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53화 (53/251)

53화. 대륙 마법 대전(2)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열두 개의 건축물은, 달리 대륙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지스 대평야에 위치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 위에 덩그러니 세워진 십이(十二) 마탑.

대륙의 수많은 상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주변으로 독자적인 상업지구를 구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됐으니까.

이지스 대평야는 그 어느 나라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장소.

오늘날 평화의 상징이라고도 불리는, 대륙 유일의 ‘중립지역’이었으니까.

다시 말해, 여기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일종의 보호비 명목으로, 일정한 금액만을 마탑에 지불하고 있을 뿐.

이는 마탑의 귀중한 자금줄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상인들이 불만을 가지냐면 그도 아니었다.

마법사 수십만 시대.

탑을 찾는 초야의 마법사들은 예상보다 훨씬 많았으며, 그들 모두가 상인들의 귀중한 고객이었다.

보호비가 아닌 홍보비로 생각해도 그 정도 푼돈은 기분 좋게 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마법 대전 기간에는 더더욱.

수요가 폭증하는 시기다.

마탑 내부의 시설물들은 오직 소속된 마법사들에게만 허락되었다.

설령 마법 대전의 참가자일지라도, 먹고 자는 것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첩자를 대비한 탑 나름의 예방책이, 상인들에게는 번뜩이는 사업 아이템으로 작용한 경우였다.

허나, 여기에도 치명적인 문제점이 몇 있었으니,

“…어쩐지 일이 쉽더라니.”

곧장 사전에 얘기된 숙소로 향하던 유리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지스 대평야 서쪽, 제9마탑 부근.

그 넓은 대지를 걷는 동안 그녀는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못했다.

족히 5킬로미터는 이동했을 정도로 짧은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데, 어느 순간부터 갑작스레 인기척이 느껴졌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여전히 허허벌판뿐인데도 말이다.

“그냥 가던 길들 가시죠?”

“역시 감이 좋군.”

스르륵.

기다렸다는 듯, 여섯이나 되는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비저빌리티.

스스로의 모습을 숨기는 보조계 투명 마법.

고작해야 2써클에 불과한 마법이었으나 유리나의 얼굴은 더없이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얼핏 보기에도 이들은 ‘마법사’가 아니었으니까.

“대단들 하시네요. 이런 고오급 아티팩트를 하나둘도 아니고 여섯씩이나.”

“고작 그뿐일까? 순순히 따라와라. 하면 네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테니.”

“헹. 전형적인 납치범처럼 얘기하면서, 아저씨들이 누군 줄 알고 내가 따라가요? 안심할 수 있게 정체부터 밝히시던가.”

“뭐, 우리 같은 이들이야 이런 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인간들이지.”

순간 유리나가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령 검은 달이나, 숨은 검 같은?”

“글쎄. 나는 그보다, 너 같은 핏덩이가 이런 무법지대에 무슨 생각으로 혼자 왔는지가 더 궁금한데.”

“아저씨들 정보력이 생각보다 훨씬 꽝이시네. 그리고 제가 왜 혼자에요?”

“훗. 허풍 떨지 마라.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 채 모습을 드러낸 거라 생각하는 거냐?”

“…….”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녀에게 접근한 것임이.

최악의 경우, 신분까지 노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제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 아닐까요?”

“물론 스물 안팎의 나이에 5써클 마법사는 전 대륙을 통틀어도 흔치 않지. 그것도 너 같은 여아는 더더욱.”

“그럼 이것도 아시겠네요. 아무리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이지스 대평야라지만, 제가 누군지 알면 반드시 후회하실 거라는 걸.”

“하면 얼굴을 보여라. 그 로브 아래가 어떤지 우리도 썩 궁금하거든.”

움찔.

가볍게 몸을 떠는 유리나를 향해 상대가 계속해서 말했다.

“후회를 할지, 환호를 할지.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는 의미다.”

“진짜 너무들 하신다. 자기들은 하나같이 시꺼먼 복면들을 두르고 있으면서.”

말을 하면서도 유리나는 은연중 심장의 써클을 휘돌렸다.

허나, 상대는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움직이는 성채.”

“……!”

“그 흉악한 가격의 아티팩트가 지금 내 손안에 있다. 부탁인데, 허튼 수작 부릴 생각은 마라.”

움직이는 성채는 어떤 특정한 아티팩트를 가리키는 일종의 은어였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유리나가 작게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숨은 검 쪽 아저씨들인가 보네요.”

“왜 그리 생각하지?”

상대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꾸했다.

“검은 달은 진짜 순수하게 ‘정보’만 사고판다고 들었으니까요.”

“은폐와 조작은 정보활동의 기본이다. 그들이 정말로 정보만 사고팔까?”

