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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28화 (28/251)

28화. 아르바스의 경매상

“꼴깝들 떨고 있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집중하던 실비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즈문 사트리노 학장이 왜 불필요하게 나서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사실, 그 정도 되는 위치라면 구태여 직(職)에서 물러나지 않아도 관계없었다.

당장이야 곤란한 일을 겪겠지만, 마음먹고 버티고자 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었으니까.

이 나라에서 ‘대지의 마법사’라는 이름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다치는 건 바라지 않는다. 설령 그 자신이 피해를 입더라도…….”

홀로 중얼거리는 실비아의 냉소가 한층 짙어졌다.

“진짜 혈육도 아니면서 말이지. 그게 진심이라고?”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

위대한 누군가로 역사에 이름이라도 남기고 싶은 것일까?

당장 피로 이어진 가족들조차 어떠한가.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면 사랑받고.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버려진다.

혈육이니 하는 문제는 중요치 않았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받는다는 건, 그런 의미였으니까.

역시나, 이 세상은 위선덩어리였다.

“실비아 스필 세드릭.”

멈칫.

순간, 바로 앞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실비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상념에 빠진 채 걷다 보니, 어느새 궁의 뒤편 정원에 다다라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달빛 아래, 마치 전설 속 달의 여신처럼 고고히 서 있는 한 명의 여인.

왕족이 아닌 외부인에게도 상시 개방되어 있는 곳인 만큼, 먼저 온 손님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손님이 꼭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지만.

“어머? 설마 나한테 볼일 있어?”

“그래.”

“의외네.”

그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실비아를 향해 흑발의 미녀가 말한다.

“공주님은 여기 안 계신다.”

“…더 재미있네? 그러니까 볼일이 있는 당사자가 루나, 바로 너라고?”

“그러면 안 되나?”

“…….”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반문하는 상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실비아가 이내 양어깨를 으쓱했다.

“전혀.”

“부탁이 있다.”

“오늘 참, 여러 번 사람 놀라게 하네.”

“아르바스의 경매상에 갈 생각이겠지?”

멈칫.

순간 실비아의 고운 아미에 깊은 골이 파였다.

“내 뒷조사라도 한 거야?”

“…….”

“대단하네. 아무리 근래에 ‘매의 눈’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지만. 그게 아니면, 론지에 후작님의 힘을 믿는 건가?”

“…….”

“어느 쪽이든,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니?”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루나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믿지 않겠지만, 네 뒷조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일로 알게 된 사실이니까.”

“응. 믿지 않아.”

“…….”

“그러니 근거를 대. 내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루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니까.”

“설마… 아니지?”

“네가 생각하는 그 설마가 맞을 거다.”

곧 실비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호위가 목적이라면, 사전 정보 수집이야 이해 못할 것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미친… 그 천방지축 공주님은 생각이 있는 거니?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그래서, 너는 그걸 허락했고?”

“생각은 머리가 하는 거니까. 나는 일개 검일 뿐이다.”

“아, 그러셔? 대단한 명검 납셨네. 안 그래도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제대로 사고라도 한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러니 지금 네게 부탁을 하는 거겠지.”

“나더러 공주님 호위를 해달라고?”

“그래. 머릿수가 많아지면 도리어 시선을 끌게 되어 위험해진다.”

“소수정예라는 건 잘 알겠는데 말이야. 그래서 내게 득 될 건 뭔데?”

“네가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

움찔.

실비아의 전신이 크게 떨렸다.

“네 언니. ‘실리스 스필 세드릭’에 대한…….”

“그만.”

루나의 말을 중간에서 끊은 실비아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듣겠어. 출처는 확실한 거겠지?”

“…그래. 하면, 내 제안을 수락한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나?”

“잠깐 기다려.”

짧게 대꾸한 실바아가 골이 아픈지, 연신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그 이전에, 나도 해줘야 할 말이 있어.”

“……?”

“이쪽에도 일행이 있거든. 그건 괜찮겠어?”

“일행…?”

루나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그녀 혼자라면 모를까.

공주님과 함께하는 자리였다.

만일에 있을 불상사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게 누구지?”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우리 아카데미에서 제일 높은 사람.”

“아즈문 사트리노 학장님?”

루나의 표정이 다시 펴졌다.

그분이라면 이 나라에서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어른이었으니까.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실비아의 목소리가 재차 이어졌다.

“그리고 세타 쿤 이그니스.”

“…세타 쿤 이그니스?”

생소한 이름이었다.

한데, 그게 또 영 어색하지는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라는 의미일 터.

“그 왜, 며칠 전 강당에서 너도 봤잖아.”

“…그 사람이군.”

그제야 루나가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외모에 연연하지 않는 그녀의 눈에도 확 시선을 잡아끌던 남자 생도.

다른 무엇보다, 그는 공주님께서 관심을 가지는 인물이었다.

매의 눈의 일원으로서, 꽤나 흥미로운 소재를 가진 아이이기도 했고.

크게 거슬릴 건 없어 보였으나, 그렇다고 혼자서 이런 일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한 시간 안에 답을 가져오지.”

***

“아카데미 소문 들었니?”

“그 무시무시한 칠악이 나타났다는 소문 말이지?”

“아니. 그런 거 말고. 글쎄, 생도 중에 대단한 미남이 있대.”

“제노스 델 카이클 님?”

“그분보다 더 잘생겼다고 하던데?”

“진짜야?”

궁 내에서 일하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내 귀로 틀어박혔다.

어째 칠악보다 내가 더 유명세를 타게 된 것 같지만, 이 부분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오롯이 내 결정이었으니까.

