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식탐의 벨제바브
고대 인간들의 문명은, 역사상 유래 없는 꽃을 피웠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마법이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제는 전설로나 치부되는 드래곤들과 인간 사이에 꽤 많은 교류가 있었으니까.
정체를 숨긴 드래곤의 유희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어지간한 대도시에만 가도 심심치 않게 보이던 존재가 반인반용.
즉, 하프 드래곤들이었으니까.
용혈의 마법사라는 이름은, 괜히 등장한 게 아니라는 의미다.
허나, 그 시대의 인간들은 지극히도 오만했다.
자신들의 힘이라면.
무궁무진한 인간의 잠재능력이라면, 저 하늘 위의 신마저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그런 인간의 오만함이 훗날 역사의 터닝 포인트가 될 대사건을 발생시키고야 말았다.
고대 말기.
끝을 모르고 콧대를 높이던 마법사들이, 기어이 ‘선’을 넘고 말았으니.
인간들에게는 어떻게 해도 넘을 수 없었던 경지가 9서클의 벽이었다.
당시의 그들은, 그 결정적인 차이를 드래곤 하트에 있다고 봤다.
달리 드래곤의 전유물로도 불리는 9서클은, 오직 그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다시 말해, 인간의 신체에 ‘하트’만 ‘이식’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게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인간들 사이에서 극비리에 진행된 오만의 결정체.
통칭, 드래곤 슬레이어.
물론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걸 눈치채지 못할 드래곤들이 아니었다.
용들은 분노했고, 당시 절대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통일 제국을 한순간에 멸망시켰다.
정확히는, 최초로 주제 넘는 계획을 세운 황족들의 씨를 말린 것이다.
그리곤, 장장 100년 동안 모습을 감추었다.
이후의 시대는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갑작스레 구심점을 잃게 된 각지의 대지주들은 스스로를 정통성 있는 혈족이라 칭하며,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국가가 무려 십수여 개.
바야흐로, 대 전국시대의 시작이었다.
이 또한 모두 드래곤들이 의도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들의 지능은 하늘에 닿았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허나, 그런 드래곤들조차 예상치 못한 상황이 있었으니.
중간계에서는 백년전쟁이라 불리는 이 혼란을 틈타, 마계에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 것이다.
그 선봉에 섰던 이가, 로드와 필적하는 힘을 가졌다 알려진 7인의 마왕.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인계에 발을 들인 이가 식탐의 마왕 벨제바브였다.
달리 언데드의 왕이라 불리는 존재답게, 그는 다른 마왕들에 비해 본신의 힘이 부족했다.
허나, 일대일의 싸움이 아닌 다수의 전쟁이라면 또 얘기가 달랐다.
벨제바브의 진짜 능력은, 휘하에 있는 언데드 군단에 있었으니까.
7인의 마왕들이 팽팽하게 대립하며 의미 없는 소모전을 이어온 지도 어언 수천 년.
그 와중에, 중간계의 이변을 가장 먼저 감지한 벨제바브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 이름은 대륙인들 사이에서 대부분 잊혀졌다.
고대 인마전쟁, 혹은 용마전쟁이라 불리었던 그 시대는 이미 천 년하고도 삼백 년이 더 지난 머나먼 과거.
양측 모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마족 또한 씨가 마른 게 작금의 현실이니까.
‘그런데 책에도 나오지 않는 이런 사실들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윽고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들을 털어낸 나는, 힐끗 옆을 돌아봤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외부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당장 곁에 주저앉은 유리나만 봐도, 온몸에서 경련이 일어나는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지금 막 당도한 또 다른 여인은 상태가 나았다.
강인한 육신을 지닌 그녀는, 암흑 필드조차 제법 버틸 만한 모양이니까.
“이, 이 공간은 대관절 무엇이지?”
“마족의 권능.”
“마, 마족?”
“그래. 그들이 가진 고유의 능력이야.”
