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3년. 급변하는 정세
곳곳에 고인 물이 그득한 바닥.
어둡고, 눅눅하며, 정체 모를 쾌쾌한 냄새까지 풍겨대는 어느 지하의 수로.
찰박, 찰박, 찰박.
그곳을 한 인영이 걷는다.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있어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인임이 분명한 체구를 가진 인영이었다.
허나, 그런 그녀의 걸음걸이에 힘이라고는 없었다.
마치 패잔병의 그것처럼.
그 상태로 얼마나 더 이동했을까?
우뚝.
마침내 예의 인영이 멈춰 섰다.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수로 길에 이르러서였는데, 그 앞을 각기 다른 로브인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곧이어,
“실비아.”
마침내 예의 인영의 정체가 밝혀졌다.
스르륵.
로브를 벗어내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윤기마저 흐르는 찬란한 은발이었다.
얼굴 한가득 한기가 서려 일견 차가운 인상이었으나, 그럼에도 그 미모가 가려지지 않는 대단한 미녀.
실비아 스필 세드릭.
한때 나라 전체를 호령하던 최고위 가문의 여식이자, 지금은 대테라 해방군의 참모가 바로 그녀였다.
“위쪽 상황은 어때?”
“내 대답이 어떨 것 같은데?”
도리어 반문하는 실비아를 보며 좌측의 로브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또한 실비아만큼이나 상당히 아름다운 미성을 가진 여인이었다.
“유난히 날이 선 걸 보니 굳이 안 들어도 알겠다.”
“그럴 수밖에. 지금 막 레이브의 강북 일대가 점령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오는 길이거든.”
“……!”
나머지 세 로브인이 동시에 흠칫 몸을 떨었다.
왕국 남단에 위치한 레이브 백작령은, 일명 프레온이라 불리는 기다란 강을 품고 있었다.
이 강이 도시 전체를 남북으로 양단하고 있었기에, 소위 강북과 강남 지역으로 나누어 부르곤 했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이 갖는 지리적 특징에 있었는데,
“그 말인즉, 이제 곧 적군이 우리 본거지의 코앞까지 진출한다는 뜻이잖아!”
“그렇겠지.”
“그렇겠지이이? 너는 뭐가 그리 태연한데? 네 본가잖아, 거기는!”
“호들갑 떨지 마. 당분간은 저들도 섣불리 강을 넘을 수 없을 테니까. 여름에 레이브 강을 넘기에는 퍽 부담스럽거든.”
사실이었다.
강 너머에서 언제 어떤 마법들과 화살 비가 쏟아질지 모르는데, 무턱대고 강을 건널 수는 없었으니까.
더욱이 배를 띄우려 해도 레이브 강은 수심이 너무 얕아 불가능했다.
“그럼 겨울에는? 거긴 유속이 느려서 한겨울에는 강 전체가 꽁꽁 얼어붙고 말 텐데?”
“달리 생각하면, 일단 3개월은 시간을 번 것이겠지.”
“그걸 말이라고…!”
재차 역정을 내려던 또 다른 여인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래 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까.
3년이라는 시간은, 실로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국왕은 유폐되고.
궁은 빼앗겼으며.
전 국토의 5분의 4가,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다.
문제는 적군의 수괴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과 같은 테라의 귀족이라는 데에 있었다.
“이익… 젠장! 작년 케이로스 대평야에서 그리 대패하지만 않았어도, 이 지경까지 내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지나간 과거는 잊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니?”
“분해서 그런다, 왜! 카이클 공작, 그 미친 인간이 외세를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결과는 정반대였을 테니까!”
실비아 맞은편의 여인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내전 초창기에만 해도 병력의 우위는 이쪽에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두 공작가가 아군과 함께했으니까.
한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작스레 적군이 늘어났다.
물론 여기 있는 이들은 그 병력의 출처가 어디서 온 건지 잘 안다.
비슷한 시기에, 외부에서 북방의 국경을 넘은 수만의 병력들이 있었으니까.
“북방은 전적으로 카이클 가문의 영역. 그들이 길을 내어주기로 작정했다면, 우리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지.”
