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2황자 스노비
실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몇 번을 감았다 떠도, 그녀 눈앞의 광경은 그대로였다.
하여, 물었다.
“할아버지…….”
“…응?”
“저기 계신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이요. 스왈로우 내전의 영웅이라 불리는, 그 철혈의 군주 맞죠?”
실비아는 수도에 도착하는 즉시, 본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때문에, 지금 그녀 곁에는 조부인 제페르 스필 세드릭이 몸소 와 있는 상황이었고.
그런 그가 대답했다.
“가슴에 있는 포효하는 사자의 문양… 틀림없구나. 저건, 제국에서도 오직 그의 가문만을 위한 표식이니까.”
“제국에서도 황제 다음가는 권력자라는 그 레오나르도 공작이 맞다는 뜻이시네요.”
“그래.”
“그럼 한 가지만 더 여쭙겠는데… 설마 저기 단상 바로 아래에 있는 사람은…?”
이번에도 제페르 스필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2황자 같구나. 평소 들어왔던 그의 행색과 완벽하게 일치해.”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1황자를 대신하여, 황제의 뒤를 이을 것이 유력한 그 2황자요?”
“확실하다.”
기어이 확인사살까지 하고 나서야, 실비아는 깨달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음을.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연녹의 뒤통수를 향해, 절로 속마음이 튀어나올 정도로.
“저거 미친 새끼 아니야?”
***
단상 바로 아래에 있는 장발의 남자.
제법 높은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 나라의 정점이라 불리는 저 국왕 폐하조차, 저자세인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하지만 어쩌라는 건가?
애당초 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었다면, 그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에게도 시비 따위를 걸지 않았겠지.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시비는 녀석이 먼저 걸었고, 눈앞의 상대 또한 스네이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제국의 높으신 분 같았지만.
‘차라리 잘된 것 아닌가? 어차피 나는 저쪽에 볼일이 있었으니까.’
제국과 칠악은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이 있다.
그 점은 확실했다.
학장 할아버지가 그렇게 된 건, 그들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다는 의미였다.
허나, 그 사실을 안다고 내게 달리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내가 만나게 해달라고 쉽게 만날 수 있는 상대들도 아니었을뿐더러.
혹여라도 뒤에서 그런 걸 캐고 다녔다간, 자칫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인데.
하니, 떠보기에는 지금과 같은 공식 석상이 훨씬 나았다.
“큭큭큭큭큭…….”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예의 장발의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제가 그런 소리를 좀 많이 듣곤 하죠.”
“훗. 겁도 없고. 이름이 뭐지?”
“세타 쿤 이그니스입니다.”
“그래. 세타 쿤 이그니스. 우선 네가 내뱉은 말 중에는, 한 가지 큰 오류가 있다. 그것부터 바로 잡고 가도 되겠느냐?”
“오류요?”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보며, 장발의 사내가 미소 지었다.
“설령 네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거다. 그따위 건 아무런 문제조차 되지 않아.”
“예? 그게 무슨…….”
“네가 딛고 선 이곳. 이그란트 대륙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것들은, 전부 내 것이니까.”
“……!”
절로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농담이시죠?”
“농담처럼 보이나?”
“너무 오만하신데요.”
“이런 건,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다.”
“그래도 엄밀히 따지자면 타국인데, 혹시나 돌아가는 길에 칼이라도 맞으면 어쩌시려고…….”
예의 엑시드 백작이라는 작자가 금세 발작하려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허나, 이번에도 장발의 사내가 그를 가로막았다.
“글쎄, 보거라. 방금 내 말에, 이곳의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고 있지. 이게 무슨 뜻이겠느냐?”
“음…….”
그러고 보니, 꽤나 폭탄 발언이었음에도 주변에서 큰 반응이 없었다.
고작해야, 몇몇 귀족들이 질끈 제 입술을 깨무는 게 전부였으니까.
저 위의 국왕 폐하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단순히 허세라고 보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장발 사내의 저 오만방자한 모습은,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으니까.
물론 신분이 그만한 격을 갖추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건 뭐랄까.
애당초 ‘태생’부터 그래 보인다고 해야 할까?
하여, 나는 줄곧 궁금했던 부분을 묻기로 했다.
“저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성함을요.”
“내 이름?”
내 물음에 짧게 반문한 사내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곧이어…
“스노비(Snobby)다.”
“스노비?”
“그래. 스노비 벨 그레이스. 그게 내 이름이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내 귀로 또렷이 틀어박혔다.
***
궁의 바깥.
일행 중 가장 먼저 대전을 나선 내게, 감시자 겸 호위를 자처한 루나가 말했다.
“의외네요.”
“뭐가요?”
“저는 당장 눈이 뒤집혀서, 앞뒤 가리지 않고 사고 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요?”
“네.”
“에이, 이미 나보다 더 눈이 뒤집힌 분도 계시던데요, 뭘.”
“폐하… 말씀이신가요?”
“처음에는 진짜 미친 인간인 줄 알았다니까요? 아무리 제국인이라도, 타국에서 어찌 그리 건방을 떨어댈 수 있는 건지 하고요.”
예의 장발 사내가 스스로를 소개한 직후, 국왕 폐하는 내게 명백한 축객령을 내렸다.
‘감히 어딜 끼어드느냐?’ 하는 호통 소리와 함께.
덕분에 의문만 더 증폭된 느낌이었지만, 그 부분은 곧장 눈앞의 상대가 해결해 줬다.
“그럴 수밖에요.”
“네?”
“그레이스라는 성은, 제국에서도 오직 황족들에게만 허용된 이름이니까요.”
