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사라진 빛의 마나
“이따위 핏덩이가 5클래스 마스터라고…?”
실비아의 할아버지, 제페르 스필 세드릭은 진심으로 놀랐다.
무려 5클래스 마스터다.
전 대륙 상위 0.1퍼센트.
더욱이 그들의 평균 연령은 불혹을 가뿐히 넘어섰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서른 중반의 나이에 그 경지에 올라서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뭇 대륙인들에게 ‘제페르 스필 세드릭’이라는 이름을 대면, 천재라 부르는 데 망설임이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한데, 그런 자신보다 더한 놈들이 하나도 아닌 둘이라니!
콰아아아앙!
“…큭!”
순간 제페르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여유롭게 감탄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가히 역대급 두 천재의 공세를 가뿐히 막아내고 있는 존재.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났을까?
무엇보다, 예의 정체 모를 괴인이 내뿜는 기운이 상당히 께름칙했다.
마나와는 궤를 달리하는 불쾌한 느낌.
이건 마치…
“…마기?”
스팟!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지금 막 카이클 가문의 핏덩이가 생성해 낸 우라니움 블레이드가 괴인의 옆구리를 파고들던 순간이었다.
반대편에서는, 마찬가지로 3대 공작가의 핏줄인 크리스 론 인버스가 4클래스 뇌전계 마법을 쏘아내고 있는 상황.
괴인의 양팔이 짓쳐 드는 두 마법을 막아간다.
순간적으로 손이 비는 찰나의 빈틈.
노회한 제페르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래비티 리버스!”
곧 그가 시전할 수 있는 즉발성 5클래스 마법이 펼쳐졌다.
오늘날 그를 ‘중력의 제페르’라 불리게 만들어준 주력의 힘들 중 하나.
쿠구구구구구구!
“……!”
갑작스레 역행하는 중력의 영향으로 괴인은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제페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치 새까맣게 타버린 듯한 괴인의 묵빛 손아귀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니까.
저건 설령 마스터라도 피할 수 없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무, 무슨…!”
얼마 지나지 않아 제페르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그의 시야로 곧 한 가지 물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예의 괴인의 무기.
절로 소름이 끼치는 거대한 대낫이, 자아라도 가진 양 스스로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새까맣고, 불길한 기운을 한가득 머금은 그것은 이내 주변을 쓸어갔다.
예까지 전해져 오는 저릿한 살기마저 흘려대며.
“안 돼!”
제페르가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잘릴 거다.
인간의 연약한 피육 따위.
저런 것에 걸렸다간 미처 인지할 틈도 없이 베여지고 말 것이다.
상대의 행동은, 같이 죽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일만은 절대로 피해야 했다.
‘빌어먹을…!’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제페르는 마지막 희망을 꿈꿨다.
명불허전이라는 듯.
마침 카이클 가문의 핏덩이가 센스 좋게 경로를 바꿔 괴인의 목을 찔러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 초를 수십 등분으로 쪼갠 찰나의 찰나.
누가 먼저 베여지느냐 하는 팽팽한 줄다리기 위에서, 괴인은 실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까아아아아앙!
“……!”
순간 제노스의 눈이 ‘흡’ 하고 치켜 떠졌다.
산성으로 가득한 그것.
더불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보다 무겁다고 알려진 우라니움 블레이드가 막혔다.
그것도, 고작 인간의 약하디 약한 치아에.
빠지지지지직!
기현상(奇現象)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파괴력만큼은 화염계 마법과 쌍벽을 이룬다고 정평이 나 있는 뇌전계 마법, 기가 라이트닝에 등판을 직격당하고도 괴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크크크크크…….”
그저 마나로 이루어진 날을 이로 문 채 섬뜩한 웃음만 내흘릴 뿐.
스팟!
제페르는 더 고민도 하지 않고 땅을 박찼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불길한 상상들은 애써 지워내며.
반드시 막아야 했으니까.
설령 괴인을 처치한다 한들, 저 둘이 잘못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허나, 그런 제페르조차도 미처 알지 못했다.
이미 그보다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이 땅에 내려앉아, 그 고통을 함께하기를. 미하엘 스카!”
“……!”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이곳에서 자신을 돕고 있는 이는, 비단 손녀와 두 애송이들뿐만이 아니었다고.
안중에도 없던 또 한 명의 핏덩이가 지금 막 괴인의 허를 찌르고 있었다.
그것도, 이제는 대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빛’ 계열 마법으로.
***
괴인.
주변 이들에게는 ‘지로시(Jealousy)’라고 불리는 그가, 찰나 움찔 몸을 떨었다.
갑작스레 전신을 엄습해 오는 불쾌한 기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그 감각은 지로시로 하여금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었다.
쨍그랑!
“쿨럭!”
곧 경쾌한 쇳소리와 함께 제노스가 피 섞인 기침을 토했다.
결국 우라니움 블레이드가, 지로시의 치악력을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부수어진 결과였다.
“이 기운… 성가시군. 어디지?”
처음에는 그나마 입가심 정도는 되는 중력의 노인네가 예의 기운의 진원지인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그 예로, 상대 또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자연스레 시선을 따라가던 지로시는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특정 지점에서,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밝은 빛의 파도가 사방으로 비산하고 있는 모습을.
언뜻 보면 사제의 신성력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나, 그건 결코 신성력이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빛 계열의 마법.
“미하엘 스카라고…?”
지로시가 처음으로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희귀하기는 하지만 그리 대단한 마법은 아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고작해야 잠깐 동안 시야를 빼앗는 것이 전부인 하찮은 마법.
허나, 그 대상이 자신과 같은 마기를 사용하는 이들이라면 경우가 달랐다.