“…과연. 그래서 몸이 이토록이나 무거운 거였나? 마치 중력이 몇 배는 더 작용하는 듯한…….”
생각보다 크게 당황하지 않는 루나를 보며, 내 눈빛 사이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놀라지는 않네?”
“놀라? 이미 데스 나이트와도 검을 겨루고 온 마당에, 여기서 더 놀라야 하는 건가?”
그렇게 된 거였군.
어쩐지 다른 하나의 기운이 범상치 않더라니.
“그럼, 나머지 인기척은?”
“실비아 스필 세드릭이다.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미 곯아떨어진 지 오래니까. 이 기분 나쁜 공간에서 벗어나 있기도 하고.”
“허. 이 상황에서 잠을 잔다고?”
“마나 탈진 현상을 겪었으니까. 그보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줄은 몰랐군.”
그러면서 힐끗 유리나 쪽을 곁눈질 하는 루나였다.
“우연히 만났어.”
“우연? 이 오밤중에, 이 넓은 숲속 한복판에서 말인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아카데미 내에서,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는 하던데…….”
“이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나와? 그보다, 그런 건 또 언제 조사했대?”
“…농담 아닌데.”
불만스레 중얼거린 루나가 삐죽 입을 내밀었다.
몰랐는데, 가만 보니 얘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 이미지가 상당히 달랐다.
외모도 그렇고.
바늘을 가져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행동하더니, 실상은 조금 사차원적인 기질이 있다고 해야 할까?
- 시건방진 년놈들. 이 나를 눈앞에 두고도 잡담을 해?
“……!”
그제야 나와 루나의 고개가 전방을 향했다.
어느새 인간의 형상을 한 덩어리가 그곳에 있었다.
아니, 말이 인간이지.
목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팔과 다리만 삐죽 튀어나온, 꼭 눈사람을 보는 듯했다.
- 나는 알아야겠다. 네놈 따위가 어떻게 잊혀진 그 이름을 기억하는지.
“안 알려줄 건데.”
- …큭큭. 그래, 이게 인간이지. 꼭 힘을 보여줘야만 제 주제를 아는 비루한 버러지들.
순간 말을 마친 덩어리가 제 손을 내뻗었다.
- 상관없다. 나는 그분의 직계 권속. 네놈이 말할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 기억을 엿보면 그만인 것인즉.
곧 그 오동통한 손바닥 위로, 새까만 연기가 뭉클거리며 피어올랐다.
사아아아아아!
그리곤, 곧바로 나를 향해 쏘아져 왔다.
“위, 위험…!”
“괜찮아.”
그렇다고, 구태여 그것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연기는, 신체에 그리 유해한 힘이 아니라는 것을.
도리어, 상대를 당황 시킬 일종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르르르.
- 이, 이게 대체…?
역시나 내가 연기에 적중당한 직후, 거짓말처럼 덩어리가 전신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 입으로 불신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낸다.
- 네놈… 정말로 인간이 맞나?
***
럼프는 당황했다.
- 위험하다. 녀석에게 무언가가 있다. 이 특유의 느낌, 아마도 내 생각이 맞다면…….
항상 들려오던 내면의 속삭임은 그걸로 끝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기억의 파편을 전이시켜 왔어야 했다.
한데, 진입도 전에 예의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이건, 하등한 종족인 인간에게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대체 뭐지?’
생각할수록 의문만 더 증폭되었다.
럼프조차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마왕의 힘을 내려받은 직계.
함께 이곳에 온 나태나 시기와는 달랐다.
당대의 칠악 중 권속의 힘을 직접 이어받은 이는 자신과 대공을 포함해 단 셋뿐이었으니까.
‘어차피 상대는 일개 인간 애송이. 찝찝하긴 하다만, 단지 그뿐이다.’
럼프는 애써 불안감을 지웠다.
나약한 인간의 육신으로는, 가만히 둬도 이곳에서 그리 오래 버텨내지 못할 거라 확신하면서.