“그게 문제야? 이건 내정 간섭이야. 주권 침탈이라고! 카이클 공작은 생각이 있는 건가? 설령 내전에서 승리하더라도, 제국이 무슨 요구를 할 줄 알고!”
“똑똑한 사람이니까 다 생각이 있겠지.”
“하? 그게 참모로서 할 소리냐?”
“그래서 나도 같은 방법을 한번 써보려고.”
움찔.
거짓말처럼 나머지 두 로브인이 움직임을 멈췄다.
“뭐라고…?”
“세 군데가 있어. 우리가 도움을 요청할 만한 곳이.”
이어지는 실비아의 말에 예의 로브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하나는 타국(他國)이야. 적들이 가장 부담을 느끼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다른 왕국들의 참전일 테니까. 만에 하나 제국군이 우리 내전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위기감을 느낀 저들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걸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잖아. 당장 우리가 그러면 저들과 다를 게 뭔데? 내전에서 승리하자마자 나라를 통째 외부에 넘겨줄 생각이야?”
“그러니까 더 상세히 알려야지. 황제가 대테라 내전의 배후에 있다. 이건 본격적인 대륙 정벌을 위한 제국의 야욕이다. 그 증거를 찾아, 보다 확실한 공공의 적을 만들어야겠지.”
“그게 참 쉬운 일이겠다. 다른 데는 어딘데?”
“두 번째는 국가가 아닌 집단이야. 가령 용병 길드나 자유 연합. 이쪽은 돈만 있으면 일이 훨씬 수월할 테지만…….”
“불가. 수천, 수만의 병력을 용병들로 대체하려면 얼마나 천문학적인 돈이 들지 상상도 안 간다. 자유 연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없으니까. 마지막 하나는?”
“…마탑이야.”
“……!”
이 의외의 대답에 둘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던 우측의 로브인이 입을 열었다.
“진심이야?”
“네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아. 열두 마탑은 제국과 한통속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런데 왜…?”
“단 한 곳만 제외하고.”
“……?”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상대를 향해 실비아가 말을 잇는다.
“제9마탑.”
“제9마탑이라면…….”
“그래. 초월의 마탑. 그곳의 주인인 아타락시아 페르잔이라면, 우리를 도와줄지도 모르지.”
우측의 로브인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글쎄. 그가 비록 테라 왕국 출신이라지만 아타락시아 페르잔은…….”
“나라에 배신당했고, 결국 내쳐졌지. 하지만 루나, 잊은 건 아니지? 그걸 주도한 곳이 어딘지를 말이야.”
“……!”
그제야 우측의 로브인이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외부에 관심을 끊었더라도, 인간인 이상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고국에 귀를 기울이겠지. 나는 그의 가문과 관련된 극비사항을 가지고 거래를 해볼 생각이야.”
“…딱히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지만, 설령 그가 관심을 보인다 해도 문제는 따로 있어.”
“뭔데?”
“애당초 탑에만 박혀 있는 그를 대체 무슨 수로 만날 생각이지?”
“마침 좋은 기회가 있잖아.”
“……?”
“마법 대전.”
“…그게 있었군.”
실비아의 대답에 우측의 로브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외부에 폐쇄적인 마탑이라도, 마법 대전 때만큼은 외부인의 출입을 널리 허락해 왔으니까.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이기는 하네. 그 일은 내가 할게.”
이에 기다렸다는 듯, 좌측의 여인이 말했다.
“하지만…….”
“뭐? 문제 있어? 마법 대전 참가자로 나만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너무 위험해.”
“괜찮아, 괜찮아. 이래 보여도 내가 5써클 마법사잖냐. 그리고…….”
이윽고 예의 좌측의 여인이 로브를 벗어젖혔다.
그러자 곧, 마치 햇살을 연상케 하는 기다란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야 이제 보살펴야 할 일가친척도 없지만, 너네는 아니잖아?”
***
쾅! 쾅! 쾅!
요란한 폭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소리의 진원지는 실로 무지막지한 크기의 석산(石山) 앞이었다.
일견 보기에도 매우 단단해 보이는 그곳은, 알 수 없는 구덩이들로 곳곳이 움푹 패여 있었다.
“그만.”
우뚝.