빛의 마나는 신성력만큼이나 마기와 상성이 좋지 않았으니까.
벌써부터 내부의 기운이 들끓어 오르는 느낌에, 그의 얼굴 위로 살기가 떠올랐다.
“…저놈부터 처리해야겠군.”
지로시는 결심을 굳혔다.
눈앞에 있는 놈만큼이나.
아니, 외모만 따지면 이곳에서 단연 돋보이는 저 어린놈부터 처리하기로.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딱히 어려운 결정도 아니었다.
허나,
쩌어어어어엉!
“음…….”
그 목적은 이룰 수 없었다.
“거기까지다.”
“…….”
갑작스레 지면을 가르며 솟구치는 거대한 벽.
일견 보기에도 그 견고함이 범상치 않은 대지계 마법의 등장에, 지로시는 이내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즈문 사트리노인가?”
“시기의 지로시.”
나지막한 부름에 반응은 전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시, 시기의 지로시라니?”
“…제페르 님도 익히 들어보셨을 테지요? 상대는 칠악입니다.”
“하, 하지만 칠악은 하나하나가 나와 비슷한 연배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저리 보여도 저자 또한 백수를 바라보는 노물이니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제페르가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많이 쳐줘야 마흔은 넘기지 않아 보였으니까.
“순리에 역행하며, 사특한 기운으로 영생을 꿈꾸는 그릇된 존재들. 우리는 그들을 칠악이라 부르지요.”
“…….”
연이은 충격의 폭풍우 속, 지로시가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리저드 킹은 그 거대한 덩치가 무색하게 털끝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은은하게 울려대는 땅 밑을 보아, 아마도 지저 깊은 곳에 가두어둔 것일 터.
“…과연. 옛날의 그 꼬맹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솜씨군. 이제 그 위명도 자자한 대지의 마법사님이시라는 건가?”
“너는 오늘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훗. 인질이 이렇게나 널려 있는데, 이들 모두를 보호하면서 나를 상대하겠다고?”
“…….”
이어지는 지로시의 말에, 아즈문 사트리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주변의 생도들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 말대로, 이래서야 섣불리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쯔어어어어엉!
타이밍 좋게, 허공 위로 검은 실선이 그려졌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만들어진 새까만 아가리는 곧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를 토해냈다.
보랏빛 머리칼에, 무척이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유일한 흠이라면, 당장이라도 수마에 빠져들 듯한 축 처진 눈빛 정도일까?
“나태의 레이지(Lazy)까지…?”
지금 막 나타난 여인을 발견한 아즈문 사트리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야?”
“그보다 이것 좀 보라고. 금년의 테라는 복도 많다니까?”
“됐고.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마무리하고 떠나자고 내가 몇 번을… 어머?”
한창 쏘아붙이던 여인이 그제야 입을 가리곤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되게 맛있어 보이는 애들이 한가득이네?”
그 반응에 지로시가 됐다는 얼굴로 씨익 미소 지었다.
“그렇지?”
“분명 그렇긴 한데… 그래도 안 돼. 우리 리더께서 지금 화가 많이 나셨거든.”
“뭐? 그 인간이 왜 화가 나?”
“네 독단적인 행동 때문이지 왜긴 왜겠어.”
말을 마친 여인이 아공간에 다리를 걸친 채, 그대로 제로시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냉큼 따라와. 기회야 앞으로도 많을 테니까.”
“자, 잠깐.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특히 빛 계열 마법을 쓰던 네놈. 설마 ‘그들’의 후예는…!”
“시끄럽네, 진짜. 얘 내가 데려간다. 안녕~”
꿀꺽.
마지막 말을 남긴 둘은 순식간에 아공간 내부로 사라졌다.
“…….”
얼이 빠진 얼굴로 제자리에 굳어 있는 주변 이들만 남겨둔 채.
***
“부상자는 한곳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방학식.
폭풍과도 같은 일대의 대사건이 지나가고, 남은 사후처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학장 할아버지의 진두지휘 아래, 아카데미 관계자들은 가장 먼저 사상자들을 조치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임시방편으로 지저 아래에 생매장해 둔 리저드킹에 대비하고 있었고.
물론 모든 이들이 그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네놈은 누구지?”
실비아의 조부로 보이는 노인이 내게 물었다.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그것’을 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볼 사람들은 이미 다 봤지만.
당장 눈앞의 노인과 실비아.
제노스와 유리나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잘생긴 선이 굵은 미남까지.
“저는 세타 쿤 이그니스라고 하는데요.”
“누가 그딴 걸 물은 줄 아느냐!? 대륙에서 ‘빛’을 주력의 마나로 삼는 마법사들이 사라진 지도 어언 20년이 훌쩍 넘었다. 다시 묻겠다. 너는 ‘아락사스’와 무슨 관계에 있지?”
“…….”
뜬금없는 호통에 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허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뒷일도 편할 거라는 사실을.
그 왜, 본 실력의 3할은 숨기라는 격언도 있지 않던가?
허나, 이런 내 계획은 곧장 물거품이 되었다.
“할아버지! 걔가 후천적 마나 각성자에요! 심지어 그때는 화염계 마법을 썼다고요!”
“뭐라고…?”
저런 도움 안 되는 계집애를 봤나.
실비아의 외침은 사람들의 시선을 일제히 내게 집중시켰다.
그 제노스조차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더 큰 문제는, 지금 이곳에 내 편이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학장 할아버지는 리저드 킹을 마무리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으니까.
“그게요.”
그렇다고, 죽으라는 법만 있는 건 또 아니지.
“실은 제가, 대단한 비밀을 하나 가지고 있거든요?”
“……?”
물음표로 가득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마침내 나는 능청스레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이 바닥 전설에 대해 좀 아시려나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