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위기(1)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예의 시신의 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수년 짜리 농사를 이대로 망칠 수 없었던 주최 측에서 의도적으로 감추었거나.
그도 아니면, 같은 편인 또 다른 칠악이 은폐한 것이겠지.
허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울컥.
순간,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핏물을 나는 애써 도로 삼켰다.
공간을 지배하는 마법.
달리 ‘고유 영역’이라고도 불리는 이 힘은, 여타 마법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마나의 ‘방출’과 동시에 적을 타격하는 대부분의 마법들과 달리, 고유 영역의 주 원리는 마나의 ‘유지’였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공간을 이루는 틀을 만들어내고, 그 틀을 일정 시간 동안 지속해 낼 능력이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내부의 밀도와 크기에 따라 수식의 연산 또한 어마어마하게 복잡했으니까.
말 그대로 공간 그 자체를 지배해야 했다.
일개 생도로서는, 가히 꿈조차 꿀 수 없는 고차원의 마법.
고유 영역에 특별히 경지의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6써클은 되어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데, 그런 대단한 일을 나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느냐고?
“스읍. 진짜로 알고 보니 마법 천재… 뭐 그런 건가?”
입가를 훔친 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용케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곧장 바로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각설하고, 내가 이 힘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종의 편법을 썼기 때문이다.
유지가 주인 고유 영역을, 나는 상대의 공간을 깨부수기 위한 일시적인 ‘도구’로 사용했다.
애당초 그것을 지속할 능력도 없었으니까.
물론, 그마저도 학계에 길이 이름을 남길 대사건이기는 했다.
고작 열여섯 먹은 아카데미 낙제생이, 잠시나마 일정 공간을 지배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더불어, 이번 일로 한 가지가 더 확실해졌다.
바람 계열에 한해서, 나는 다른 마법들보다 최소 두 단계는 윗급의 경지를 구사할 있다는 사실.
허나, 부작용은 따로 있었다.
부르르르.
태연한 얼굴로, 떨리는 무릎을 애써 다잡았다.
예의 알 수 없는 지식이 말한다.
아직은 네 상대가 아니라고.
어디까지나 적이 방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만약 상대가 본신이 지닌 힘의 십 분지 일이나마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 방심조차 무의미했을 거라고.
그러면서 또 소리친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라고.
그걸 알면서도, 나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귀, 귀신들인가?”
“환각은 아니겠지? 저 애들, 분명 저 기분 나쁜 연기에서 쏟아져 나온 것 맞지?”
“이것도 아르바스 경매상에서 준비한 이벤트 같은 건가?”
이미 대규모의 사람들이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럴수록, 더 많은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내게 다른 모든 시선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하나.
새까만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단 한 쌍의 눈동자.
“벨제바브…….”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그는 아직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명확한 적의까지 가지고.
머릿속에서 쉼 없이 경종이 울린다.
만에 하나 내가 우려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
벨제바브.
아니, 정확히는 그의 직계 권속인 럼프.
감각을 공유하는 럼프는, 본신의 기억을 일부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태생이 최하급 마물이었다.
마족도 아닌 마물.
지성조차 없는 저 마계의 최약체.
고작해야 죽은 시신을 먹이로 삼는, 흔해 빠진 시귀(屍鬼) 중 하나.
천대와 멸시로 얼룩진 과거였다.
모멸과 경멸로 범벅된 일생이었다.
날 때부터 육마가니 하는 고귀한 혈통들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여타 시귀들과는 다른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이 있었으니.
죽은 시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우면, 대상이 된 시신의 능력 중 하나를 훔쳐 올 수 있다는 것.
여러 가지 커다란 제약이 있었지만, 기실 이건 대단한 일이었다.
먹은 자의 힘을 그대로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마계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이런 능력을 가진 존재는 단연코 없었다.
그렇게, 수천 년에 걸쳐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갔다.
종래에는 무려 마계의 정점이라 불리는, 칠죄종에 이르기까지!
허나, 딱 거기까지였다.
마침내 죄악의 힘을 거머쥐었지만, 기존의 마족들은 비천한 신분이었던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여섯의 존재들이 각각 요마왕, 귀마왕, 혈마왕, 흑마왕, 천마왕 따위로 불리고 있을 때.
오직 그에게는, ‘왕’의 이름이 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스스로를 식마왕이라 칭했지만, 마족들은 그를 크게 비웃을 뿐이었다.
그런 모멸들을 겪었음에도, 그는 분을 속으로만 삭일 수밖에 없었다.
가진 바 세력도, 힘도.
다른 여섯의 왕들과 벨제바브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격이 존재했으니까.
허나, 이곳 중간계에서라면 얘기가 달랐다.
가장 먼저 넘어온 만큼, 누구보다 빠르게 권속을 대륙 각지에 흩뿌릴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 하나만 있는 직계.
“웃기고 있어…….”
럼프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는 그저 본격적인 축제에 앞서 소소한 요깃거리를 즐기려 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부나방처럼 덤벼드는 먹잇감들을 먹어치워 준 게 전부.
아니, 먹기 좋게 다져만 놓았을 뿐, 식사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
다름 아닌 눈앞의 저 훼방꾼 때문에.
“내 소중한 식사를 방해한 놈… 네게서도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갈 거야.”
