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연합의 미친개
“맹랑하지?”
에이스가 물었다.
허나, 그의 상관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상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된 일 아니야?”
멈칫.
여인의 고운 아미가 눈에 띌 정도로 찡그려졌다.
“잘되다니?”
“우리 입장에서도 제국은 공공의 적이잖아.”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설령 가만히 둬도 터질 일이더라도,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의 문제가 남아 있으니까.”
“…….”
“하지만, 이미 알고 있잖아? 테라 쪽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보면, 우려했던 일은 이미 현재진행형이라는 걸.”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상대를 보며 에이스가 재차 말을 잇는다.
“대장. 아니… 세논.”
“……!”
“이제 얘기해 줄 때도 되지 않았어? 지난 1년 동안 대륙을 외유하며,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를 말이야.”
작년 이맘때쯤.
자유연합의 수장인 그녀는 돌연 예고도 없이 조직 내부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는 것이야 이전에도 종종 있던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으레 몇 주야.
길어봐야 한 달이 고작이었던 외유 기간이, 무려 1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탓이다.
기실, 이건 꽤나 심각한 사안이기도 했다.
한 조직의 수장이란 자리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혹, 개인적인 이유야? 그런 거라면 더 캐묻지 않을게.”
“…아니.”
“……?”
“개인과 조직, 둘 다의 문제가 맞겠지. 분명 처음 목적은 공국의 배후에 있는 제국에 있었으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역시…….”
“한데 말이지. 캐면 캘수록 놀라운 사실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오더라고. 그 줄기들이 비교적 근래에 알게 된 사실들과 묘하게 겹치게 되면서, 나 또한 이리 갑자기 돌아오게 된 것이고.”
상대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에이스의 의문은 점차 짙어져만 갔다.
“그 근래에 알게 된 사실이라는 건 뭔데?”
“테라의 일개 아카데미 생도가 빛의 마나를 사용했다. 그걸 본 칠악은 그 아이를 최우선으로 제거하려 했다. 허나, 테라의 귀족들은 도리어 아이를 벌하려 한다.”
“…그 녀석 말이지?”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에, 에이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알면서 왜 지금까지는 티를 내지 않은 건데?”
“내 입으로 아무도 믿지 말라 해놓고, 이제 와 밑천을 드러내라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럼 처음 만났을 때 곧장 물어볼 것이지?”
“안 그래도 제자 안 하겠다 했으면 그럴 작정이었어.”
“…성격 급한 아줌마가 어련하시려고. 한데, 어째 이리될 것까지 다 예상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세논이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빛의 마나야 성장시키는 게 힘들지, 재능 자체를 타고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만(萬)의 만.
‘빛’이라는 마나를 주력으로 삼는 이들의 또 다른 별칭이었다.
만 명 중에 한 명, 오직 선택받은 이들만이 마법사가 될 수 있었고.
그 마법사들 중에서도 만에 한 명만이 빛을 주력으로 타고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보다 나는, 당시의 ‘상황’이 더 마음에 걸렸거든.”
“상황?”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
“제국과 칠악이 한통속이라는 가정하에… 하면, 제국과 오랫동안 대놓고 밀접한 관계를 이어온 마탑은 또 어떨까?”
“……!”
순간 에이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락사스를 파멸로 몰고 간 마탑 뒤에 제국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가능성은 충분하겠지. 참고로 그간 내가 알아보려 한 정보의 초점은, 요 몇 년간 제국 내부의 변화에 있었어.”
“그런데?”
“요즘. 그러니까 최근의 제국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름이 뭔 줄 알아?”
의아한 표정을 짓는 에이스를 보며 세논이 말했다.
“스노비 벨 그레이스.”
“스노비 벨 그레이스라면… 2황자?”
세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2황자는 이전까지 세간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황제의 직계만 무려 다섯.
그중 아들만 넷이다.
총명했던 1황자와는 달리, 2황자는 태생부터 몸이 약하고 우둔했다.
아니, 다른 어떤 황자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작금의 평가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단순하게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은 ‘마법사’인 그녀답게 원인이 없는 결과 또한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고.
하여, 끊임없이 의심했다.
마침내 연합으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2황자가 9살이 되던 해에 말이야. 황궁 정원 한복판에서 갑작스레 실종되는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 그것도 꼬박 하루 동안이나.”
“나도 알아. 당시 궁의 여럿이 피를 봤으니까.”
“그럼 혹, 이런 이야기도 들어봤어?”
“……?”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똑같은 존재가 있고, 혹여나 그와 마주치게 되는 자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이야기.”
재차 들려오는 상대의 목소리에, 에이스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더블워커(Double Waker)? 이 시점에서 그 이야기는 너무 터무니없는데…?”
“터무니없지 않을걸? 그건 허구가 아닌 실화거든.”
“…….”
고요한 침묵 속, 세논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도 안 난다고들 하지? 그 이야기의 최초 시발점이 ‘마계’야. 그중에서도 어느 최상위급 마족의 능력. 녀석은 대상의 외형과 냄새, 목소리는 물론이고, ‘기억’까지도 훔칠 수 있다고 알려져 있거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설마, 2황자가 그 마족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에이스의 바람과는 반대로, 이번에도 세논은 모호한 답을 내어놓았다.
