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도와주세요, 스승님들
통신용 수정구.
이 아티팩트야말로, 마법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이 물건 하나만으로 대륙의 무수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실로 놀랍지 않은가?
물론 가격은 지극히도 비싸고, 수신을 받는 수정구의 고유 마나 주파수 또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제약이 따르지만.
각설하고, 나는 지금 그 마법의 위대함보다도 더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
“실비아 스필 세드릭…?”
- 이렇게라도 다시 보니 반갑네?
“네가 어떻게…….”
- 이 주파수를 알고 있냐고?
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건 학장 할아버지의 통신용 수정구였으니까.
-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어?”
- 왜 그 수정구를 네가 가지고 있는 건지.
“그건…….”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내가 머뭇거리자, 실비아가 제 어깨를 으쓱했다.
- 우둔한 건지, 멍청한 건지.
“…같은 말 아닌가?”
- 어머, 실례. 마음속으로 말한다는 게 그만.
“됐고,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니? 테라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통신용 수정구 같은 최고급 아티팩트는 100개가 채 되지 않는데. 더불어, 어지간한 고위급들의 주파수는 모두 우리 가문에 기록되어 있고.
순간적으로 내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말은…….”
- 이제 알겠지?
“…….”
- 너 진짜 뭣 될 뻔했다는 거.
“…….”
- 학장님은 실종됐지, 그분의 방은 누군가 뒤져 놓은 정황이 명백하지… 더군다나 수도 한복판에 나타난 악당들로 나라 전체가 뒤숭숭한 상황이잖아? 이러니 찔리는 사람들이 한둘이어야지.
“…그게 누군데?”
이미 알고 있음에도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의뭉을 떨었다.
- 누구긴 누구야. 나라를 외세에 팔아먹으려는 간신배들이지.
“혹, 학장 할아버지가 저들의 치부를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거야?”
- 말했잖아.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이라고. 아즈문 사트리노 학장님이 심심치 않게 거론하던 단어가, ‘앞잡이’와 ‘모리배’였으니… 그런 상황에서 그분의 물건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봐.
“음…….”
- 그보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한 번씩 보이는 멍청한 모습 때문에, 도통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
속으로는 뜨끔했으나, 여기서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하여, 곧장 화제를 전환했다.
“왜 내게 이런 사실들을 알려주는 건데?”
- 이럴 땐 고맙다는 말이 먼저 나와야지.
“…….”
이건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방금 들은 말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실비아는 내 목숨을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고마운 것과 이제부터 내가 할 부탁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그래서 미리 인사하려고.”
- 뭐?
“고마워. 덕분에, 지금부터 이쪽으로 오는 통신 마나에는 모두 반응하지 않을 생각이거든.”
- …뻔뻔하네. 괜히 노려지고 싶지 않으니, 내 입도 다물어 달라?
“그 말대로…….”
내가 채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수정구 안에서 또 한 명의 얼굴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 미안한데, 입막음은 실비아 한 사람 몫으로는 부족할걸?
“…유리나? 너도 같이 있었어?”
- 어. 어쩌다 보니? 비밀은 지켜줄게. 근데, 문제가 하나 더 있어.
“……?”
갈수록 궁금증만 커져 갔다.
저 둘이 사적인 만남을 가진다는 사실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라운데, 또 다른 문제라니?
“문제가 뭔데?”
- 우리 영지 내에서 시신이 발견됐어. 그것도 열 구씩이나.
“……!”
곧장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으니까.
“설마…!”
- 맞아. 숲 내부야.
“흉수는!? 잡았어?”
- 잡았으면 이런 말도 꺼내지 않았지.
“아…….”
내 반응에 유리나가 한층 침울해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 그날 이후, 국왕 폐하께서 친히 우리 영지에 병력을 파병하셨어. 그들로 하여금 숲 전체를 감시하게 할 목적이셨지. 혹여나 다른 칠악들이 또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거니까. 사고를 당한 병사들이 담당했던 구역은, 그중에서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던 곳이었는데…….
“거기가 어딘데?”
