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얼굴 천재(2)
아카데미의 강당을 코앞에 둔, 중앙 대광장.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곳에서 싸늘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반부의 식이 시작된 지도 벌써 수십여 분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다.
“이왕 내친걸음이잖아.”
“분명 강당은 가시지 않기로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글쎄.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무슨…!”
연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은 두 명의 여인이었다.
목소리로 판단하건데, 그것도 상당히 젊은.
상급자로 보이는 여인은 푸른 드레스 차림에 새하얀 고양이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과하지 않은 경갑옷 복장에, 마찬가지로 검은 고양이 가면을 착용한 채였고.
“루나, 이번 한 번만이야. 당장 내년부터 내가 다녀야 할 아카데미라고. 최소 3년은 같은 공간에서 지내야 할 친구들인데, 한 번은 미리 봐둬야지.”
“절대로 안 됩니다. 믿고 보내주신 바깥의 어르신들도 생각하셔야지요!”
“그게 어디 나를 믿고 보내준 건가? 공작가의 자제들도 마음껏 나다니는 곳이니, 최소한 이 안에서만큼은 나한테 해코지를 할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래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불가합니다.”
예의 흰 고양이 여인이 가면 뒤로 삐죽 입을 내밀었다.
“절대로?”
“네. 절대로.”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
“계획했던 시장 구경은 깔끔하게 포기할게. 이건 어때?”
“……!”
여태껏 흔들림이 없던 검은 고양이 여인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내가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것 봤어?”
“그건 그렇지만… 오랫동안 기다려 마지않으시던 일인데, 그걸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하시니까요.”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흰 고양이 여인이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한다.
“뭐가 더 중요한지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네?”
“그도 그럴게, 아버님께서 점찍으신 내 예비 낭군님이 저기 계시잖아?”
“아… 죄,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로 여쭌 것은 아니었는데…….”
“괜찮아, 괜찮아. 사실 나도 개인적으로 관심은 있었거든.”
“그 말씀은…?”
“남들은 정략결혼이라느니 벌써부터 입방정을 떨어대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상대는 왕궁까지도 소문이 자자한 그 카이클 가문의 후계잖아. 오히려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면 더 이상한 거 아닐까?”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상대를 보며, 흰 고양이 여인이 계속해서 묻는다.
“루나도 궁금하지?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그는 너와 비견되는 왕국 최고의 천재잖아.”
“저는…….”
잠시 고민하던 검은 고양이 여인이 말을 잇는다.
“실제로도 그를 본 경험이 있습니다.”
“정말? 어땠는데?”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으신 거라면… 예. 그는 천재가 맞습니다. 능히 괴물이라 불리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요.”
“뭐야, 루나도 평소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말이네?”
“제 스타일은 아닙니다.”
상대가 무슨 의도로 물어오는 것인지 잘 아는 검은 고양이 여인이 딱 잘라 대답했다.
“쳇. 재미없어.”
이에, 흰 고양이 여인이 가볍게 혀를 찼다.
“뭐, 됐어. 아무튼 허락한 거지?”
“약속만 지켜주신다면.”
“좋아. 바로 들어가 볼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이윽고 대화를 마친 검은 고양이 여인이 전방을 향해 걸어 나갔다.
강당은 이미 수백의 경비병들이 철통같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데, 그 모두가 예의 검은 고양이 여인이 내미는 무언가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제3자가 보기에는 충분히 수상쩍은 행색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나타난 걸 알면, 아마 다들 깜짝 놀라겠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흰 고양이 여인이 가면 뒤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강당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채.
***
“…….”
사위는 삽시간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대 정중앙, 뭇사람들의 시선을 일시에 받고 있는 한 쌍의 남녀.
특히나, 바로 코앞에서 남자 쪽을 목도한 생도들은 가히 경악스러울 지경이었다.
“세상에…….”
그건 실비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보기 좋게 우뚝 솟은 코.
새하얀 피부에, 신비로이 반짝이는 연녹색 머리칼.
두 눈동자는, 마치 에메랄드라도 박아놓은 양 광채가 넘쳐흘렀다.
저 외모는 뭐랄까.
제노스처럼 ‘예쁘게 생겼다’라기 보다는, ‘잘생겼다’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무엇보다,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매력까지 품고 있었으니.
마치 분위기 깡패라는 표현은 저를 위해 존재하는 듯싶었다.
더욱이, 놀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띠리링.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무대 뒤편에서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곧 세타가 유리나의 허리에 살며시 손을 올려놓았다.
“……!”
“안 출 거야?”
“춰, 춰야지.”
그래도 그 외모에 조금은 면역이 있는 유리나가 토끼 눈을 뜬 채 발을 맞췄다.
생도 무도회의 첫 곡은 하율의 선박.
대륙에 이름난 모험가였던 하율이,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반려를 그리워하며 직접 작곡한 노래였다.
요즈음 테라의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가장 뜨거운 인기를 구가하는 하율의 선박은, 특히 그 특유의 템포로도 유명했다.
초반에는 느리다가 점차 빠르게.
후반부로 갈수록 작곡가의 애달픈 그리움을 일거에 쏟아내기라도 하듯 음율 자체가 거칠어졌다.
곡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심심치 않게 동작을 틀리기 일쑤였으니.
허나, 유리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하율의 선박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연주였고.
