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아버지
복도 끝 저 멀리,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왜 그러셨어요?”
“너까지 내게 면박을 줄 셈이냐?”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어깨를 으쓱한 학장 할아버지가 그제야 나를 돌아봤다.
“나도 늙은 게지.”
“그 몸을 가지고 그런 말씀이 나오세요?”
“나이가 들면 뒷방으로 물러나야 해. 더 젊고, 의욕도 넘치는 후대에 양보해야지. 늙은이가 끝까지 자리를 차고 비켜날 생각을 안 하니, 외부에서도 좋게 볼 리가 있나?”
“설령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더라도 끝은 좋아야죠. 이게 뭐예요?”
순간 학장 할아버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할 말이냐?”
“…아무튼요.”
“일 없다. 그런 것보다, 네게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은데.”
내 얼굴 위로 자연스레 의문이 떠올랐다.
“갑자기요?”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밑도 끝도 없이 어디를 가시자는 건데요?”
“혹, 아르바스의 경매상이라고 들어는 봤니?”
어디선가 접해본 이름에, 일순간 내 전신이 흠칫 굳어졌다.
“그, 그거 불법 아닌가요?”
“불법? 분명 제국법으로는 그렇다만, 우리나라에서는 합법일 텐데.”
“저는 처음 듣는 얘긴데…….”
“따로 국가 차원에서 제재를 하지 않고 있으니, 그게 곧 합법이 아니겠느냐?”
“…그것도 그렇네요.”
이어지는 학장 할아버지의 설명에,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아르바스의 경매상.
세상의 모든 물건들을 취급한다고 알려진 베일의 집단.
그 물건이란, 이제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물급 보물에까지 범위를 미친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소문대로라면, 썩 재미있을 것 같기는 했다.
“저도 같이 가요.”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너…?”
“마침 저도 그쪽에 볼일이 있거든요.”
지금 막 내가 접근한 방향에서 득달같이 달려온 은발의 미치광이.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이가 없네. 네가 뭐라고 끼어들어?”
“못 끼어들 건 또 뭐니?”
“너랑은 안 간다.”
“왜?”
“설마 본인이 한 짓도 잊어먹은 건 아니겠지? 신나서 네 할아버지한테 나를 팔아넘길 때는 언제고?”
그 말과 동시에, 예의 미치광이인 실비아가 동그랗게 토끼 눈을 치켜떴다.
“팔아 넘겨? 내가 언제?”
“마치 죄인처럼 나를 몰아세우던 네 할아버지에게 후천적 각성자다, 뭐다. 좋아라고 다 일러바쳤잖아?”
“사실이잖아?”
“뭐?”
“나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분명 맞는 말이기는 했다.
그런데,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 낯짝이 너무나 얄미워서.
“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뻔뻔했구나?”
“선 넘지 마라. 평민 주제에 어딜 감히.”
“…….”
누가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 아니랄까 봐.
제 조부처럼 밉살스레 말을 내뱉는 실비아를 보며,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내가 더러워서 작위를 얻고 만다.
반드시.
“지도 평민이면서.”
“내가 왜 평민이야?”
“작위가 없잖아.”
“우리 아빠가 공작인데?”
“너 잘났다.”
“그 입 좀.”
“…….”
“진짜 꿰매 버린다?”
이 계집애라면 언행일치를 몸소 보여줄 것 같았기에, 나는 더 이상 대꾸하기를 포기했다.
“실없는 얘기라면 이제 됐어. 마침 혼자 가기 적적하기도 해서, 넓은 아량을 베풀자는 취지였으니까. 같이 가주면 보상은 충분히 할게.”
“…그 대단하신 공작가의 여식이 호위는 어디다 두고?”
“시선 끄는 건 또 싫거든.”
“방금 그 말. 진짜로 낯설거든?”
“일행 중에 학장님이 계시면 허락받기도 쉬울 것 같고. 괜찮죠?”
대화는 나와 나누고 있으면서, 시선은 학장 할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관계없단다.”
그 말에, 나는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도 너무 야박하게 그러지 말거라. 같은 아카데미 친구가 아니냐?”
“친구는 무슨! 혹시나 그 고약한 할방구… 크흠. 얘 할아버지가 알게 되면 어쩌시려고요? 괜히 또 엄한 소리만 듣는다니까요? 학장으로서 생도를 어떻게 그런 곳에 데리고 가냐느니…….”
“잊은 게냐? 나는 이제 아카데미의 학장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야 알고 있지만요!”
입이 댓 발로 튀어나온 내가 홱 하고 실비아를 돌아봤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저 얼굴 좀 보라지.
진심으로 한 방 먹여주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눌러 앉혔다.
