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수련(2)
테라의 수도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여관.
“뭘 가지고 온 거지?”
“예? 그, 그게 그러니까…….”
장발 사내의 물음에, 힐끗 서로의 눈치를 살핀 두 기사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고작해야 10대 중반쯤 됐을 법한 사내아이가 시야로 들어왔다.
“너… 정말로 세타 쿤 이그니스가 아닌가?”
“그러니까 나 아니라고 했잖아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한데 왜 그 방에 있었느냔 말이다!”
“제 방에 제가 있는 게 뭐가 어때서요?”
“네 방…?”
“아카데미는 기본적으로 2인 1실이라고요. 나는 걔 룸메이트라니까요? 어휴, 답답해서 진짜!”
가슴까지 탕탕 쳐대며 대답하는 사내아이의 말에, 이내 두 기사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되면, 명백한 그들의 실수였으니까.
“죄송합니다, 저하!”
“죽여주십시오, 저하!”
곧 두 기사가 바닥을 향해 오체투지했다.
“저하…?”
이에, 사내아이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
“……!”
“다만 성인이라면, 자랑스러운 내 기사들이라면, 응당 그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있어야겠지?”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두 기사가 움찔 몸을 떨었다.
직후, 그들의 행동은 실로 놀라웠다.
“…분부대로.”
스르릉.
순간 무언가의 쇳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제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곧이어, ‘서걱’하는 섬뜩한 파육음이 뒤를 따랐다.
솟구치는 핏물은 땅을 적셨고.
후두둑.
“……!”
바로 앞에 있던 사내아이 또한 그 핏물을 그대로 뒤집어썼다.
예의 두 기사는 물론이고, 뒤쪽에 자리한 그들의 상급자까지.
모두가 검을 뽑아, 스스로 제 목을 내리그은 결과였다.
“이, 이게 무슨…….”
그건,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특히나 아직 어린 사내아이에게는 더더욱.
파르르르.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아이의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려댔다.
곧 다섯이나 되는 복면인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세 구의 시신을 들춰 매고 사라졌다.
단 한 명의 복면인만 제외하고.
“깔끔하게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아니.”
“…예?”
“그냥 근처 적당한 곳에 버려두도록.”
이어지는 스노비 2황자의 말에, 복면인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훗. 이유는 묻지 않는 건가?”
“생각은 머리가 하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저는 단지, 저하의 명을 따르는 도구일 뿐입니다.”
“외부인도 있는데 이래서야 원. 내가 꼭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지 않은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린 사내가 곧장 손을 휘저었다.
“이 정도 어설픔이라면 누군가에게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나? 더욱이, 감히 타국에서 건방을 떤 망나니 황자 놈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 라는 그림도 썩 괜찮을 것 같고.”
“예. 모든 건 저하의 뜻대로…….”
“쯧. 참 재미없군.”
“죄송합니다. 하면, 이 아이는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움찔.
한없이 떨려대던 사내아이의 몸이 거짓말처럼 멈춰졌다.
“죽여야지.”
“알겠습니다.”
숨을 죽인 채 대화를 듣고 있던 사내아이가 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자, 잠깐만요! 왜 갑자기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죠?”
“첫째. 목격자가 많아 봐야 내 일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아마도 너는 지금쯤 내 정체를 짐작했을 터. 마지막 세 번째. 나는 지금 아랫것들의 헛짓거리에 대단히 화가 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은… 그리 감정적인 이유로 어찌 사람을…!”
“왜? 너를 죽여야 할 이유로 부족한가?”
“……!”
사내아이는 자신의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허나, 이대로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복면인의 서늘한 눈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내, 내가 누군지 알아요? 후회할 짓 하지 말아요!”
“글쎄. 네가 누구라 한들, 내 생각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바이커 론 인버스라고요! 이 나라의 3대 공작가 사람이라고!”
우뚝.
