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44화 (44/251)

44화. 수련(4)

자유연합 본사가 위치한, 대륙 유일의 공국.

스란.

역사적으로 이곳은, 제국의 오랜 속국으로 취급되어 왔다.

지리, 문화, 환경 등.

대륙의 그 어느 나라도, 스란만큼이나 제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란을 건국한 초대 공왕은 제국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제국의 권력다툼이 가장 격렬하던 건국 초창기, 황족 중 한 명이 나라를 탈출했다.

가장 세력이 약하며,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았던 7황자.

초대 공왕이기도 한 그가 바로 현 스란 왕조의 뿌리였다.

역사가 이렇다 보니, 스란 또한 과거부터 귀족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해 왔다.

한쪽은 친 제국파로.

다른 한쪽은 반 제국파로.

물론 전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근래의 스란은 바뀌었다.

전대부터 공왕 스스로 직접 나서 독립을 외치고 있었으니까.

비슷한 시기에 덩치가 커져 조직의 새로운 본거지를 찾아 헤매던 자유연합과는, 이해관계가 완전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연합은 유사시 공국에게 도움을.

공국은 연합에게 세금을 포함한 각종 특혜를 제공하기로 한 상호조약도 이 무렵에 체결되었다.

한데, 언젠가부터 공국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갑작스레 연합을 상대로 세금을 대폭 올리는가 싶더니, 줬던 특혜들마저 하나둘 회수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노골적으로 탈세 방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연합 본사에 감사단을 파견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자유연합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연합주는 직접 대륙을 돌며 총력을 다해 그 연유를 밝혀내고자 했다.

혹여나 공국 내부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놀라운 가설이 하나 등장했다.

바로, 현 공왕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제국에서 은밀히 파견한 흑마법사의 저주로 인해서.

근래에 칠악과의 관계가 재조명되면서 그 가설은 힘을 더하고 있었다.

색욕을 담당하는 5번째 죄악은, 당대 최고의 흑마법사로 명성이 자자했으니까.

당장 스란 하나만 해도 이처럼 골치가 아픈데, 이제는 그리 멀지 않은 테라마저 난리였으니…….

우뚝.

한참 상념에 빠져 있던 에이스가 걸음을 멈췄다.

“…이러면 내가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는데?”

자체 게이트가 설치된 제3 건물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서문(西門)에 이르렀을 때였다.

“뭐가?”

“방금 세실리아를 대장에게 보냈거든.”

“귀찮은 일은 항상 걔한테 다 시키지?”

“그러라고 나한테 맡긴 부하 아니었나?”

휘리릭!

에이스의 대답과 동시에, 나무 위에서 한 인영이 사뿐히 착지했다.

웨이브 진 긴 금발에 이지적인 외모를 가진, 기껏해야 서른은 넘기지 않았을 법한 여인이었다.

전형적인 여우상인 그녀는, 얼핏 누군가와 그 외모가 상당히 닮아 있었다.

“얘기는 들었어. 제법 재미있는 일을 꾸민다지?”

“나도 궁금한데? 우리 대장이 무슨 얘기를 들었기에 모처럼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제자를 받는다며? 그것도 검사도 아닌 마법사를 말이야.”

에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아직 확정된 일은 아닌데…….”

“사실이기는 한가 보네?”

“응. 근데 생각 좀 해봐야겠다네.”

“뭐야. 설마 거절당한 거야? 네가?”

여인이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곧 그녀의 눈꼬리가 완만하게 반달을 그렸다.

“이거 진짜 재미있는데? 대체 어떤 꼬맹이길래, 그 위명도 자자하신 에이스 디 파르마 님의 제자 자리를 뻥 하니 걷어찰 수 있는 걸까나?”

“그만큼 내 안목이 뛰어나다는 것 아니겠어? 평범한 놈은 내 쪽에서 사양이거든.”

“그럼, 내가 한번 꼬드겨 볼까?”

줄곧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에이스의 인상이 대번에 찡그려졌다.

“양아치 짓은 하지 말자. 대장.”

“에이, 뭘 정색까지야. 거국적으로다가,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연합의 인재를 키우는 일인데, 막말로 마법사 꼬맹이를 상대로 네가 뭘 가르칠 수 있는데?”

“그거야…….”

곧바로 대답하려던 에이스가 멈칫했다.

그제야 그도 자각한 것이다.

그 아이에게 자신이 과연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때 받은 특유의 느낌 탓에, 순간적으로 욕심이 들어 건넨 제안이기는 한데…

“너는 사실 내 뒤를 이을 엄청난 재능이 있으니, 지금이라도 마법 따위는 집어치우고 검사의 길을 걸어라? 이렇게라도 제안해 보게?”

“…바람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보려고.”

“뭐? 듣자 하니, 바람계열 마법사도 아니라고 하던데…….”

“그 아이, 몸 안에 ‘태초의 마나’를 품고 있었어.”

“……!”

이어지는 에이스의 말에 여인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진짜야?”

“내가 대장한테 거짓말을 왜 해?”

“차라리 제노스인가 하는 그 자식을 데려오면 어땠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잖아?”

“애초에 나는 이미 완성된 작품에는 관심 없거든.”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하는 에이스를 보며, 여인이 피식 웃었다.

“밑에 애들한테는? 알아듣기 쉽게 설명도 잘해뒀겠지?”

“그쪽은 안 그래도 세실리아한테 부탁해 뒀지.”

“어이구. 걔도 참, 상관 하나 잘못 만나서 무슨 고생인지.”

