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31화 (31/251)

31화. 매의 눈(3)

“어…….”

내가 이토록이나 당황한 것.

아마도 랭킹전 때 이후로 처음인 듯싶다.

“…비켜.”

“넵.”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내가 황망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눈앞의 상황이 조금 더 자세히 보였다.

마치 개구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볼썽사납게 바닥에 엎어져 있는 흑발의 여인이.

나는 바로 방금 전까지, 그런 그녀의 뒤통수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다 큰 처자의 안면부를 그대로 흙바닥에 내다 꽂은 격이라고 해야 할까?

툭, 툭.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일어난 상대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이전이었다면 ‘역시나 냉혈의 여기사…’ 따위로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에 급급했다.

얼굴에 묻은 오물들부터 어찌 좀 할 것이지…….

처억.

“계속하지.”

재차 검을 그려 쥔 그녀가 말했다.

이제는 말투조차 완전한 평대로 뒤바뀌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그런 사소한 건 중요치 않았다.

“음… 이 상태로?”

“문제 있나?”

“문제랄 것까지야 없는데, 상황이 좀.”

“카무플라주… 라는 말이 있다.”

“어?”

“지금의 내가 그래.”

“무슨 뜻이야?”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그녀는 재차 알 수 없는 말들만 중얼거렸다.

문제는, 말을 마친 직후 상대의 기세가 일변했다는 점에 있었다.

우우웅!

놀라울 정도로 대기가 떨어 울렸다.

파지직!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외부의 압력에 지면마저 잘게 몸서리쳤다.

쯔어어어엉!

그리고 곧, 은(銀)의 검날 위로 또 하나의 새까만 빛무리가 덧씌워진다.

오직 선택받은 이들만의 전유물이라는 그것.

일평생 검만을 수련해 온 이들조차, 극소수만이 거머쥘 수 있다고 알려진 무형의 힘.

“오러…?”

나지막이 중얼거린 내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이, 이거! 단순한 대련이라고 하지 않았어?”

“상대가 마스터보다도 희귀한 쿼드 캐스터라면 얘기가 다르지.”

“아니,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지금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다고?”

이어지는 내 말에, 흑발의 여인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양 볼에는 여전히 흙먼지를 가득 묻힌 채로.

“약속은 지킨다. 원하는 정보 또한 제공하겠다. 허나, 이 치욕에 대한 값은 별개로 지불해야 할 것인 즉.”

“치, 치욕이랄 것까지야…….”

“그 부분에 대한 설명도 달리 필요한가?”

“…….”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렇다’라고 대답했다간, 정말로 시체 하나 치울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물론, 나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자, 잠깐! 내가 졌어. 패배를 인정한다니까?”

“납득할 수 없다.”

“납득은 무슨 놈의 납득!?”

“길이 굽은지 곧은지는 미리부터 따지지 않는 법.”

“자꾸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늘어놓지 말고, 이제 그만하자고!”

“동대륙에서는 이걸, 불문곡직(不問曲直). 혹은 문답무용(問答無用)이라 일컫는다.”

마침내 그 무시무시한 검 끝이 나를 가리켰다.

좆됐다.

온다.

저쪽에서 작정하고 덤벼들면, 나는 절대로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제노스와 같은 배틀 메이지라면 모를까.

일반적으로 이런 일대일 승부에서 마법사가 기사를 이길 가능성은 채 10퍼센트도 되지 않았으니까.

꾸우우욱.

팽팽하게 당겨진 활처럼, 한껏 근육을 수축시킨 상대가 마침내 나를 향해 쇄도 해오려 했다.

그 순간.

“지금 뭣들 하는 게냐?”

“……!”

거짓말처럼,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그것도, 꿈에서라도 짐작치 못한 ‘진짜’ 내 편이.

“이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나와 루나의 고개가 팩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학장 할아버지!”

내 얼굴이, 이전과는 비할 바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밝아졌다.

세상 그 누구보다 익숙한 사내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역시, 세상은 죽으라는 법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

“…….”

사위는 고요한 적막감만이 가득했다.

홀로 남게 된 지부 내 정원의 한가운데.

루나는 방금까지의 일을 조용히 상기했다.

공과 사는 분명히.

이건, 평소 냉철하기로 소문난 그녀의 지론이나 다름없었다.

대륙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을 채 넘기지 않는다는 쿼드 캐스터다.

거기에, 기사를 상대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배짱까지.

그만한 전력은 수도 전체를 뒤져 도 찾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자리가 자리인 큼 호위는 최소한도로.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인원을 구성하고자 스스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세타 쿤 이그니스는 특히 이 요건에 충족하는 존재였다.

겉모습만 보면, 공주님 또래와 다를 바 없어 보였으니까.

점수로 따지자면, 그래.

10점 만점에 8점.

아니, 9점도 충분히 줄 수 있었다.

다만…

“…마음에 안 들어.”

왜인지, 루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평소 우습게 여기던 비리비리한 마법사라서도.

사사로운 복수심(?) 때문도 아니었다.

콕 집어 이유를 설명할 순 없었지만, 그냥 싫었다.

‘아버님이 황제를 싫어하는 것도… 이런 기분 탓일까?’

나라간의 관계는 논외로 치고서라도.

그녀의 아버지인 론지에 후작은, 유독 제국의 황제에게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가 자신을 스카웃하고자 했을 때, 쌍수를 들고 환영하던 주변 사람들과 달리 홀로 길길이 날뛰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루나의 눈에 선했다.

사실 그녀는 내심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달리 기사의 나라라 불리는 제국이었으니까.

