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수련(3)
실비아의 말과는 달리, 왕궁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스노비 황자 저하의 개인 호위들이… 자국 내에서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
전령의 보고에 놀라움도 잠시.
자칭 친 제국파들이 가장 먼저 목청을 높였다.
“어찌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당장 조사에 착수해야 합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라니요!”
“모든 게 세타라는 그 아이 때문입니다! 괜한 말들을 지껄여, 나라 내의 불순분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으니…!”
재차 이어지는 귀족들의 반응에, 우르고스 국왕이 작게 중얼거렸다.
“제 소신을 떳떳이 밝히는 일을, 경들은 불미스럽다 표현하는군.”
이번에도 귀족들은 즉각 반응했다.
“그게 아닙니다, 폐하. 소국이 대국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도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건, 소신이 아니라 고집입니다.”
“더욱이 그 아이는 스스로 제 국민성을 부정하였지 않습니까?”
“천지 분간도 못 하는 애송이입니다. 당장 잡아들여, 삿된 꿍꿍이를 품고 있는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줘야 합니다! 물론, 조사단은 별도로 구성하구요!”
지금 우르고스 국왕의 마음속은 착잡함만이 가득했다.
테라는 대대로 왕권이 강한 나라였다.
‘과거’에는 말이다.
그게 당대의 3대 공작가가 들어서게 되면서, 상당 부분 힘의 균형이 맞춰졌다.
그리고 뜬금없는 황자의 등장으로, 그 세가 완전히 기울게 되었으니.
지금까지야 그동안의 권세를 이용해 간신히 찍어 누르고 있었지만, 작금의 저들은 물을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
저들을 보라!
제국의 눈치를 살피며 꼬리를 흔들어대고, 한낱 어린아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하자고 하지 않는가?
아직 사건에 대한 정확한 진위조차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훗. 그런다고 눈 하나 꿈쩍할 내가 아니지만.’
허나, 우르고스 국왕에게는 달리 생각이 있었다.
실비아 스필 세드릭.
그 영민한 아이가, 이번 일에 대한 묘안을 던져 주고 갔으니까.
황자의 호위 살해 사건과는 별개로, 그는 이미 이전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별도의 조사단을 꾸려, 이번 일에 대한 원흉을 철저히 밝혀내겠다.”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폐하!”
“그리고… 전령은 지금 당장 레이지 공주를 불러오도록.”
“…예?”
이번에는 귀족들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폐하. 갑자기 공주님은 어찌…?”
“지금 그 아이의 의견이 꼭 필요하니까.”
딸만 셋을 가진 우르고스 국왕은, 그중에서도 특히 레이지 공주를 아꼈다.
말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 차별되는 특혜도 줬다.
댸표적인 예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을 허락한 일.
혼기가 차면, 공주는 응당 혼인을 치러야 했다.
소위 얘기하는 정략결혼, 다시 말해 부군이 될 이를 간택하는 거다.
현재 아카데미 다니고 있는 카이클 가문의 후계나, 비교적 근래에 졸업한 인버스 가문의 장남은, 그가 가장 눈여겨보고 있던 부군 후보들이었고.
허나, 앞서 언급했듯 우르고스 국왕은 딸을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라도 본인이 직접 선택한 이를 짝지어 주려고 했으니까.
그게 시작부터 이리 꼬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세타 쿤 이그니스. 그 아이를 공주의 부군 후보로 임명하지.”
“……!”
그야말로 폭탄을 넘어선, 메테오 급 발언에 귀족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폐, 폐하?”
“왜? 이도 안 된다고 할 텐가? 어차피 경들은, 권세 있는 가문과의 혼약으로 왕권이 강화되는 것은 원치 않을 텐데?”
“그건…….”
우물쭈물하는 귀족들을 향해, 우르고스 국왕이 쐐기를 박는다.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충민을 지키고픈 내 마음과 왕권을 약화시킬 천재일우의 기회가 생긴 자네들의 이해관계가, 지금 딱 맞아떨어지지 않나?”