“그에 비해 숨은 검은 요인 납치, 암살, 밀수는 물론이고 온갖 나쁜 짓들도 다 한다고 알고 있구요.”

“훗. 오해가 깊군.”

“이리 반응해 주시는 걸 보니, 스스로 숨은 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거죠?”

“네가 무어라 생각하든 상관없다. 우린 우리의 목적만 이루면 되니까.”

“…….”

더 이상 시간 끌 생각이 없다는 듯, 여섯의 복면인들이 천천히 유리나를 향해 접근했다.

‘빌어먹을.’

그녀는 스스로의 패착을 인정했다.

행동만 너무 앞섰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는, 그녀조차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으니까.

외부에 알려지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적들이다.

이들이 정말로 반란군과 관련된 자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결코 그녀를 그냥 놓아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앞뒤로 각각 셋. 이기려기보다는, 지금 상황을 알리는 데 초점을 둔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가리는 것 하나 없는 허허벌판 위.

허공에 파이어 볼 한 방이면, 변고를 눈치챈 마탑에서 사람들이 대거 달려 나올 터였다.

다만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3써클 이하의 마법은 모조리 ‘무력화’시키는, 그 사기적인 아티팩트가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4써클 이상 마법만으로 버텨내야 한다는 건데, 그런 큼직큼직한 마법들만으로는 한계가…….”

“…웬 놈이냐!?”

“……!”

그 순간, 유리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갑작스레 아무것도 없는 우측 공간에서 또 한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그녀 또한 예의 복면인들의 일행인 줄 알았다.

한데, 복장이 미묘하게 달랐다.

그 인영은 오히려 그녀와 같은 마법사의 로브 비스무리한 것을 뒤집어쓰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당장에 이쪽 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여, 유리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외쳤다.

“살려주세요!”

“…….”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즉시, 조금 전 인비저빌리티를 해제한 인영의 눈빛이 변했다.

“이런 우연이 있나.”

“…탑에서 나온 마법사인지 대전 참가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가던 길 가시지. 이지스 대평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누군지 정도는…….”

“몰라요.”

“…….”

“그리고, 쟤는 제가 아는 사람이기도 하거든요.”

“……!”

곧장 경계 어린 눈빛을 내비치는 복면인들 사이에서, 새로이 나타난 인영이 양어깨를 으쓱했다.

시선은 정면의 유리나에게 고정한 채.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쟤도 운빨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깐?”

***

한 가문이 있었다.

그곳은 당대의 왕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3대 공작가 중 하나.

심지어 안주인이 무려 국왕의 여동생이었다.

허나, 일국의 공작과 공주 사이에서 난 첫째는 놀랍게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분명 이 고귀한 부부에게 외견상 보이는 특별한 문제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사내의 이야기는 꼬박 1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실리스 스필 세드릭.”

“…….”

“그리고 바이커 론 인버스와 내 이복형인 제르마 델 카이클.”

“…….”

“이들이 ‘같은’ 비극을 맞이한 이유 또한, 모두 지금의 얘기들과 관련되어 있다.”

마침내 긴 이야기를 마친 사내, 제노스가 정면을 바라봤다.

어느 건물 뒤편의 너른 안마당.

일견 차가워 보이는 흑발의 미녀가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등 뒤로는 수십의 호위들을 대동한 채.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어떻게 이곳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다짜고짜 찾아와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더니…!”

“루나 틴 론지에,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만, 나는 너만큼은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이리 찾아왔고, 얘기는 모두 다 했다. 사실 여부는 네 정보력이라면 오래 지나지 않아 알 수 있겠지.”

곧장 몸을 돌리는 제노스를 향해 루나가 외쳤다.

“그냥 보내줄 거라고 생각하나? 이 반역자!”

“…반역자? 글쎄. 이 얘기들이 외부에 알려져도 우리가 그리 불릴까?”

무수한 검들이 제노스의 등을 겨누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데 그는 그 흔한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오히려 호위들을 대동한 루나 쪽에서 떨리는 눈길로 제노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국민들이 믿을 거라고 생각해?”

“판단은 그들이 스스로 하겠지. 그보다 나는, 론지에 후작님의 반응이 더 궁금하다만…….”

“네가 기대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절대로!”

“착각하나 본데,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진실을 알리러 온 거지. 그 증거라 하긴 뭣하지만, 네가 가장 걱정하는 일 또한 눈곱만큼도 할 생각이 없어.”

“그게 무슨…….”

순간 반문하는 루나의 두 눈을, 제노스가 빤히 들여다봤다.

“내전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공주님의 안전은 보장할 것이라는 뜻이다.”

“……!”