- …숲의 중심부야. 아직도 지면이 두 쪽으로 갈라져 있는.
“…….”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른 이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흉수는, 분명 그날의 칠악들 중 하나였다.
다른 칠악들도 용의 선상에 있었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동료를 찾는 것’이 목적인 그들이 구태여 살인과 같은 눈에 띄는 행동을 벌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저 적당히 동향만 살피다가 떠났겠지.
하니, 그들이 맞다.
아니, 그들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학장 할아버지 또한 살아 계실 테니까.
- 왜 나는 시신 말고는 다 처음 접하는 얘기일까나?
- 어차피 궁의 소식은 나보다 네가 더 빠를 텐데 뭘.
- 그래서, 내가 당연히 알 거니까 얘기도 하지 않은 거다? 벌써부터 이런 식이면, 나도 이 만남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 에이, 왜 또 그러냐. 이제 착실하게 공유한다니까?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시신에 남아 있던 흔적은 상당히 깔끔한 ‘검상’이었어.
상념에 빠져 있던 내 고개가 발딱 치켜 세워졌다.
“검상?”
- 중요한 건, 흉수는 분명 한 명으로 추정되는데, 시신들에 남아 있는 검흔은 전혀 다른 두 개의 검로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이야. 좌수(左手)와 우수(右手)에게 베인 흔적, 둘 모두가 보인다고 해야 하나?
“…….”
- 혹, 짐작 가는 사람 있어?
마침내 유리나가 말을 마치자, 나와 실비아가 동시에 눈을 빛냈다.
“그 사람이야.”
“그 사람이네.”
***
테라 왕국과 스왈로우 제국의 국경지 인근.
저벅, 저벅, 저벅.
보이는 것이라곤 허허벌판뿐인 그곳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모여 있던 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멀쩡하잖아? 대공.”
“찾아놓으라던 정보는?”
“쳇. 곧장 본론이야? 어찌 이리도 삭막한지.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동료인데.”
“잡설은 그만하고.”
“네네. 안 그래도 이미 대령해 뒀네요. 그 아이, 마지막 흔적이 스란이더라?”
입을 삐죽 내밀며 답하는 서큐버를 보며, 새로이 나타난 백발 인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스란 공국? 거긴 왜?”
“나야 모르지. 흔적만 쫓으라며?”
“…이해할 수가 없군. 분명 스란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을 텐데…?”
“궁금하면 더 알아볼까?”
서큐버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반문했다.
그녀의 흑마법은 여러모로 유용했다.
저주로 목표한 이의 생을 옭아매고.
대상을 매혹시켜, 한낱 꼭두각시로 전락시키기도 하며.
하물며 먹잇감에게 그녀만의 흔적을 남겨, 추적하는 일에도 능했으니까.
“…아니. 그거면 됐어. 나머지는 내가 하지.”
“그래, 그럼. 근데 나도 하나만 물어도 될까?”
“……?”
“다른 애들은 보이질 않아서. 혹시 죽은 건 아니지?”
서큐버의 물음에 백발 인영이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어. 지면 밑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권능의 힘을 사용했으니까. 다만 지금은 오지 못할 거다.”
“응? 살아 있는데 오지 못한다니?”
“그 권능이 레이지의 환몽(幻夢)이니까.”
“아하.”
서큐버가 곧바로 알겠다는 듯 손뼉을 쳤다.
나태의 권능, 환몽(幻夢).
이 안에 갇힌 이는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전까지 바깥세상으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본래 환몽은 적의 정신부터 붕괴시켜 놓기 위한 권능의 일종이었다.
그곳에서 받는 피해는, 대상자에게 곱절을 훌쩍 뛰어넘는 고통을 선사했으니까.
다만 권능의 주인이 살의를 품지 않는다면, 그저 그런 감옥에 지나지 않았다.
“이해했어. 그 안에서 다른 출구를 찾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능력 있는 우리 대공과는 달리 말이야. 그러니 혼자서 다~ 해보겠다는 걸 테고…….”
“…차라리 제국을 움직이는 건 어때?”