“아직까지는.”
***
테라의 3대 공작가, 대 세드릭 가문의 본가.
“실비아.”
우뚝.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실비아의 걸음이 멈춰 세워졌다.
곧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상황에서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존재와 맞닥뜨렸으니까.
“하, 할아버지. 벌써 돌아오셨어요?”
“안 그래도 다시 궁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내부가 뒤숭숭한 게, 꼭 무언가 큰일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위기더구나. 에잉.”
혀를 차는 상대를 보며 실비아가 애써 미소 지었다.
“하긴… 왕국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도 이런 일은 없었으니까요. 감히 타국의 국왕이 보는 앞에서 공주를 희롱하는 황자라니…….”
“벌어진 일에 비해 생각보다 조용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만… 그보다, 네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네?”
“네가 직접 폐하께 고한 그 의견 말이다. 고위급 마법사들은 모두 통신용 수정구를 가지고 있을 테니, 한 번쯤 확인해 볼 가치가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아즈문 사트리노도 예외는 없을 거라고.”
실비아가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부터의 대답이 중요했으니까.
“네… 그랬었죠.”
“응? 이 반응은 또 뭘꼬? 혹, 아직 확인해 보지 않은 게냐?”
“…….”
찰나 실비아의 눈빛이 ‘착’하니 가라앉았다.
말을 하자니 할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이 마음에 걸렸고, 이대로 묻자니 께름칙했다.
그렇다고 애매한 답을 내어 놓았다간, 본인이 직접 확인하려 드실 테니…….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되레 쓸데없는 의심만 살 것인즉.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아니요. 확인해 봤습니다.”
“오, 그래서 결과는 어떻든?”
“아쉽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고요. 학장실을 털어간 범인이 가지고 있든, 학장님이 직접 소지하고 계시든, 그 어느 쪽이든 의미 있는 시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면목 없습니다.”
“쯧, 그게 어디 네 잘못이겠느냐? 되었다.”
“…….”
실비아가 더 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속으로는, 이걸로 됐다고 생각하면서.
손해 볼 일이 전혀 없다면, 미래를 위한 일종의 투자를 하는 편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그래도 아쉽긴 하구나. 마지막 한 가닥 남은 희망이었건만.”
“저야말로 아쉽네요. 꼭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대답과는 반대로, 속으로는 전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실비아였다.
‘세타 쿤 이그니스… 너, 나한테 또 하나 빚졌다?’
***
내가 다시 스승님의 호출을 받은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이튿날 오후였다.
이건 비밀 아닌 비밀인데.
그 하루 사이, 진심으로 심장이 떨려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상대는 한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 아니던가?
그것도 자유연합씩이나 되는, 초거대 조직의 두목.
한데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애송이가, 제자라는 이름으로 그따위 시건방진 소리를 지껄여 댔으니…….
허나, 결론적으로 이런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네 부탁 말이다.”
“네?”
“들어주마.”
“……!”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지, 진짜요?”
“그전에 네게 사과할 일이 있다만.”
“사과라면 제가 먼저 드려야 할 것 같은데…….”
가만히 머리를 긁적이는 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린 세논 스승님이 말을 잇는다.
“자세히 설명하려면 내 사연도 어느 정도 들려줘야 한다만. 그건 또 내키지 않아서…….”
“말씀해 주신다면, 귀를 씻고 경청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내가 아직 너한테 확신이 안 선다고.”
“확신이요…? 그게 무슨…….”
“제자로 받겠다 했지만, 말뿐이었다는 뜻이야. 그래서 사과한다는 거고.”
“……!”
“내가 말했지? 나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그런데 왜…?”
“제자로 받았냐고?”
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네 출신 성분과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 최소한의 자격은 갖추었다고 판단했으니까. 다른 무엇보다 네가 보인 힘이 내 흥미를 자극했고. 단지 그뿐이야.”
“…….”
“물론 지금도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어. 네가 언급한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그 기간 동안, 내가 직접 너를 경험해 보고 판단할 생각이니까. 내 얘기를 어디까지 해줄지, 또 어느 수준까지 가르침을 내려줄지.”
“저…….”
순간 뭣 마려운 사람처럼 내 입이 꿈틀거렸다.
대화가 묘하게 논점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니까.
지금 다루어야 할 주제는, 이미 얘기가 끝난 사제의 관계가 아니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달라는 것이 이 대화의 핵심이 되어야 했다.
한데 왜…?
“너, 아카데미 다닐 때 공부 못했지?”
“에… 네?”
“너는 내 제자야. 세상에 어느 스승이 제자가 해코지를 당하는 데 가만히 있냐?”
“……!”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상대를 보며, 내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애당초 네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그럴 생각이었다고. 설령 네가 내 제자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야. 그게 누구든, 내 집에 있는 동안은 절대적으로 안전할 거니까 걱정 마라. 다 물어뜯어 죽일 생각이니까.”
“…….”
“그래서 내 별명이 미친개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