“…….”
이제 대전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말게. 만에 하나 공주나 그 아이. 당사자 중 누구라도 싫다 한다면, 곧바로 무를 생각이니까.”
“…….”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니까, 이 정도 기회는 줘도 괜찮겠지?”
완전히 입을 다문 대전 내의 귀족들을 보며, 우르고스 국왕이 피식 미소 지었다.
저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였으니까.
만약 여기서 그러십시오 대답한다면, 제 말을 스스로 모순하는 격이었으니, 끝까지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 것이겠지.
속으로는 좋아 죽겠으면서도 말이다.
허나, 그런 우르고스 국왕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하나 있었으니.
정작 당사자인 세타가 이미 나라를 빠져나갔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모르는 그였다.
***
번-쩍!
“왔니?”
마치 허공에 붕 뜨는 듯한 느낌도 잠시.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여전히 지적인 분위기로 미소 짓고 있는 세실리아와 그 곁에 선 반라의 미남자가.
“…그냥 제가 웃옷 하나 사드릴까요?”
“여기도 있었군.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햇병아리가.”
“예술?”
“이 예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가장 큰 죄악이 아닐까?”
두 팔을 활짝 펼친 상대가, 제 근육을 그대로 내보였다.
물론 더 들어줄 가치도 없었기에, 곧장 내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국경을 이렇게 쉽게 넘어올 수 있을 줄은 몰랐네요.”
“나도 깜짝 놀랐어. 말이 나와서 묻는 건데, 세드릭 가문의 아이와는 무슨 관계니? 혹시 여자친구?”
“무슨 그런 섬뜩한 말씀을.”
“그래? 아무튼, 그 아이가 따로 힘을 써줘서 일이 잘 마무리됐어. 알다시피, 대륙에 산재한 워프 게이트의 지분권 중 절반은, 세드릭 가문에서 쥐고 있잖니? 테라 내의 게이트로 한정하면, 백 퍼센트 그곳에서 관리하고 있고.”
세드릭 가문이 일약 대륙 구로 평가받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게이트를 이용한 워프 마법을 상업화시킨 건, 모두 마탑과 세드릭 가문의 작품이었으니까.
“서론은 이만하면 됐고. 이제 심경에 변화가 생긴 이유를 말해보실까?”
“지저 세계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요.”
이미 소식이 전해진 것일까?
내 대답에, 에이스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범위 내고. 그리고?”
“3년 뒤에 있을 마법 대전. 거기서 이름을 날려 마탑에 들어가고 싶어요.”
“…입탑 시험은 언제든지 열려 있는 것으로 아는데. 왜 굳이 마법 대전을 노리는 거지?”
“그렇게 들어가면, 소속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제 발로 마탑에 들어가는 것과 스카웃되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전자의 경우, 오직 마탑만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서약서까지 써야 할 정도였으니까.
허나, 후자는 그런 게 없었다.
여러 가지 제약들이 전자에 비해 훨씬 덜하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든 마탑을 나올 수도 있었고.
“알만하군. 허나,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닌데…….”
“네?”
“결국, 네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닐 것이라는 뜻이 아닌가? 설령 그것이, 내 소중한 이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말이다.”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그런 박쥐류는 태생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서. 더불어, 네 말에는 큰 오류가 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나를 향해, 에이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전제다. 아즈문 사트리노 학장님이 3년 동안 그 아래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대전제 말이다.”
“그건 당연한 거고요. 그리 생각했다면, 구태여 번거롭게 이 머나먼 타국까지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기도 하고요.”
“…건방진 놈.”
순간 에이스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감히 내 앞에서 이리 건방을 떨어댈 수 있는 존재는, 단언컨대 셋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허나, 상대의 으름장에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만하지 않나요?”
“…뭐라고?”
