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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36화 (36/251)

36화. 위기(2)

이건, 악몽일까?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장면보다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야는 흔들렸고, 전신은 쉼 없이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목청이 찢어져라 고함치고 싶었다.

혹시나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만약 그런 거라면, 두 눈을 부릅뜨고 다시 보기를 원했다.

한데…

“끄윽… 끄윽…….”

마치 무언가에 ‘콱’하고 막힌 듯, 목소리가 의지대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두 눈두덩이에는 습막마저 차올라,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필사적으로 목구멍을 쥐어짰다.

희뿌연 습기를 몰아내고, 당신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

“학장 할아버지이이이이이!”

스르륵.

그 외침과 동시에, 학장 할아버지의 신형이 모로 기울어졌다.

앞섬을 가르고 삐죽이 튀어나온 새까만 손톱이 아프게 시야로 박힌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왜 내게서만, 이런 불행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것일까?

촤아아아악!

놈의 가벼운 손동작에, 학장 할아버지의 핏물이 대지를 적셨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이윽고 현실로 돌아온 내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아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아 올랐다.

평생 내 편일 것이라 생각했던 존재.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이, 서서히 생을 잃어간다.

그 찬란한 빛이 꺼져 간다.

한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지랄 맞게 무력한 현실이, 나를 미치도록 만들었다.

“크르르르…….”

곧 내 잇새로, 마치 짐승과도 같은 기묘한 괴성이 흘러나왔다.

더 나아가, 두 동공은 크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맹수가, 사나운 흉성을 터뜨리듯.

그 분노가 천지를 찢어발기려 한다.

“크라라라라라라!”

훗날, 나조차 놀란 이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우우우우웅!

경악스럽게도, 사람이 아닌 하나의 ‘물건’이었다.

***

럼프의 암흑 필드가 해제되기 불과 수 분여 전.

“이제 곧 경매가 시작할 텐데… 그냥 내 말대로, ‘그’ 물건은 따로 빼놓아 주면 안 되겠나?”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길러, 일견 보기에도 얼굴에 ‘나 귀족이요’라고 써놓은 듯한 중년 사내가 말했다.

특히나, 그의 가슴팍에 아로새겨진 비상하는 매의 문양은, 유독 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으니.

사내의 말에, 이번 경매를 책임지고 있는 관계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 각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장사는 신뢰가 생명이라는 것을요. 원칙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네. 잘 아네만… 쯧. 어차피 내 손에 들어올 물건인데, 번거롭게 왜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가서 하는 말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시간이 곧 돈이지 않나?”

“그야, 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만…….”

“혹, 우리가 그 물건을 낙찰받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겐가?”

관계자 사내가 빠르게 손사래 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지엄하신 ‘폐하’의 칙서까지 본 마당에요.”

그는 분명 ‘폐하’라고 말했다.

이 대륙 내에서, 그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제국의 일인지상.

기실 황제가 정말로 칙서를 남긴 것이라면, 이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엄연히 불법인 경매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반대로 얘기하면,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황제가 원하는 물건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만. 이 친구와도 얘기가 다 된 마당에, 좀 답답해야 말이지. 그렇지 않나?”

말을 마친 예의 중년 사내가 이내 제 옆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 일색인 한 인영이 시야로 들어왔다.

곧 그에게서, 성별조차 짐작 가지 않는 중성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원칙이라지 않나.”

“아, 않나?”

“제국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성정이 급한 건가? 조금 느긋하게 기다리지.”

“…내가 분명히 그 건방진 반말지거리는 고치라고 경고했던 것 같은데.”

“내 말투다. 문제 있나?”

차아앙!

중년 사내의 양옆으로, 두 호위기사가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무엄하다!”

“무엄은 얼어 뒤질.”

그 순간, 거짓말처럼 또 다른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 집어넣어. 뒈지기 싫으면.”

“사내들이란 정말. 왜 이렇게 일찍 죽지 못해 안달일까 몰라?”

어느새 나타난 지로시와 레이지가 두 기사의 뒤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 언제…!”

대경한 두 기사가 곧장 몸을 돌려 검을 겨누려 했으나.

“고마운 줄 알아. 내가 네놈들의 그 하찮은 목숨을 살려준 거나 다름없으니까.”

“무, 무슨…?”

쨍강!

“……!”

의미를 알 수 없는 지로시의 말을, 두 기사는 곧 몸소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두 동강 난 자신들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이미 일찍이 엑스퍼트에 접어든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반응은커녕, 어떻게 검이 부러지는지조차 보지 못했으니까.

“이, 이게 대체…….”

아연한 얼굴의 기사들을 뒤로하고, 와락 인상을 찡그린 중년 사내가 정면을 바라봤다.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나?”

“무사? 착각하지 마라, 엑시드 백작.”

“뭐라?”

“나와 거래를 한 건 제국의 황제다. 그대가 아니라, 그대의 상관이란 말이다.”

“나는 그분의 대리인 자격으로 이 자리에 왔다!”

“그렇다면 대리인 자격으로 찌그러져 있도록. 개는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되는 법이다.”

“……!”

엑시드 백작이라 불린 중년 사내가, 모멸감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절로 숨이 막혀오는 이 기 싸움은, 의외로 금세 진정되었다.

다름 아닌, 외부의 요인에 의해서.

콰차차차차창!

“뭣…!”

마치 유리창이 산산이 부수어져 나가는 듯한 굉음과 동시에, 그들의 관심이 일제히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걔 중에서도, 지로시와 레이지의 놀람은 특히 더했다.

“저것… 설마 암흑 필드인가?”

“마, 맞는 것 같은데? 설마 암흑 필드가 깨진 거야?”