큰물에서 놀아야 실력도 느는 법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부족할 것 하나 없는 황제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또 있었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오직 가문 내 직계들을 포함한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

그녀의 먼 조상이, 이제는 전설로만 치부되는 ‘드래곤 슬레이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비록 껍데기만 남은 드래곤을 처리한 것에 불과했으나, 이거야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그 부산물은 아직도 음지와 양지 양면으로 위명을 떨치고 있었으니.

황제는 그 핏줄을 이은 그녀를.

소위 싹을 보이는 그녀의 재능을 탐내는 것이었다.

“…지난 일을 생각해 봐야 바뀌는 건 없겠지. 지금은… 그래. 설마하니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여나 녀석이 공주님에게도 실례를 범한다면…….”

스르릉.

상념을 이어가던 루나가 살포시 엄지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가벼운 손동작에, 검집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은빛의 날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날카로운 예기를 뿌려댔다.

“…벤다.”

줄곧 건물 안으로 사라진 두 인영을 쫓는, 검주의 눈빛만큼이나.

***

건물 내 밀실로 안내된 나는, 그 음울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유유자적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론지에 가문의 아이와 무얼 하고 있던 게냐?”

“다짜고짜 싸우자고 하던데요.”

“응? 그게 무슨 소리지?”

“밑도 끝도 없이 시험을 한다나 뭐라나.”

“시험…?”

“그러는 학장 할아버지는요?”

순간, 학장 할아버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리 부르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연이어 내 표정도 어색해졌다.

“그게, 아직은 조금 민망하다고 해야 할지…….”

“말도 계속해야 입에 붙는 법이다. 더욱이, 듣는 사람들이 있어야 어찌 된 인연인지 궁금증도 가져지는 법이고.”

“노력해 볼게요.”

“노력이 아니라…….”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 한껏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던 학장 할아버지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첫술에 배가 부를 순 없는 거겠지. 왜 이곳에 왔냐고 물었느냐?”

“예. 그도 그럴 게, 여긴 아카데미 학장과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장소잖아요?”

“내가 할 소리를 네가 하는구나.”

“…….”

이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저, 저야 뭐. 정보를 얻으려고 온 거겠죠?”

“허튼 생각 하지 말거라.”

“네?”

“칠악은, 지금의 네가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

이 정도면 귀신이 따로 없었다.

내가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자, 학장 할아버지가 계속해서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것보다, 아직 고민하고 있을 테지? 방학 동안 무얼 해야 할지 말이다.”

“네? 그야 뭐…….”

“나도 떠나는 마당에, 더 이상 학교에 남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테고.”

“아, 알고 계셨어요?”

내 반응에, 학장 할아버지의 미간이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다니거라.”

“싫어요.”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다녀온 게 아깝지 않느냐? 졸업은 해야 밖에 나가서도 제 구실을 하는 법이다. 마음 같아서야 이 길로 자유연합에 함께 데려가고 싶다만…….”

나는 ‘옳다구나’ 하는 표정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자유연합이요?”

“그래. 바람의 검주인 그와 약속했으니까.”

“저도 갈래요!”

“…아니. 상황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아. 거기까지 가는 길이 상당히 험할 듯싶으니…….”

그러면서, 학장 할아버지는 내게 봉투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각각 적색과 푸른색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봉투였다.

“적색 봉투는 방학 동안 정히 할 일이 없다고 판단되면 열어 보거라.”

“일종의 방학 계획표인가요?”

“…뭐. 그리 생각해도 상관은 없겠지.”

“그럼 이거는요?”

말을 마친 내가 오른손의 푸른 봉투를 흔들어 보이자, 일순간 학장 할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

“혹시나 내게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면… 그때 열어 보거라.”

“뭔 농담을 그리 진지하게 하신대.”

“농담 아니다.”

말을 마친 학장 할아버지가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묻고 싶은 말이 상당히 많았으나, 우리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벌컥.

때마침 밀실의 출입문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막 들어서는 이들은 예상과는 달리 ‘그녀’가 아니었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 사내가, 일단의 무리를 대동한 채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으니까.

“아즈문 사트리노 학장님.”

“역시 자네가 왔군. 제라드.”

“학장님은 제 고객이시니까요. 아니, 이제는 학장님이 아니시던가요?”

“역시 정보는 기가 막히게 빠르구먼. 그래도 루나, 그 아이가 있기에 깐깐한 자네보다는 내 조금 기대를 했네만.”

“매의 눈 안에서라면, 지위는 엄연히 제가 더 높습니다.”

“아무렴. 명실상부 매의 눈의 2인자가 아니던가?”

인사는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제라드라 불린 중년 사내가 우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정보를 요구하실지 알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의뢰해 오신 일들이 있으니까요. 한데…….”

“……?”

“학장님께서 원하시는 정보는 얻지 못하실 듯합니다.”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학장 할아버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게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아이리스의 마지막 조각’은,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해도 얻으실 수 없을 겁니다.”

이윽고 사내가 말을 마치자, 학장 할아버지의 전신으로 서릿발 같은 기세가 퍼져 나갔다.

“매의 눈이 아무리 컸다지만…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여기까지 와서, 이토록 대놓고 욕심을 드러낼 줄은 꿈에도 몰랐네만. 이건 나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오해는 하지 마시지요. 그런 뜻이 아니니까요.”

“하면?”

“학장님 말고 그 물건을 노리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아니, ‘집단’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도, 최근까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엄청난 거물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학장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제야 원래대로 돌아왔다.

“누군가. 그게?”

허나, 그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결국 학장 할아버지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지고 말았으니까.

“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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