“……!”
순간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 그러니까 그 말은…?”
“네. 아까 그분이 바로 제국의 2황자. 스노비 벨 그레이스에요.”
“이런 미친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내뱉는 욕지거리였다.
어디 높은 귀족쯤 되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황족이라니!
까딱하면 그대로 목이 달아날 뻔했지 않은가?
“…다 알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설마요. 무식하니 용감했을 뿐이에요.”
“…….”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루나가,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도 뭐, 덕분에 제 분도 풀렸지만요.”
“……?”
“공주님 말이에요.”
“아…….”
생각해 보면, 장발 사내의 정체도 쉽게 추론할 수 있는 문제였다.
대전에 들어선 직후, 예의 ‘그’ 광경을 목격했다면 말이다.
“공주님은… 좀 괜찮으신가요?”
“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분은 저희 생각보다 훨씬 강한 분이시니까요.”
“…그 점은 제법 동질감이 느껴지는데요?”
“네?”
“당장의 감정에 눈이 멀어 복수를 망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는 점요.”
이어지는 내 말에, 루나가 드물게 미소 지었다.
“어? 웃을 줄도 아네요?”
“…웃은 거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시죠?”
“계획을 묻는 거예요?”
“네. 참고로 보답이라 하긴 뭣하지만,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
“복수를 생각하시는 거라면, 이 나라에서는 생각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곧 나와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한 루나가 힘주어 말을 잇는다.
“생각보다 제국의 눈과 귀가 많은 곳이거든요. 이곳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 우선 아카데미에 잠깐 들렀다가…….”
찰나, 말끝을 흐리던 내 머릿속으로 한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예의 바람을 연상케 하던 그.
원래 계획대로라면, 일이 끝나는 대로 학장 할아버지가 만나려 했던 존재.
“마침 방학이기도 하고. 이대로 자유연합으로 가볼까 하거든요.”
“자유연합요?”
의외의 목소리를 토해내는 그녀를 향해, 나는 가만히 미소 지어 보였다.
“정보도 얻어야 하고. 무엇보다 복수를 하려면, 힘부터 키워야 하지 않겠어요?”
“아…….”
“참고로, 매의 눈에도 의뢰할 생각이니까 잘 좀 부탁해요.”
***
왕궁 후원에 마련된 자그마한 별채.
귀한 손님이 방문할 때면 통째 접객실로 내어주곤 하는 그곳에서, 두 사내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하답지 않으셨습니다.”
“그랬나요?”
“특히나 테라의 국왕이 보는 앞에서 공주를 희롱한 행동은, 저희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구요.”
“좀 봐주시지요. 저도 피 끓는 20대 청춘이 아닙니까?”
“…근래에 저하께서 마음이 조급해지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런 때일수록 행동에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더욱이, 황제 폐하의 이름까지 파시다니요.”
“어차피 내 것이 될 나라입니다. 고작 인장을 하나 빌려 썼기로서니, 크게 문제 될 일이 있겠습니까?”
순간 주변의 눈치를 살핀 노년의 사내가 목소리를 낮췄다.
“말씀에 주의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나라밖입니다.”
“예. 주의하지요.”
“원점으로 돌아와, 만약 테라에서 이번 일에 대해 대국가적인 차원의 항의라도 한다면…….”
그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장발 사내가 피식 미소 지었다.
“그리되기 전에, 왕국의 자랑이신 마스터 레오나르도 공작께서 처리해 주시겠지요.”
“저하, 그리 쉽게 말씀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하하, 농담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전혀 걱정하지 마시지요.”
“…달리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이 나라에는, 이미 제 말이 충분히 있거든요.”
곧 장발 사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하니 제가, 뒤늦게 힘을 실어주신 공작님께 실망을 드리겠습니까?”
“…저는 저하를 믿습니다. 그저 죽을 날만 바라보고 있는 노인네의 사소한 걱정 정도로 생각해 주시지요.”
“잘 알지요. 그 걱정을 덜기 위해, 추가 설명을 조금 드리자면…….”
“……?”
“최고의 병법은, 손 안 대고 코 풀기라죠?”
“예? 그야…….”
“이건 그 계획의 일부입니다. 하물며 테라는 황제 폐하께서 이미 오래전부터 제게 맡기신 ‘구역’이지요.”
“하면…?”
“이 또한 대계의 일부라는 뜻입니다. 예정대로 저는 주사위만 던졌을 뿐이고, 지금부터는 이곳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 지켜보시지요.”
“…이미 계획이 다 있으시군요.”
“예. 그보다는…….”
잠시 말끝을 흐리던 장발 사내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흥미가 떠올랐다.
“그 맹랑한 아이. 이름이 분명 세타 쿤 이그니스라고 했던가요?”
“예?”
“떠나기 전에, 그 아이나 다시 한번 만나봐야겠습니다.”
노년의 사내, 레오나르도 공작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미 따로 알아봤습니다만, 작위조차 가지지 못한 천한 것이라고 합니다.”
“호오? 일개 평민이, 이 나를 상대로 그토록 맹랑한 행동들을 보였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하니, 녀석의 죄는 제가 직접 묻겠습니다. 저하께서는 구태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요. 그럴 수야 없지요.”
한차례 고개를 저은 장발 사내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건, 이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매우 밝은 미소였다.
“그 아이. 아무래도 제가 찾던 사람 같거든요.”
“그게 무슨…?”
“나를 위해 애써 이곳까지 와준 아이에게 벌을 줄 수는 없는 법이지요. 암요. 그렇고 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