“목숨뿐만이 아니다. 무너진 왕가의 공주가 어떤 운명을 살아갈지, 너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을 텐데? 그 일을 내가 나서서 막아주겠다는 의미야.”

상대의 말이 이어질수록 루나의 얼굴도 시시각각 변해갔다.

제노스 델 카이클.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설령 네가 그런 약속을 하더라도, 공작님의 말 한마디면 공주님은…….”

“그럴 리 없어.”

“……?”

“아버지는, 내가 그녀와 결혼하기를 바라시거든.”

“……!”

눈을 크게 뜬 루나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나를 놀리는 건가?”

“그럴 이유가 있나?”

“모순이다! 지금까지의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구태여 왜 공작님이 그런 선택을 한다는 거지? 끝이 뻔히 보이는 파멸의 길을 일부러 걷겠다고?”

“그럼에도 명분이 부족하니까.”

“……!”

이어지는 제노스의 말에, 루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명분이라니, 그 말인즉…….”

“지금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3년의 길고 긴 내전을 끝내고, 이제 우리 카이클 가문이 이 나라의 적법한 왕가가 되려고 하니까.”

“……!”

충격의 폭풍수 속, 제노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재차 울려 퍼졌다.

“설령 그 길이 파멸만이 가득할지라도, 누군가는 이 길고 긴 악연의 고리를 끊어내야지.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잖아? 지나온 역사가 그래왔고, 그리 말해주고 있으니까.”

***

“크으으…….”

여기, 여섯이나 되는 장정들이 길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가격이 무척이나 비싸, 달리 ‘움직이는 성채’라고도 불리는 초고가 아티팩트.

안티 매직 필드를 손안에 꼭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싸, 개꿀. 이건 내가 챙기고…….”

“…핫!”

예의 로브인이 안티 매직 필드가 각인된 민무늬 팔찌를 주워들자, 그제야 유리나가 정신을 차렸다.

“저, 저기…!”

“어. 설마 양아치 짓을 하려는 생각은 아니지? 그래도 내가 다섯은 쓰러뜨렸는데, 응당 지분도 이쪽이 커야지.”

“그, 그게 아니라요.”

“안 돼. 이런 건 먼저 주운 사람이 임자다. 배 째.”

일견 단호한 표정의 상대를 향해, 그녀가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저, 저는 그냥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건데…….”

“엥?”

“실례지만, 존함이라도 알 수 있을런지요. 대체 어느 고인이시길래 이런 신위를…?”

말을 잇는 지금도 유리나의 마음속은 충격으로 가득했다.

진심으로 경악스러웠으니까.

목소리로 추정하건대, 상대는 기껏해야 그녀 또래로 보였다.

한데 상대는 실로 괴랄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다섯이나 되는 사내들을 쓰러뜨렸으니.

그것도 고작 맨손으로.

사내의 움직임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래.

한줄기 ‘바람’과도 같았다.

허나, 그녀의 놀라움은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너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냐?”

“네?”

“아님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연이어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던 상대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툭 하고 내뱉는다.

“유리나 벤 아리에나. 너 아니야?”

“……!”

그 즉시 유리나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타닷!

곧 순식간에 상대와의 거리를 벌린 그녀가 외쳤다.

“누구냐!?”

“누굴까?”

“다 알고 접근했나 본데, 나를 데려가 봤자 알아낼 수 있는 정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딱히 너한테서 알아내고 싶은 정보 같은 건 없는데…….”

“그, 그럼 설마…?”

이제 유리나는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다.

다 큰 성인이 된 지금은, 스스로의 미모가 한 나라를 떨어 울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뛰어나다는 사실을.

마치 벌레라도 보듯 그녀의 경멸 어린 시선이 상대의 위아래를 훑었다.

이에, 예의 로브인 또한 발끈했다.

“뭔 개짓거리야. 그저 네가 다 큰 남정네와 야반도주를 감행한 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거든?”

“뭐, 뭣?! 너야말로 무슨 개소리냐?”

“아니라고 하게? 너 맞잖아. 크리스 론 인버스랑 이러쿵저러쿵.”

“야! 그건 다 죽어가는 인간 살려보겠다고 그런 거고!”

당장에 도끼눈을 뜨려던 유리나가 움찔했다.

그리곤 마치 학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온몸을 푸들푸들 떨어댔다.

“호, 혹시 너…?”

“어. 그 혹시가 맞아.”

스르륵.

곧 로브 아래에서 사내의 맨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누구와 마주쳐도 만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외모를 가진, 상대의 실체가.

허나, 그런 그를 발견한 유리나의 표정은 더없이 밝아졌다.

진정 얼마 만에 짓는지 모를, 해맑은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채.

“야이씨 너, 세타 쿤 이그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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