“…럼프로군. 흥미로워. 이딴 오지에, 권능을 펼쳐야 할 상대가 존재 한다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 권능이 깨졌다고! 지금 장난해?”

말을 하면서도 레이지는 힐끔힐끔 누군가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이곳에서만큼은 권능의 사용을 엄격히 금해 왔으니까.

“저기, 대공…?”

한데, 정작 무슨 반응이라도 보일 거라 생각했던 당사자는 도리어 다른 곳에 관심이 가 있었다.

우웅! 우우우우웅!

저 멀리, 아르바스의 관계자들이 경매를 준비하고 있는 공터 위로.

“완성조차 되지 않은 아이리스의 조각이… 스스로 반응했다?”

저 혼자 두둥실 떠오른, 하나의 물건에.

***

“세타 쿤 이그니스…?”

갑작스레 뒤바뀐 환경에,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루나는 화들짝 놀랐다.

언젠가 유리나가 느꼈던 감정을, 그녀 또한 고스란히 경험하고 있었으니까.

“저 모습은 대체…….”

일반인보다 시력이 월등히 뛰어난 루나에게는 보였다.

언젠가부터, 전신으로 우둘투둘 돋아나 있는 돌기도.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기다랗게 변해 버린 두 동공도.

무엇보다,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는 주변의 마나까지.

“위, 위험해!”

순간 루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대지의 마법사마저 쓰러뜨린 그 위험천만한 덩어리가, 이번에는 그를 노리고 쏘아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앵!

곧장 검을 뽑아 든 루나가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바로 그때.

쩌어어어엉!

“……!”

거짓말처럼, 그녀의 신형이 우뚝 멈춰 섰다.

내심, ‘늦지만 않았으면…’ 하고 기도하던 참이었다.

허나, 한발 늦었다.

예상을 까마득히 뛰어넘는 속도로 접근한 덩어리는, 망설임 없이 세타를 향해 제 손톱을 찔러 넣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직후의 일은, 실로 경악스러웠다.

단단한 대지의 육신마저 종잇장처럼 뚫어냈던 그것이, 고작 인간의 ‘맨손’에 붙잡혔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덥썩.

“…크륵!”

예의 덩어리가, 허공에 떠오른 채 버둥거렸다.

그가 그대로 목덜미를 쥐고 들어 올린 결과였다.

상대는 족히 백 수 십 키로는 나갈 듯한 거구다.

마법사라고는 믿기지 않는 그 어마어마한 악력에, 루나가 또 한 번 기함하려는 순간.

스팟! 스팟!

마치 번갯불을 튀기는 듯한 번쩍임과 함께, 둘이나 되는 인영이 그의 양옆으로 새로이 나타났다.

언젠가 본 적 있는 그 면면에, 루나의 동공이 거칠게 요동쳤다.

“칠악…!”

재차 검을 말아쥔 루나의 손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쩌면, 오늘을 기점으로 왕국의.

이 나라의 운명이 뒤바뀔지도 몰랐기에.

***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 수많은 눈동자가 오직 나만을 바라본다.

뒤이어 살을 에는 두 개의 살기.

“멈춰라.”

“거기까지만 해.”

눈에 익은 거대한 대낫이 턱밑으로 드리워졌다.

반라나 다름없는 또 다른 칠악은, 기껏해야 제 손바닥만 한 비수로 내 관자놀이를 겨누었다.

허나, 그 자그마한 비수에는 맹수의 숨통마저 단숨에 끊어놓을 거력이 잠들어 있었다.

“…우습군.”

순간 내 입가를 비집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홱!

“뭣… 꺅!”

그건,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손에 쥔 덩어리를 여인 쪽으로 집어 던지는 한편.

“……!”

목표를 바꿔, 예의 대낫 사내의 목덜미마저 낚아채고자 했다.

“큭… 괴물 자식!”

육체적인 능력으로는 칠악 내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지로시였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아무리 물러나도 접근해 오는 상대를 떨쳐낼 수 없었으니까.

곧 지로시의 두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본신의 힘을 일깨우지 않는다면, 눈앞의 애송이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세를 끌어올린 지로시가, 이제는 코앞까지 덮쳐 오는 손바닥을 막아가려던 그때.

“그만하라니까?”

멈칫.

눈 깜짝할 새였다.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선 여인이, 순식간에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당신의 한쪽 팔이 덜렁이며 그녀의 손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나머지 한쪽 손으론, 비수로 그 목을 겨눈 채였다.

거짓말처럼 내 눈빛이 붉게 충혈됐다.

그러자 대낫 사내의 입가로 비릿한 조소가 맺혀졌다.

“김빠지는구만. 계획만 아니었다면, 이따위 시시한 인질극 말고 제대로 붙어봤을 텐데 말이지.”

“…….”

“다음에 한번 제대로 겨뤄보지. 전의를 잃은 먹잇감에게는 흥미 없거든.”

재차 비웃음이 귀청을 때린다.

이변은, 바로 그때 일어났다.

“…시덥지 않은 짓을 하는군.”

“……!”

바로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이지가 눈을 크게 떴다.

쩌저저저적! 투쾅!

동시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거대한 암석.

“큭…!”

그것에 떠밀려 위로 솟구치던 레이지가 자세를 다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두 눈 사이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시야가 높아지니, 비로소 어찌 된 영문인지 확실히 보였으니까.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양, 둥글게 쳐져 있는 암벽들도.

그 앞에, 분명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예의 단단한 노인네가 굳건히 버티고 있는 것도.

곧 비칠비칠 일어난 그가, 입가의 핏물을 닦아낸다.

몸 한가운데가 뻥 뚫린 상태에서, 잘도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언제나처럼, 그 허리마저 꼿꼿이 편 채로.

“나는 대지의 마법사. 아즈문 사트리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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