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수기의 숲(1)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데…….”
지금 내 손에는, 두 장의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학장 할아버지에게 건네받은 예의 그 적색과 청색의 봉투였다.
“대체 아이리스의 조각이 뭐야? 거기서 뜬금없이 제국은 또 왜 튀어나오는 거고.”
다른 무엇보다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던 건, 그곳에서 있었던 대화 내용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내가 듣기에도, 사뭇 심각해 보이지 않던가?
생각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여,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내 말에,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바이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금방이면 돼.”
“오자마자 또 어딜 가려고? 너, 밤에도 약속 있다며.”
“할 일이 생겼네. 저녁에 가문으로 떠난다고 했지? 배웅 못 해줘서 미안하다.”
“자, 잠깐!”
그대로 방문을 나서려는 나를, 바이커가 다급히 돌려세웠다.
“나 할 말 있다!”
“다음에 하자. 내가 지금 좀 많이 급하거든.”
“다음에 언제? 당장 조금 있으면 짐 싸서 집에 돌아가야 하는 판국에…!”
허나, 바이커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방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진짜 중요한 얘기라고!”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훗날 나는 지금의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이때 잠깐이라도 시간을 냈어야만 했는데.
그랬다면, ‘그런’ 종류의 결말은 맞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
그 쏟아지는 황혼의 노을 아래에 자리한 실비아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가득했다.
그녀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도 간다고?”
“엉.”
“그것도 공주님에게 직접 부탁을 받고?”
“그렇지.”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돼?”
“지금 네 말. 나는 전혀 언질조차 받지 못했으니까.”
“실비아, 나 조금 섭섭해지려고 그런다. 꼭 내가 가면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 것처럼 말하잖아. 혹시 내가 동행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니?”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실비아가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눈앞에서 생글거리는 저 주홍빛 머리칼을 잡아다 바닥으로 패대기치고 싶었다.
허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였다.
비루한 신분과는 별개로, 상대의 실력만큼은 진짜배기였으니까.
“…공주 년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결국 실비아는 이처럼, 혼자서만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기실, 공주에 대한 왕의 사랑은 대단했다.
실비아가 루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도, 이번 기회에 왕국의 보이지 않는 실세에게 점수라도 따볼 요양에서였으니까.
가능하다면 ‘독점’으로.
한데,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앞의 눈엣가시.
유리나 벤 아리에나로 인해서.
“그렇게 대놓고 불만 가득한 표정 짓지 말라니까 그러네. 솔직히, 숲의 지리에 대해 나만큼이나 잘 아는 사람이 또 있니?”
“칫.”
바로 이 부분이 문제였다.
유리나의 가문은,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기다리는 경매는, 아리에나 자작령인 베르너의 숲에서 진행될 예정이었고.
호수를 끼고 있어 수기의 숲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은, 해가 뜬 대낮에도 물안개가 짙게 깔리기로 유명했다.
눈이 밝은 길잡이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언제 길을 잃고 헤매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실비아가 연이어 궁시렁거리고 있던 그때.
“내가 조금 늦은 건가?”
“……!”
두 여인의 고개가 동시에 한곳으로 돌아갔다.
그녀들이 발을 딛고 선 곳은, 성도의 북문 인근.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기에, 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한데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그곳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굳게 닫힌 문틈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오고 있는, 세련된 경 갑옷 차림의 여기사가.
“두 사람 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군. 선발대는 이미 출발했다만.”
“버, 벌써? 장이 시작되려면, 아직 6시간은 더 남았을 텐데?”
실비아의 이런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르바스의 경매는 자정에나 시작될 테니까.
그 무렵이, 그나마 물안개가 옅어지는 시간대였던 탓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베르너의 숲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럼에도, 지금 막 나타난 루나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고 있었으니.
“결코 여유롭지 않다. 도리어 빠듯하다면 모를까.”
“나는 전혀 이해가 안 가는데?”
“지금 우리가 모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전 정찰’이니까.”
“아.”
이어지는 루나의 말에, 그제야 실비아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철두철미한 철의 여기사는, 선발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니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겠지.
이런 거라면, 기존에 약속되어 있던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곧장 출발하지. 복귀까지 예상되는 시간은 3시간. 만일에 있을 위험 요소만 확인하고 돌아올 거다. 이후의 계획은, 귀성하는 즉시 재공지하도록 하지.”
제 할 말만 마치고 그대로 앞서가는 루나의 뒷모습을 보며, 찰나 눈빛을 교환한 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때’는 또 죽이 맞아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 속내는, ‘이런 곳’에서 단둘만 남아 있을 생각은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실비아와 유리나였다.
***
“여기가 맞아?”
“맞다니까 그러네.”
“워낙 얼빵해서 믿을 수가 있어야지…….”
“뭐? 어, 얼빵? 누가 할 소리를! 분명 아카데미 석차는 내가 더 높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의미 없는 숫자놀음 따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걸 왜 모를까.”
“헹. 제발 한 번 해보시지, 왜.”
“집안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은 기꺼이 도와줘야 하는 법이라지? 무너져 가는 동급생의 하나 남은 장난감마저 빼앗을 정도로 내가 매정해 보이니? 그리 생각했다면 나야말로 실망이다, 얘.”
“혀, 형편이 어려운 친구?”
“어머, 내 실수. 방금 말은 잊어줘.”
이처럼 실비아와 유리나가 연신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을 무렵.
“…….”
루나는 다소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이상하군.”
“뭐가?”
“지금쯤이면 무언가 낌새라도 보여야 하는데… 너무 조용하지 않나?”