애송이답게 아직은 미숙한 것인지.
경시하지 못할 힘으로 암흑 필드가 해제되기 직전, 놈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래 봐야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평상시 잠들어 있는 잠재의식 속, 아주 단편적인 기억의 파편.
그래, 원하는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 애송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곳에 있었다.
낼름.
곧 럼프가 기다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았다.
께름칙한 기분은 여전했다.
이제는 놈이 정말로 인간인지 판단조차 서지 않았으니까.
허나, 근래에 저만큼이나 구미가 당기는 먹잇감은 처음이기도 했다.
“흐히히히히…….”
결국,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었던 럼프는 차선책을 선택하기로 했다.
현시점에서, 녀석이 스스로 자멸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차선책을.
스르륵.
이윽고 럼프의 신형이 은밀하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공터와 조금 동떨어진 초입.
그곳에, 머리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두 인영이 조용히 서 있었다.
***
꼭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길한 생각이 들고, 하는 일도 족족 말아먹고 마는.
아즈문 사트리노에게는, 바로 오늘이 그랬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이번 일정은, 다시 한번 재고하시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진심을 다해 충언하였으나, 상대는 막무가내였다.
“이 나라 안에서, 무려 대지의 마법사와 함께 있는 제게 대체 어느 누가 해코지를 할 수 있겠어요?”
“이미 선례가 있지 않습니까? 칠악이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심장 한복판에서 말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들이 경계가 최고조로 강화된 지금 왕도 내에서 또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겠죠.”
“안일한 생각은 금물입니다. 당장 호위들과도 연락이 끊기셨지 않습니까? 약속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만나기로 한 이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구요. 이건, 분명 무언가 다른 큰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숲으로 미리 사전 답사를 갔을 수도 있잖아요? 그게 호위의 임무니까요.”
“그럼 저나 공주님께 미리 언질이라도 줬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리 쉽게 생각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쉽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예?”
“그런 거라면, 되레 한시라도 빨리 그곳으로 가봐야지요.”
앞뒤가 맞지 않는 상대의 말에, 아즈문 사트리노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 고집으로 시작된 일. 정말로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거라면, 저는 그 죄책감을 참을 수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공주님은 더더욱 가시면 안 됩니다.”
“내 부하들이에요.”
“위험합니다. 차라리 저 혼자서 다녀오겠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 나라 테라의 국민들이라고요.”
“군주의 잘못된 판단이 어떤 대규모 피해를 낳게 될지 상상이나 해보셨습니까? 정녕 제가 걱정하는 바를 모르시는 겝니까?”
“예. 몰라요.”
“공주님!”
“막상 일이 터지고 나니, 나 몰라라 뒤에서 이래라저래라만 하고 있으면. 앞으로 이 나라의 어느 누가 저를 믿고 따를 수 있을까요?”
“누구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제 말대로…….”
“아니요. 대지의 마법사께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하지 마세요. 저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자만이, 군주로서 자격을 갖출 수 있노라고 아버님께 누누이 배워왔으니까요.”
“…….”
군자의 도리까지 들먹이는데, 아즈문 사트리노로서도 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자칫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간, 왕실 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었으니까.
그저, 부디 별일 없기만을 바랄 수밖에.
그게 불과 수 시간 전의 일이었다.
화아아아아.
순간 품 안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 아즈문 사트리노가 흠칫 몸을 굳혔다.
얼핏 보면, 마치 퍼즐을 연상케 하는 네모난 물건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나서야, 스스로 주인을 정한다고 알려진 그 기물이.
“아이리스의 조각이…?”
저릿.
그와 동시에, 갑작스레 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상당히 불쾌한 기운까지.
“마기…!”
오래 지나지 않아, 그는 살기의 진원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쐐애애애액!
정체 모를 덩어리가, 정확히 이쪽을 향해 쏘아져오고 있었으니까.
그래, 덩어리.
팔다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새빨간 두 눈두덩이만이 사이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후드로 전신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마력의 흔적까지 지워냈음에도 그것은 정확히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좋지 않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
스팟!
“……!”
거짓말처럼, 덩어리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그야말로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움직임이었다.
가공할 속도로 허공 높이 튀어 오른 그것은, 순식간에 코앞까지 쇄도했다.
“큭…!”
그 행동으로 확실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놈이 노리는 목표는 명확했다.
이 나라의 보물이나 다름없는 여인.
그의 곁에, 레이지 칸 테레이라 공주가 있었다.
“안 돼!”
콰드드드드득!
아즈문 사트리노가 빠르게 주변으로 대지의 벽을 둘러쳤다.
콰득! 콰드드드드득!
그것만으로 안심하지 못하고, 이중, 삼중으로 벽을 더 생성해 냈다.
허나, 아즈문 사트리노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푸욱!
마치 날붙이가 고깃덩이에 쑤셔 박히는 양, 섬뜩한 파육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바로 뒤를 잇는 아릿한 통증까지.
파르르.
아즈문 사트리노가 떨리는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시꺼먼 무언가가, 신체의 일부분을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학장 할아버지이이이이이!”
털썩!
곧이어, 귓가를 파고드는 비명과도 같은 고함 소리와 동시에, 이내 그의 신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