“그래서 보상이라는 건 뭔데?”
“거기 가려면, 이게 필요할 걸?”
말을 마친 실비아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저게 뭐야.
종이?
“제국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올해부터 이 초대장이 없으면 경매에 참석 자체가 불가능하거든. 학장님이나 나 정도 되는 유명인이라면 그 신분 자체로 증명이 되겠지만. 너는 아닐걸?”
“뭐라고?”
내가 곧장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학장 할아버지가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나도 몰랐구나.”
“헐…….”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정말인 모양이다.
이래서야 달리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너도 참 운이 좋다. 나도 엄청 우연히 얻게 된 초대장이거든. 굳이 비유하자면, 오다가 주웠다고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
***
왕궁 후미에 위치한 소연무장.
그곳에서 한 여인이 세 명의 남자와 대치를 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상함을 느낄 기괴한 장면이었지만, 정작 긴장감으로 가득한 것은 사내들 쪽이었다.
“하압!”
그 순간, 가운데 사내가 검을 그려 쥔 채 여인을 향해 쇄도했다.
풀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감싼 사내의 돌진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히 위협적이었다.
더욱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으랴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나머지 두 사내 또한 여인의 좌우를 노리고 달려들고 있었으니.
피할 곳까지 미리 선점하고 치고 들어가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합격술이었다.
허나,
쩔그럭.
그럼에도, 여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손안의 검만을 조용히 들어 올릴 뿐.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질끈 묶어 틀어 올린 그녀가, 시선을 들어 정면을 바라본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검은, 이내 전방의 사내를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검이 시릴 듯 타오른다.
오직 익스퍼트.
그것도 중급 이상에는 이르러야 만들어낼 수 있는, 완벽한 오러였다.
휘리릭! 투쾅!
곧 새처럼 몸을 휘돌린 그녀가, 회전력을 이용해 차례로 세 사내를 후려쳤다.
“컥!”
“…….”
순식간에 장정 셋을 떨쳐 낸 그녀는 그 흔한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한줄기의 땀방울만이 새하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을 뿐.
“여, 역시 부단장님…!”
이에, 사내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쪽 차례라는 양.
천천히 접근하는 여인을 보며 사내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절호의 컨디션이 바로 오늘인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지금의 그녀는 이 대전을 쉽게 끝내지 않을 듯 보였으니.
‘좆 됐다…….’
최초 공격을 감행한 가운데 사내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바로 그때.
“루나!”
“……!”
거짓말처럼 사내를 구할 동아줄이 내려왔다.
움찔.
흑발의 여인이 거짓말처럼 걸음을 멈췄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그런 그녀와 달리,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른 세 사내가 곧장 예를 취했다.
혹여나 흑발의 여인이 마음을 바꿀 새라, 대전 때보다 더 신속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공주님?”
“있지! 내가 방금 엄청난 얘기를 들었거든?”
“네?”
“글쎄, 이 근처에 아르바스의 경매상이 온다지 뭐야?”
멈춰 섰던 흑발의 여인.
루나라 불린 그녀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불가합니다.”
“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실지 뻔하니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려던 것 아닙니까?”
“…치.”
이어지는 루나의 말에, 새롭게 등장한 금발 소녀가 삐죽 입을 내밀었다.
“방학식 때처럼 가면 쓰고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안 됩니다.”
“…생각하는 척이라도 좀 해주지. 무슨 별일이나 있으려구. 그 크리스 론 인버스 씨도 간다는데…….”
“그 얘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실비아 스필 세드릭도 그곳에 갈 거라는 소문이 있으니까요. 대체 생각들이 있는 건지…….”
이어지는 루나의 말에, 금발의 소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잊으셨습니까? 저는 이곳 왕실 제4 기사단의 부단장입니다.”
“그게 아니라, 왕국 제일에 빛나는 정보 조직. ‘매의 눈’을 운영하고 있는 집안 사람이라서겠지?”
금발의 소녀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나가 삼대 공작가에 뒤지지 않는 위치를 가지게 된 건, 단순히 후작가의 여식이기 때문만이 아니었으니까.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뭐. 크리스 씨야 루나도 얘기했다시피 무기에 미친 사람이니까 그렇다 쳐도. 실비아 그 아이는 왜?”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아르바스의 경매상. 그곳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장’을 구하기 위해, 얼마 전부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뒷골목 왈패들을 이용하는 일도 서슴지 않으면서요.”
예의 금발 소녀의 얼굴 위로 더 큰 의문이 깃들었다.
“그 신분이면 초대장은 필요 없을 텐데?”
“그래서 이유를 모르겠다 말씀드렸던 겁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네.”
그 말과 동시에 루나의 표정이 단호하게 변했다.