루나의 말대로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대륙 최대의 암매상이라 불리는 아르바스였으니까.
꼭 그들이 아니더라도, 소식을 듣고 먼저 온 고객들이 드문드문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한데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온통 나무와 풀때기들 뿐이었으니…….
“그러니까 말했잖아. 얘가 장소를 잘못 집은 거라니까.”
“여긴 내가 어렸을 때부터 놀이터처럼 뛰어놀던 곳이야. 틀릴 리가 없어.”
“치매라도 왔나 보지.”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흠칫.
순간, 길길이 날뛰려던 유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앞쪽에 있던 루나가 손을 들어서였다.
“…잠깐.”
“……?”
“무언가 있다.”
이내 실비아와 유리나가 숨을 죽였다.
그리 말하는 상대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했기에.
사박, 사박, 사박.
곧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전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세 사람은.
“이, 이런 곳이 있었던가?”
이윽고 어떤 특별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족히 저택도 들어설 수 있을 듯한, 넓은 공터였다.
문제는 그 공간 주변의 분위기다.
마치 통째 물을 먹은 듯한 무거운 공기.
아스라이 들려오는 괴상한 쇳소리에, 코끝을 비집고 들어오는 비릿한 혈향까지.
공간에 압도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절로 우수수 닭살이 돋아났다.
때아닌 한기에 등골마저 오싹해진다.
“……!”
그리고, 마침내 세 여인의 앞으로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시산혈해였다.
문자 그대로 죽은 육신이 산같이 쌓이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끔찍한 광경.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사지가 안쪽 공터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뇌수는 산천초목을 뒤덮고 있었다.
지면으로 흩뿌려진 피가 아직도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나 냉정한 루나조차도, 이번만큼은 얼굴이 한껏 굳어졌다.
비위가 약한 다른 둘은, 곧장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선발대다.”
“우욱… 서, 선발대라니…?”
“시신의 가슴팍에 있는 표식들을 봐. 저건 왕가의 표식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대체 어느 누가 왕도 한복판에서…….”
실비아는 채 말을 마치지 못했다.
“…마력!”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위액은 별론으로 하고서라도, 직후 루나가 그대로 땅을 박찼기 때문이다.
그 날랜 몸동작에 감탄할 새도 없이, 실비아와 유리나도 어기적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곧이어…
“……!”
세 사람은 이내 목격하고야 말았다.
언젠가 본 적 있는, 왕국 제일의 기재라 불리는 공작가의 핏줄.
크리스 론 인버스가, 넝마가 된 채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광경은 따로 있었다.
“마, 맙소사…….”
곧 그녀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새까만 어둠을 그대로 빨아들인 양, 묵빛으로 번들거리는 풀플레이트 메일.
다 큰 장정만 한 크기의 흑검.
결정적으로, 마치 타오르는 듯한 두 불구덩이까지.
크리스 론 인버스를 쓰러뜨리고 있는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저 외형.
이제는 서적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저 마물의 이름을, 그녀들은 알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
마침내 루나의 잇새로 마물의 정체가 흘러나왔다.
마계의 기사.
살아생전 꿈에서라도 목격할까 싶었던, 그 충격적인 과거의 산물이.
***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헉, 헉, 헉.”
유리나는 쉼 없이 발을 놀리고 있었다.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고, 입에서는 단내마저 풀풀 올라왔다.
다 큰 성인을 업고 뛰려니,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평소에 체력 단련도 게을리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비틀.
“…하읏!”
그 순간, 유리나의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바닥에 박힌 돌부리를 미처 발견치 못하고, 지면으로 곤두박질 칠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데스 나이트.
고귀한 기사의 육신을 매개로 삼아야지만 만들어낼 수 있다는 지옥의 마물.
일반적인 오러로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고, 그 무력은 가히 ‘마스터’에 버금갔다.
알려진 데스 나이트의 능력이라면, 그녀 또한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대체 어디서 그런 괴물이…….”
비틀거리며 일어난 유리나는 방금의 일을 상기했다.
스태프가 저만치 날아간 크리스 론 인버스가 통째 베여지기 직전.
루나는 데스 나이트의 일합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사이, 실비아는 루나를 보조했다.
유리나 자신 또한 돕고 싶었지만, 부상당한 크리스를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할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허나, 유리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고작 열 합을 채 넘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던 두 사람을.
언제 썰려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이 버티던 그녀들을.
“이잇… 젠장!”
생각할수록 유리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도와야 한다.
사사로운 감정과는 별개로, 왕국의 미래를 책임질 두 인재를 한날한시에 잃는 불상사는 반드시 없어야만 했으니까.
더욱이,
파스스.
“누구냐!?”
순간 유리나의 손이 ‘화르륵’ 불길을 내뿜었다.
그 붉은 화마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애꿎은 허공만 할퀴어댔다.
이런 일이,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기분.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사역마인 데스나이트가 있다면, 분명 그 주인 또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을 터.
이대로라면, 그녀 자신 또한 언제 어디서 변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고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녀에게는 한 생명을 구하는 일뿐만 아니라, 이 충격적인 사실을 왕궁에 알릴 의무가 있었으니까.
‘조금만 더 거리를 벌리는 거야. 그때까지만…….’
그런 그녀의 내면 속 간절한 바람을, 하늘이 들어주기라도 한 것일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
이제는 꽤나 귀에 익은 목소리에, 유리나의 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너…….”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기 시작하는 숲의 입구 앞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예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연녹의 머리칼을 휘날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