움찔.
순간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자, 거짓말처럼 백발 인영이 움직임을 멈췄다.
“제국?”
“외부에 노출된 건 비단 우리뿐만이 아닐 텐데?”
“…나는 괜찮다.”
“구태여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알다시피, 스란은 이미 이쪽의 영역이나 다름없으니까.”
“…….”
“한 가지 더. 근래 황제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나 또한 어느 정도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거든.”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백발 인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자세히 얘기해 봐. 그건 이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아아, 걱정할 것 없어. 아직은 크게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니까.”
“…너니까 다 생각이 있겠지. 우리 중 누구보다 똑똑한 너라면.”
“과찬이야.”
“믿겠다.”
단번에 납득한 백발 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커다란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하면 그쪽은 부탁하겠다, 스노비.”
“나한테 맡겨둬.”
***
온종일 생각했다.
지금의 내가,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작해야 열여섯 먹은 코흘리개인 나.
그런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이 과연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종류의 것들인가?
그게 아니라면, 누구에게 어느 선까지 공유해야 할까?
“끙…….”
아무리 생각해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끙끙 앓고만 있을 수는 없는 법.
꼬박 반나절 동안 이어진 고민의 결과물은, 이것이었다.
“도와주세요.”
“……?”
밑도 끝도 없는 내 말에 두 스승님의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제가 누군가에게 노려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
“뭔 헛소리야? 누가 누구한테 노려져?”
“스승님은 어느 정도 알고 계시죠? 제 사정에 대해서요.”
내 시선을 받은 에이스 스승님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혹, 칠악이냐?”
“칠악…? 아, 그 녀석들. 감히 테라 한복판에서 깽판을 치고 다녔다지?”
“대장, 이건 생각보다 더 심각한 문제야. 자세한 얘기는 더 들어봐야 알겠지만.”
“하긴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그쪽 대가리는 조금 까다로웠지 아마?”
순간 내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 그와 만난 적이 있으세요?”
“아주 오래전에 잠깐?”
“그게 언젠데요?”
“보자… 한 20년은 됐으려나?”
“……!”
깜빡했다.
내 스승님이, 실은 반백 살을 훌쩍 넘은 할머니라는 사실을.
그보다 이 말인즉, 상대 또한 최소 스승님과 비슷한 연배라는 뜻이 아닌가?
판단에 확신이 생겼다.
허나, 이즈음에서 나는 또 한 번 고민에 빠졌다.
과연 스승님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어느 선까지 말씀을 드려야 할지.
“…….”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과거 학장 할아버지의 언행을 미루어 최소한 눈앞의 스승님들은 적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제국이 본격적으로 대륙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어요. 무슨 연유에서인지, 칠악은 그런 그들을 돕고 있고요.”
“……!”
“둘 사이에는 분명 모종의 관계가 있어요. 아즈문 사트리노 학장님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이고, 제 눈으로 직접 확인도 했구요.”
“밀월 관계라… 하면, 칠악은 그걸 눈치챈 너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냐?”
굳이 아이리스의 조각에 대한 언급은 불필요했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욱이, 단순한 의뢰 관계는 아니라고도 하셨어요. 학장님은 무려 황족 중 하나가 칠악과 큰 연관이 있을 거라 의심하고 계셨으니까요.”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왜 너를 도와줘야 하지?”
“…네?”
이런 반응은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내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건 다른 스승님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 대장?”
“보면 알잖아? 이 녀석. 아직 무언가 숨기는 게 더 있어. 제자 주제에 건방지게 말이야.”
“사, 사정이 있겠지. 어차피 우리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던 사실인데, 일단은 얘기를 더 들어봐야…….”
여기까지 대화가 이루어졌을 때, 나는 곧장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이건 최소한의 안전장치에요.”
“뭐?”
“스승님께서 제게 가르치셨잖아요? 뒤통수에는 눈이 없는 법이라고.”
“……!”
내 반응 또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는지, 두 스승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하여, 불민한 제자는 지금부터 아무도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 대상이 설령 스승님들일지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