“나 정도면 최고의 상관이지. 언니 하나 잘못 만나서, 평생을 고생한 걸 생각하면 말이야.”

여인의 이마에 희미한 십자 마크가 아로새겨졌다.

“까분다?”

“이런. 이 정도는 부하의 소심한 복수 정도로 생각해 달라고.”

“복수는 뭔 놈의 복수?”

“대장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 업무는 모조리 내가 떠안았다니까?”

“나는 뭐, 어디 놀러 다녔냐?”

“…소득은 있고?”

순간 에이스가 진지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기로 하고, 그래서 어떨 것 같은데?”

“뭐가?”

“세타인가 뭐시긴가 하는 그 애. 백만 분의 일의 가능성을 가진, 축복받은 체질을 타고 태어났다는 건 잘 알겠거든? 근데, 그걸 담을 그릇은 또 별개잖아?”

“재능을 말하는 거야?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윽고 상대를 똑바로 마주 바라본 에이스가 씨익 미소 지었다.

“최대로 잡으면, 내가 아는 부하 직원의 언니 정도?”

***

털썩.

배정된 숙소로 돌아온 즉시 침대에 몸을 던진 나는 다시금 떠올렸다.

학장 할아버지가 남겼던, 예의 편지의 내용들을.

제국의 야욕이니, 왕국 내에 산재한 변절자가 누구니.

그런 큼지막한 얘기들은 일단 뒤쪽으로 미루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의 나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쩔그럭.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지금 내 목에 걸려 있는 이것.

‘아이리스의 목걸이’에 관한 내용이었다.

게으른 성격과는 달리, 머리는 또 나쁘지 않은 나다.

곧 한 번 본 내용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내 두뇌가, 그날의 활자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이리스의 목걸이는 총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조각조각마다, 오래전 지룡(知龍)으로 이름을 날린 아이리스의 지식들이 잠들어 있지. 만약 이것이 세상에 밝혀지게 되면, 당장 대륙 전역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보물이다. 고대의 지식만으로도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날 정도인데, 무려 ‘드래곤의 지식’이라니…….’

여기까지만 읽었을 때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전 생의 기억을 일부 가지고 있는 나야, 목걸이의 유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지만.

인간인 학장 할아버지는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었을까?

‘…허나, 단순히 목걸이를 완성 시킨다고 드래곤의 지식을 백 퍼센트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조각은 개개의 자아를 가지며, 사용자의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제 지식을 허락지 않으니까. 이것만 봐도, 드래곤이 다루는 마법은 이미 신의 영역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건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그 안에 든 지식의 수준이 너무나 높아, 섣불리 탐하려 하면 어지간한 사용자들은 그대로 폭주하고 말 테니까.

당장 두 번째 조각을 해방하는 데 필요한 최소 조건이 인간을 기준으로 5써클 마스터였다.

“꿈에 의존하지 않고, 전생의 기억과 지식들을 얻는 방법은 역시…….”

꿀꺽.

어느새 목걸이를 풀어낸 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미뤄왔던 일을.

첫 번째 조각을 해방시킬 순간이 왔으니까.

현재의 내 수준으로는 딱 이 정도가 한계였다.

설령 이게 전생의 내 물건이라 하더라도, 이후에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는 나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이전 생에 대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극히 일부였다.

그마저도 지금의 나는 어디까지나 ‘인간’ 세타였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이 이상 미룰 수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차가운 대지 아래에 갇혀 있을 학장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자, 그럼 이제…….”

쿵, 쿵, 쿵.

그때, 귀신같이 누군가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 내가 곧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지체 없이 방문을 열어 젖혔다.

가장 먼저 우르르 몰려들어 있는 몇 명의 아이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이것, 꽤나 익숙한 장면인데…….

“테라 아카데미에서 왔다지?”

선두에 선 아이들을 이끄는 골목대장임이 분명한 단발머리 녀석이 말했다.

브라운 계열의 그 중성적인 외모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어. 근데, 이런 곳에도 또래 친구들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연합 내에도 교육 시설은 있으니까. 물론, 테라 정도 되는 국가기관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어림잡아 오백 명 정도 되려나?”

상대의 말과 달리, 오백이라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국가도 아닌 일개 조직이 키우고 있는 인재들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그중 절반이 에이스 님을 추종하는 아이들이지.”

“그 변태 아저씨?”

“…이곳에서 에이스 님을 그리 부르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그럼 나머지 절반은 뭐 하는 아이들인데?”

“뭐겠어?”

도리어 반문하는 단발머리 아이를 보며,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저씨가 여기 두 번째라고 했으니까, 대장은 따로 있겠네?”

“그래. 나머지 절반은 연합주 님을 흠모하는 아이들이다. 하면 문제를 하나 더 내볼까?”

“문제?”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향해, 단발머리 아이가 계속해서 말했다.

“근 수년 동안 제 우상 하나만 바라보던 이백오십의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꿔다 놓은 보릿자루보다 못한 신세가 됐어.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개뼈다귀 같은 놈이, 그들이 바라마지 않던 자리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지.”

“……?”

“심지어 그 개뼈다귀는 나라를 팔아먹고, 제 은사의 목숨까지 희생시켜 가며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 실력은 쥐뿔도 없는 낙제생 주제에 말이야.”

여기까지 들었을 때, 떠오를 듯 말 듯하던 내 기억도 완전히 생각났다.

으레 아이들이 모인 곳은 어찌 이리도 똑같은지.

“…그거, 혹시 내 얘기하는 건가?”

내 물음에 예의 단발머리 아이가 생글거리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영 바보는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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