발악처럼 외친 그 고함소리와 동시에, 거짓말처럼 복면인의 살기가 사라졌다.
“인버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메이저 론 인버스. 아마도 그의 혈육인 듯합니다.”
예의 복면인의 부연설명에, 스노비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호오, 녀석의? 그러고 보니 닮았군. 특히 눈매가. 이런 모지리가 자식으로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하기야 워낙 제 가족사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인물이니…….”
“그의 자식은 둘이 맞습니다. 그중에는 분명 바이커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도 있고요.”
“음…….”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스노비가 이내 ‘쯧’ 하고 혀를 찼다.
“…같은 편을 공격할 수는 없지. 보내주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곧 우악스러운 손길이 바이커를 덮쳤다.
“자, 잠깐만. 절 어디로 또 데려가시는 건데요?”
“조용히.”
“……!”
“오늘 보고 들은 건 모두 잊어라. 하면 집으로 데려다주지.”
“그건…!”
이런 종류의 대화를 흘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커와 복면인이 완전히 사라졌다.
곧 스노비의 등 뒤로 새로운 두 인영이 더 나타났다.
“저대로 보내줘도 괜찮겠어?”
“못 보내줄 이유라도 있나?”
“호호. 하긴, 돌아가면 제 집에서 볼기짝이라도 맞으려나?”
무척이나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적발의 미녀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대공은?”
“전혀.”
“…곤란한데.”
“그보다 스노비. 황자 놀이가 썩 익숙해졌잖아?”
순간 그 풍만한 가슴을 흔들어 대며 엉겨 붙은 여인이 눈웃음을 쳤다.
“나도 황녀 한번 시켜주라. 아니, 기왕이면 황후로!”
“쓸데없는 소리.”
“흐응, 왜? 마음만 먹으면, 황제라는 인간도 금세 내 품에서 주무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 호락호락한 인간이었다면, 진즉 내가 나라를 삼켰겠지.”
“대단하신 그 스노비 님이시니까?”
“더 이상 논점을 흐리지 마라, 서큐버(Succubu).”
스노비의 반응에,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네. 하지만 정말로 딱히 해줄 말이 없는걸. 아무리 뒤져 봐도, 대공은커녕 다른 애들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으니까. 흔히 그리들 말하잖아?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 수가 없다.”
“…….”
“한데, 이 경우에는 진짜 땅으로 꺼졌네?”
“…머리에 먹을 것과 싸움밖에 들어 있지 않는 럼프나 지로시는 이해할 수 있어. 제법 두뇌가 잘 돌아가는 레이지가 당한 일도, 상대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하지만 대공은 아니야.”
“뭐, 전투능력만 따지면 대공은 앤그리와 더불어 우리 중 최강이니까.”
흥미를 잃었는지, 여인이 제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곤 하늘을 올려다봤다.
“특히나, ‘권능’의 힘을 사용한다면 생존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테고.”
“하지만 권능의 사용은 대공 스스로가 엄격하게 금해왔는걸?”
“그건 혹여나 중간계의 초월자들이 눈치챌까 염려하여 만든 규칙이다. 당장 우리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도 붙잡고 있을 룰은 아니라는 뜻이지. 더군다나 대공의 능력을 생각하면…….”
“절대적으로 살아 있을 거다?”
한차례 고개를 주억인 스노비가 눈을 빛냈다.
“앤그리.”
직후,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또 다른 인영이 반응했다.
“임시 수장 자격으로, 권능의 힘을 허락할게.”
“……!”
“그들에게 들켜도 상관없다. 반드시 대공을 찾아내 줘.”
이윽고 눈을 감고 있던 인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
수도 중심지에 위치한 워프 게이트.
일반 서민들은, 이 게이트를 이용할 생각을 꿈도 꾸지 못했다.
일회성 이용 가격이 어지간한 4인 가족의 몇 달치 생활비에 달했으니까.
허나, 지금의 내게 돈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학장 할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이 있었으니까.