“쉽게 가죠.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하세요. 머지않은 미래에 대륙 최고의 마법사를 얻는 건데, 그 정도 투자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
***
이윽고 세타가 임시 숙소로 안내되고, 둘만이 남게 된 공간.
“역시 재미있는 녀석이야.”
상념에 빠져 있던 에이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화나신 것 아니었어요?”
“전혀. 자고로 내 제자라면, 저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겁이 없는 것 아니구요?”
“어느 쪽이든, 재미있는 건 사실이잖아? 그보다 세실리아. 수장한테는 네가 보고 좀 해줘.”
“네? 연합주님에게요?”
세실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아. 이미 대충은 알고 있을 거니까. 알다시피, 자체 워프 게이트를 개방하는 최종 결재권자는 그 사람이라고?”
“자, 잠깐만요. 에이스 님이 연합주 대행으로 결재하신 것 아니었어요?”
“본인이 버젓이 와 있는데 내가 왜?”
“……!”
이번 대답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세실리아가 작게 입을 벌렸다.
“그, 그러니까 지금 연합주님이 이곳에 와계신다는 말씀이세요?”
“응.”
“말도 안 돼! 꼬박 1년 만에 돌아오셔 놓고, 연합에는 코빼기도 안 비추고 계신다고요?”
“그 인간이 그러는 거 한두 번 있는 일인가. 아 참, 그리고 아래 솜털들한테는 알아듣기 쉽게 설명도 좀 잘해주라. 싸움 날라.”
“아, 아니. 잠깐만요, 에이스 님!”
언제나처럼, 곤란한 일은 모두 자신에게 떠넘기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세실리아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
자체 워프 게이트가 개방되었다는 소문은, 금세 연합 전체를 뒤덮었다.
“소식 들었어?”
“응. 근 3년 만이지? 게이트가 열린 거.”
“연합주님의 친우이신, 5월의 주인이 마지막이었지, 아마.”
“기대되네. 이번에는 어느 귀인이시래?”
“듣기로, 에이스 님이 직접 선택한 제자를 불러들이기 위해서라고는 하던데…….”
“뭣!? 그게 진짜야?”
대체로 흥분한 사람들과 달리, 건물 한편에는 그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 1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네 명의 아이들은, 사뭇 심각해 보이기까지 했다.
“…에이스 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외유를 나가셨다가, 우리와는 다른 ‘진짜’ 재능을 발견하신 거겠지.”
“웃기지 마. 당장 연합 내에는, 에이스 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온 아이들이 최소 수백은 돼. 한데, 그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으시면서 구태여 외부에서 제자를 수급한다고?”
아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전설을 써내려 간 그의 일대기를, 수많은 아이들이 흠모하고 있었으니까.
“그뿐이면 다행이게?”
이번에는 인기 꽤나 있을 법한 양 갈래의 여자아이가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뭐가?”
“신빙성 있는 소식통에 의하면, 그 제자가 검사도 아닌 마법사라고 하더라. 이게 말이 되니?”
“지, 진짜야?”
“그래. 그것도 바람 계열 마법사면 말도 안 해! 검술은커녕, 바람과는 쥐뿔도 관련 없는 자식이 제자라니…….”
휘오오오오!
“꺅!”
때마침, 여자아이 주변으로 갑작스레 광풍이 휘몰아쳤다.
아이들의 얼굴 위로 점차 의문이 떠오를 무렵.
얼마 지나지 않아, 예의 바람의 진원지가 밝혀졌다.
“세디스?”
얼핏 보면, 성별조차 분간되지 않는 단발머리 아이였다.
“어렵게 생각할 것 있어? 만약 사실이라면, 쪽 한번 주고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면 되지.”
“어떻게?”
“간단하잖아? 환영회를 겸해서, 그 누구라도 납득할 정도로 짓이겨 놓는 거야. 물론, 에이스 님의 주무기인 검술과 바람으로.”
멍하니 굳어 있던 아이들이 그제야 악동과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 재미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