“안 됩니다. 절대로.”
“아아앙! 제발!”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아십니까? 공주님만 바라보는 다른 호위들은요? 대체 스스로의 신분에 대한 자각이 있으신 겁니까!?”
이내 성난 표정으로 쏘아붙이던 루나가 멈칫했다.
완전히 풀이 죽은 상대의 얼굴을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아…….”
“미안.”
“…저야말로 흥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아니. 아니야. 루나 말대로, 내가 너무 철이 없었지.”
애꿎은 바닥만 툭툭 차대는 소녀를 보며, 루나는 점차 마음이 약해져감을 느꼈다.
허나, 이윽고 마음을 다잡았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시국이 시국입니다. 칠악이 나타나 왕국 전체가 뒤숭숭한 상황. 부디 공주님께서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듣자 하니, 이번 아르바스의 경매상에는, 토른의 성검도 나온다는데.”
움찔.
순간 루나의 전신이 크게 흔들렸다.
여러 정보를 취급하는 그녀조차 처음 듣는 얘기였으니까.
곧 그녀의 눈빛이 미심쩍게 변했다.
“금시초문입니다.”
“응? 그야 그럴 수밖에. 이건 아버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 얘기인 걸?”
“……!”
정보의 출처가 다른 누구도 아닌 국왕 폐하였다.
이건 꽤나 신빙성 있는 정보라는 뜻이다.
매의 길드가 수도 제일이라면, 국왕 폐하 산하 직속 정보 길드는 이 나라 제일이었으니까.
“어때…? 루나도 관심 있어?”
“으음…….”
심란한 그녀와는 달리, 소녀는 ‘옳다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있는 자신의 호위는, 소문의 크리스 론 인버스만큼이나 무구에 미친 광인이었으니까.
“그, 그럼 저 혼자…….”
루나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소녀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무슨 소리야? 호위가 공주만 두고 어딜 가?”
“자, 잠깐만 시간을 주시면 됩니다. 반나절이면 될 것 같습니다. 필요하면 휴가라도 내겠습니다.”
“불가.”
“왜…?”
“안 돼. 허락할 수 없어. 나도 함께라면 또 모르지만.”
“으으…….”
이윽고 고뇌에 가득 찬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소녀는 확신했다.
이 철붙이에 미친 호위는, 반드시 자신의 제안에 응할 거라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성검 얘기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지만.
‘꼬박 몇 년을 기다려 온 외출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잖아?’
***
실비아가 먼저 떠나간 자리.
나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제와 안 괜찮으면 어쩌겠느냐?”
“…쩝. 그보다, 진짜로 궁금해서 여쭙는 건데요.”
“……?”
“뜬금없이 무슨 선물이세요? 어디 먼 데 떠나시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이어지는 내 말에 학장 할아버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가 아니다. 이건 꽤나 오래전부터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니까.”
“네?”
“이번 아르바스의 경매상에, 내가 찾던 마지막 퍼즐의 조각이 나올 것이라는 정보가 있거든.”
“조각요?”
“원래는 그걸 다 모으더라도, 조금 느긋하게 네게 전해주려고 했다만.”
이런 얘기를 들으니 궁금증만 더 증폭되었다.
“그 조각이라는 게, 처음부터 저를 위한 선물이었다구요?”
“이르다 뿐이겠느냐. 원래는 네 졸업식 날 주려고 했던 물건이다.”
“아…….”
“그게 어느 순간 ‘네 퇴학이 확정되는 날’로 바뀌었지만.”
머쓱한 표정을 짓는 나를 향해, 학장 할아버지가 계속 말한다.
“이제는 내가 학장직에서 물러나는 날 주는 선물이 되었구나. 이래서야 모양새가 이상한데…….”
“그까짓 학장, 계속하시면 되죠. 죽을 때까지.”
“세타.”
움찔.
웃음기라고는 없는 학장 할아버지의 얼굴에,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건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
“마지막이라니…….”
“하니, 나도 네게 부탁을 하나 해도 괜찮겠느냐?”
“……?”
“‘아버지’라고. 한 번 불러보거라.”
“……!”
내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비록 평민에 낙제생에 불과하나. 그 대지의 마법사를 아비로 둔 너를 더 이상 어느 누가 무시할 수 있겠느냐?”
“…….”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이제 학장도 뭣도 아니니. 비리니 하는 문제는 딱히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학장직에서 물러난 이유는, 단순히 후대를 위함만이 아니었음을.
늦은 밤, 고요한 적막감 속.
내 동공은 하염없이 좌우로 요동쳤다.
저 밤하늘 위, 오롯이 떠 있는 별처럼.
반짝이는 무언가를 한가득 머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