다만, 그게 금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통짜 금괴를 거슬러 받는 것도 마땅치 않고, 우선 이걸 현물로 바꿀 방법부터 찾아야 하는데…….’
몇 번이나 생각해 봤지만, 이 문제만큼은 쉽지가 않았다.
어린아이가 이런 금괴를 바꾸고자 한다면, 당장에 표적이 되기 쉬웠으니까.
더군다나, 출처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더 큰 문제로 불거질 가능성이 농후했고.
“역시 여기로 올 줄 알았지.”
“……!”
그 순간, 귀청을 때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내 고개가 전방을 향했다.
“실비아…?”
“그 황자 앞에서도 당당하게 이 나라 사람 안 하겠다던 미친놈.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뭐?”
“조급한 거지? 혹시나 소중한 사람을 이대로 잃게 될까 봐.”
“…….”
재차 들려오는 실비아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한 내가 곧 물었다.
“…나 가고 나서 별 일 있었냐?”
“글쎄? 귀족들이 당장에 너를 잡아 죽이려 하던 것 정도?”
“…….”
“참수형에 처할지 교수형에 처할지, 살 떨리는 대화들이 한 30분은 계속됐지 아마?”
“…음…….”
“어머. 쫄았니?”
입을 가린 실비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 폐하께서 전부 수습하셨으니까. 그래도 딸의 하나밖에 없는 은인이잖아?”
“…그것 참 다행이네.”
“거기서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아마 포상도 받았을걸? 혹시 알아? 단숨에 나라의 귀족이 되었을지.”
“그런 건 관심 없고.”
“그래, 관심 없겠지. 지금 너한테 중요한 건, 학장님을 구하는 것 하나뿐일 테니까. 그래서 가려는 거잖아? 그 방법을 찾으러.”
가만두니 눈꼴 시려웠다.
특히, 마치 다 안다는 듯이 지껄이는 그 말투가.
자연스레 내 목소리에 날이 섰다.
“네가 뭘 아는데?”
“자유연합에 갈 생각이겠지.”
“……!”
“뻔하잖아? 너와 접점이 있으면서 믿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너를 도와줄 만한 곳은.”
이쯤 되자, 나도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나를 막으러 온 거냐?”
“아니? 내가 왜?”
“…가문 차원에서 윗선의 압박을 받았다던가…….”
“미안한데, 설령 폐하라도 우리 가문에는 함부로 못 하시거든?”
“그럼 왜?”
내 물음에, 이번에도 실비아는 전혀 예상 밖의 답을 내놓았다.
“얘기 안 했나? 너한테 관심이 있다고.”
“…얘기 안 했나? 그런 끔찍한 농담 좀 그만하라고.”
“지금 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여?”
그리 말한 그녀가, 나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물론 얼마 못 가 나는, 그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지만.
이 싸이코패스 기질이 다분한 계집애가 무슨 꿍꿍이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으니까.
“뭐 해, 안 타?”
“어?”
“준비는 이쪽에서 다 해놓았으니까, 얼른 타라고.”
실비아의 말대로, 게이트 담당 마법사가 이쪽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마치 들키면 치도곤이라도 당하는 양, 뭣 마려운 얼굴로.
그 모습에, 이내 떠밀리듯이 게이트 위에 올라선 내게 실비아는 가만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빚은 갚은 거다?”
“…빚?”
“물론 나는 누구보다 관대한 사람이니까. 연합에 도착해서도 포상을 기대해도 좋아.”
내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무슨 뜻이야?”
“가보면 알아. 또 보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곧 그녀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 직후.
화아아악!
“……!”
점차 내 몸이 환한 빛무리에 휩싸여 갔다.
그런 나를 보며, 금세 떠나갈 거라 생각했던 실비아는 소리 없이 제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눈조차 뜨고 있기 힘든 상황에서, 용케 나는 그 입 모양을 알아챌 수 있었다.
“고마워…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