곧 한줄기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던 폭음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석산 앞의 무척이나 평범한 외모를 가진 사내 또한, 그제야 천천히 제 뒤를 돌아봤다.
“네 라이트 마법. 이제야 제법 능숙해졌잖아?”
“…….”
“불과 한 달 전이랑 비교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아주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도 믿겠어?”
놀라운 말이었다.
하나하나가 폭탄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진 마법이, 실상은 고작 어둠이나 밝히는 데 이용하는 1써클 라이트 마법이라니.
허나, 또 다른 이는 그와 생각이 같지 않은 듯했다.
“아직 한참 멀었어.”
“엥?”
“암살자가 무서운 이유가 뭔 줄 아냐? 눈치챌 새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대상을 제거해 버리니까 위협적인 거야. 저런 파괴력만 극대화시킨 허풍선이 라이트 따위…….”
“하여튼 내 상관은 칭찬에 인색하다니까. 됐고, 예정대로 이만 하산해라.”
움찔.
예의 평범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한 쌍의 남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논과 에이스.
각기 자유 연합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고 있는 바로 그들이었다.
“…흥.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만, 오늘로 약속한 3년이거든.”
세논의 말을 에이스가 받는다.
“막상 가려니까 아쉽냐? 그래도 세상에 처음 너를 소개하는 자리인데, 좀 꾸미고라도 가던가. 하다못해 그 얼굴이라도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면 훨씬 나을 텐데?”
두 사람의 반응에 평범한 사내가 제 어깨를 으쓱했다.
“정보 수집이 목적인데 너무 눈에 띌 수야 없지요.”
“하긴 그 얼굴은 너무 평범해서 오늘 봐도 금방 까먹을 것 같기는 하다만.”
“지금껏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못 드리고 떠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이리될 줄 다 예상했는데 뭘. 그보다 네 몸이나 걱정해라. 아무리 생각해도 작금의 대륙은 심상치가 않거든.”
“…….”
“수십 년 동안 조용하던 세 왕국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내전을 일으켰어. 제국의 유일무이한 견제 세력인 7개 왕국 중 무려 세 곳이 말이야.”
에이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계속 말을 잇는다.
“아마 지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진즉에 눈치챘을걸? 그러니 필사적으로 타 왕국의 소식에 귀 기울이려 하는 것이겠지.”
“조언 감사드립니다, 스승님.”
“아놔, 진짜 미치겠네.”
에이스가 결국 제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네 고집에 듣지도 않을 테지만, 그래도 말은 해본다.”
“…….”
“그냥 안 가면 안 되겠냐? 어차피 네가 원하는 바는 이루지도 못할 텐데…….”
세논이 에이스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말 좀 가려 가면서 하지.”
“아니, 내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고 걱정이 되니까…….”
“의미 없어. 어차피 쟤는 네 말대로,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테니까.”
“하…….”
에이스가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상대를 돌아봤다.
그러자 시선을 받은 평범한 사내가 미소 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더하여, 학장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고요. 아직 제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거든요.”
“에휴. 그럼 그렇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끝을 흐리던 사내가 곧 두 사람을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
한참이나 그 상태로 있던 사내는, 이윽고 두 사람에게서 멀어져 갔다.
한 번쯤 돌아볼 법도 한데 단 한 번을 그리하지 않고.
그렇게 사내는 석산을 내려갔다.
“…돌아오겠지?”
“글세…….”
“무슨 대답이 그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다는데 낸들.”
“그 한 길을 아는 건, 내 상관이 또 기가 막히잖아?”
“…너무 걱정하지는 마. 다른 건 몰라도, 쟤가 어디 가서 쳐 맞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고럼. 누가 키운 괴물인데.”
이내 서로를 마주 본 둘이 피식 미소 지었다.
“이제 우리도 일해야지. 스란 측에서 마침 사신을 보내왔다지?”
“어차피 또 연합을 완전히 공국 소속으로 편입시키자는 둥 헛소리나 늘어놓고 가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나중에 손님 대접이 뭣 같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니까. 세실리아에게만 맡기고 있을 수는 없지.”
“하면, 지금 바로 간부 회의를 소집할까?”
에이스의 물음에 세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