더욱이 권속의 힘이라면, 눈앞의 애송이 따위는 단숨에 한 줌의 핏물로 화할 수 있을 터였다.
이 공간 내에서라면, 자신의 힘은 문자 그대로 ‘무적’이었으니까.
‘암흑 필드 자체를 해제하지 않는 이상, 놈의 승산은 전무하다.’
물론, 고작 인간 애송이에 불과한 놈은 절대로 공간에 충격을 가할 수 없었다.
조금도!
“크크크크크…….”
이내 럼프의 찢어진 입가를 비집고, 새빨간 웃음이 토해져 나왔다.
정체 모를 불안감을 대신하여, 곧 있을 즐거운 상상들을 머릿속에 가득 채워 넣으면서.
***
여전히 이유는 몰랐다.
이 지식도. 힘도.
마치 뇌를 간질거리는 양,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하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퍼즐을 하나씩 맞추어가듯, 알 수 없는 머릿속의 지식은, 내게 딱 감질날 정도로만 그것들을 제공해 주었으니까.
다만.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알 것 같단 말이지.’
칠죄종의 권능, 암흑 필드.
일단 펼쳐지게 되면, 이곳과 외부는 완전히 단절된다.
시간의 흐름조차 알 수 없다.
지금은 그저, 중력이 몇 배 증가한 공간에 불과하지만, 종래에는 ‘오감’마저 빼앗은 마의 영역.
그럼에도,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해답을 알고 있는 문제에, 골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었으니까.
우웅! 우우우우웅!
양손을 활짝 펼쳐 보인다.
마나의 움직임에 대기가 떨어 울렸다.
더 많이. 더 빨리.
심장의 박동에 맞춰 뜀박질 치는 몸속의 피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푸른 마나가 내부에서부터 용솟음쳤다.
쩌적, 쩌저저적!
“이게 대체…?”
바로 옆에서 놀라움으로 가득한 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레 발을 딛고 선 땅거죽이 뒤집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허나, 내 행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간 자체를 깨부술 수 있는 보다 상위의 영역. 그걸로 이 일대를 깨어 부수는 거다.’
내 목소리인지, 그게 아니면 다른 이의 것인지.
이제는 착각마저 드는 예의 내면의 울림이 들려왔다.
할 수 있다.
내가 가진 이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 의미 없는 짓을!
투-확!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일순간 전면에서부터 둥그런 구체가 날아들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새까만 그것은, 이전과 달리 특별한 물리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빠직! 빠지지지직!
그 반증으로, 주변의 대기가 거칠게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중력을 무시하고 쏘아진 그것은, 순식간에 내 코앞까지 당도했다.
곧이어, 그 둥그런 구체에 내 약하디 약한 두개골이 그대로 적중당하기 직전.
“윈드 힐(바람의 언덕).”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적!
순간적으로 커다란 힘이 몸 안에서 쑤욱 하고 빠져나갔다.
전신을 통해 방출된 그 마나는, 빠르게 주변으로 비산했다.
퍼석!
그와 동시에, 물리력을 가진 구체가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파차차차차차창!
한계를 넘어선 힘에, 마치 유리창이 통째 부수어져 나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휘오오오!
직후, 거칠지만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와, 살며시 내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리곤, 자취를 감추었던 이면의 공간들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
“……!”
언제부터였을까?
휘영청 떠오른 달빛 아래.
어느새 주변으로 모여든 다수의 인영들이, 부릅 하고 두 눈을 떴다.
갑작스레 새까만 연기가 생성되더니, 그곳에서 사람들이 튀어 나왔오자 그들의 입장에서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허나, 그런 그들보다 훨씬 더 충격을 받은 이는 따로 있었다.
- 어, 어, 어, 어, 어떻게…?
상대의 물음에, 부지불식간 평소 더럽게 재수 없다고 생각하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그 제노스 델 카이클의 입버릇.
내심으로는, 언젠가 나도 한 번 내뱉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 말.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그것을, 그대로 따라 내뱉었다.
“그냥 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