이래서 그동안 얼굴만큼은 숨겨왔던 건데…….

“…귀찮게 됐네.”

지금의 나는, ‘신체변형’ 상태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장 저런 말들이 궁 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성가신 일은 딱 질색이었기에, 내심 우려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마침 해야 할 일이 있기도 했고.

“저기…….”

“……?”

“왕국 안에도 도서관이 있다고 들어서요. 위치를 알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물어오는 나를, 눈앞의 남자 시종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봤다.

“혹, 귀족이십니까?”

“아니요.”

“…….”

“하지만, 테라 아카데미 생도입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시종이, 이어지는 내 말에 다시 태도를 바로 했다.

딱히 공손해졌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다.

딱 ‘선’을 넘지 않을 정도로만 대답을 이어나갔다.

“왕궁 안에도 도서관이 세 개나 있습니다. 본궁에 있는 도서관들은 오직 허락된 분들만 드나들 수 있으니 당연히 못 가실 테고…….”

“제가 찾고 있는 건 제3 도서관인데요.”

“나가서 왼쪽.”

“…….”

“한 100미터 정도?”

그 길로 멀어져 가는 예의 시종을 보며,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무래도 내가 별 볼 일 없는 꼬맹이라고 확신한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뭐 저런 게 다 있어?

“…쩝. 목적은 이루었으니까. 아니꼬우면 내가 위로 올라가야지 어쩌겠어.”

이미 앞서 언급됐지만, 왕국 안에는 총 세 개의 도서관이 있었다.

오직 왕족만이 드나들 수 있는 제1 도서관.

그리고 허락된 자들에 한해 출입을 허용하는 제2 도서관.

마지막으로, 궁 안에 들어올 정도로 신분이 확실한 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제3 도서관.

애초에 내게는 권한이 없었으니, 선택지 따위도 존재치 않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곧장 싸가지 시종이 알려준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게 되면, 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더러워도 기회가 있을 때 확실하게 정보를 모아둬야지.”

생각을 이어가니, 다시금 전날의 감정들이 떠올랐다.

그 칠악 중 하나라는 멀대 같은 사내를 정면에서 마주했을 때 느꼈던 충격과 공포가.

보고만 있어도 절로 소름이 끼치던 그 거대한 낫은 또 어떻던가?

허나, 그럼에도 나는 공격을 감행했다.

가슴속 깊은 곳에 똬리를 튼 거부감은 애써 무시한 채.

기실, 그건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자칫 화만 돋구고, 그대로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정도로 상대와 나의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자체적으로 믿을 만한 구석이 있어야 해. 학장 할아버지… 크흠. 아, 아버지가 위기 때마다 구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보다 효율적인 성장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물인 제3 왕립 도서관은 최적의 장소였다.

어쩌면 왕국 내에서 가장 많은 지식들이 모여 있는 곳.

그 소문대로,

“우와!”

커다란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던 나는 그만 떠억 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무수히 많은 책의 파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살아생전, 이보다 많은 책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보지 못했노라고 단연코 확신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곧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이 많은 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뒤져 봐야 하지…?”

이 넓은 장소에,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보이는 사서들은 그 방대한 책들을 정리하기 바빠 보였으니.

결국 이 많은 책들을 혼자서 살펴봐야 한다는 건데, 그건 누구보다 나태하고 게으르기로 소문난 내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래서야 적에 대한 정보는커녕, 제법 알려진 유물 급 보물들에 대한 지식도 글렀잖아?”

대륙에는 소위 고대의 유산이라 불리는 물건들이 있다.

3대 귀검.

7개의 명검.

그 외에 검이 아닌 10개의 유물급 보물들이 세상에 잠재해 있다고.

이미 주인이 있는 무구들을 제외하고, 그중 절반은 대륙에서 자취를 감춘 상황이었다.

한데, 이번 아르바스의 경매상에 그중 최소 하나 이상의 보물이 나온다고 한다.

실로 엄청나지 않은가?

나라고 흥미가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무구 또한 엄연히 힘을 키우는 방법 중 하나였으니까.

“어차피 그런 보물들은 그림의 떡일 테지만. 그래도 평상시 보는 눈을 키워놔야, 나한테 맞는 물건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학장 할아버지께서 선물을 주신다 말씀하셨다.

허나, 그것만 믿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게 무구와 관련된 물건인지도 모르는 일이고.

“결국은 이것들을 다 뒤져봐야 한다는 건데…….”

또 한 번 눈앞의 방대한 책들을 훑어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누가 원하는 정보만 딱 집어서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럼 불필요하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을 텐데…….

“…가만, 정보?”

생각해 보니, 한 군데 떠오르는 곳이 있기는 했다.

이 나라 테라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대륙이 아닌 왕국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곳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원하는 정보를 물어다 주는 조직이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옆집 신혼부부의 속옷 색깔까지 알아봐 줄 수 있다고 했다.

홱.

생각과 동시에 몸은 이미 도서관을 나서고 있었다.

역시 이런 장소는 나와 맞지 않았으니까.

“그래. 한낱 낙제생이 무슨 놈의 도서관이야. 남들이 비웃겠다.”

누차 강조하지만, 귀찮아서 이러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효율적인 문제였으니까.

겸사겸사, 책에서는 알 수 없는 이 나라 정치판에 대한 정보도 얻고.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까지 잡는 최선의 시나리오가 아니겠는가?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알지 못했다.

이런 내 선택이, 결국은 어떤 스팩타클한 결과들을 불러오게 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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