기 힘든 얘기들뿐이었다.
백 세를 훌쩍 넘긴 대마법사라는 설.
대륙 최초의 헥사 캐스터라는 설.
심지어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존재라는 설까지.
아타락시아 페르잔은 테라 왕국 출신이라는 것 외에, 그 정체가 모두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의 가문조차 왕가와 테라의 최고위층이 철저하게 은폐했으니까.
한데,
“날 찾아오셨다고?”
“엥?”
그 순간 유리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지금 막, 출입문 뒤편에서 나타난 인영을 확인한 직후였다.
“탑주님은 어디 가시고 저런…?”
“내가 그 탑주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야.”
“켁! 말도 안 돼! 이런 어린애가 그 초월의 마법사 아타락시아 페르잔이라고?”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순식간에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상대의 얼굴.
그리고 아직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는 유리나의 황당 가득한 표정.
그 사이에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의 상황과 딱 어울리는 한마디를 잊지 않으며.
“선 넘네.”
비록 전해 들은 사실이지만.
지금 내 앞에 나타난 상대는, ‘어린애’라는 말을 세상 그 무엇보다 싫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