평소에도 취미 삼아 곧 잘 추곤 했었으니까.
한데,
“미, 미안!”
“괜찮아.”
그토록이나 익숙하던 박자가 오늘따라 유달리 어색했다.
몸은 삐걱거렸고, 연이어 상대의 발등을 밟아대며 실수를 남발했다.
그에 비해 상대는 어떤가?
동작을 잇는 움직임은 매끄러웠고, 내딛는 발걸음마저 기품이 넘쳐흘렀다.
너무나 비교되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부끄러움이 몰려오는지, 유리나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거! 무슨 뜻이야?”
“뭐가?”
“이제 숨길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 그 얼굴.”
“아… 그거야, 곧 이곳을 떠날 것 같으니까?”
“떠난다고…?”
멍하니 따라 중얼거리던 유리나는 그제야 일전의 일을 떠올렸다.
세 번의 낙제.
그에 대한 징계는 분명 취소가 아닌 일시적 보류 상태였으니까.
“너무 성급한 것 아니야? 그래도 보여준 게 있는데…….”
“학장 할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고.”
“응…?”
“‘나’라는 예외를 두게 되면, 그게 결국 부정이 되어 뿌리를 내리는 거라고.”
“아…….”
그럼에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유리나가 잠시 입을 오물거렸다.
왜인지, 막상 떠난다는 얘기를 들으니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으응…?”
“춤, 끝났는데?”
화아아악.
상대에게 반쯤 안긴 채였던 유리나의 얼굴이 잘 익은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나도 알고 있거든?”
후다닥 뒤로 물러난 그녀는 그때서야 깨닫고 말았다.
방금의 연주는, 두 사람만의 완벽한 독주 무대였음을.
이곳에 모인 생도들 모두가 춤을 추러 왔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당에 모인 수백의 관중들을 포함해서.
“이게 뭐야…….”
화끈거리는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유리나의 얼굴이 점차 울상으로 변해갔다.
***
“저, 저기 저 사람은 누구야?”
지금 막 강당 내부로 들어선 흰 고양이 여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음…….”
정작 질문을 받은 검은 고양이 여인조차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외모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그녀 또한 이번만큼은 제법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니까.
“혹시 엘프인가?”
“아니요. 귀가 저희와 똑같습니다.”
“요즘 나오는 아티팩트라면, 그 정도는 문제도 안 되잖아?”
“그뿐만이 아니라 엘프 특유의 느낌도 없습니다.”
멈칫.
이번만큼은 흰 고양이 여인도 의심을 풀 수밖에 없었다.
“여섯 번째 감각으로 이름난 루나가 그렇다면야… 그럼, 진짜로 인간이라는 건가?”
그때, 주변에 있던 생도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로 틀어박혔다.
“저 낙제생이… 세타 쿤 이그니스가 저런 얼굴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대박… 어쩐지, 주력이 신체 변형이라고 했는데도 변형 마법을 쓰는 건 아무도 못 봤었지?”
“나야 제 주력 마법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낙제생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럼 주력이 화염계에, 써브가 신체 변형인 거야?”
다른 뒷말은 흰 고양이 여인의 귀에 더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타 쿤 이그니스라고…?”
들어본 바 없는 이름이다.
허나, 지금 이 순간 그 이름은 그녀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그 나이 때 여자아이들이 대게 그러하듯.
그녀에게도 ‘잘생긴 남자’는 초미의 관심사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무대 위의 소년은 지금껏 봐온 그 어떤 사람보다도 그녀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진짜로 오기를 잘했네?”
***
예의 흰 고양이 여인만큼이나 충격을 받은 이는 또 있었다.
물론, 그 놀라움의 의미는 크게 달랐지만.
아카데미의 부학장, 멀리건 토르비욘은 진심으로 경악했다.
예상과는 달리, 자신이 의사를 전하는 즉시, 위쪽에서 조력자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감시를 위함인 줄 알았다.
헌데, 막상 도착한 이의 정체를 확인하니 그게 아니라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만한 인물을, 고작 감시자 따위로 써먹을 리가 없으니까.
양지에 십이월과 십이지왕이 있었다면, 음지에는 소위 칠악(七惡)이라 불리는 강자들이 있었다.
지금 멀리건 토르비욘의 눈앞에 있는 이는, 무려 그중 하나였다.
“내가 무얼 도와주면 되지?”
“굳이 도와주진 않아도…….”
“나는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저, 정이 그렇다면… 의심을 사지 않고 소환의 돌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적당히 판을 깔아주실 수 있겠나?”
멀리건 토르비욘의 물음에, 키가 크고 마른 사내가 씨익 미소 지었다.
“쉽군. 그거면 되나?”
“그, 그거면 된다.”
순간 대답을 마친 멀리건 토르비욘이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과 동시에, 역한 혈향이 코끝을 찔러왔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사전에 열어둔 길목일지라도, 이 넓은 아카데미에서 마주치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지는 않았을 터.
감히 짐작하건대, 눈앞의 사내라면 그들 모두를 죽여 없앴으리라.
‘대체 왜 이런 이를…….’
흑사자가 말했다.
소환의 돌을 사용할 생각이라면, 이쪽의 인물들이 조력자로 제격이라고.
중요한 것은, 칠악은 그들의 하수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누구의 지시에도 따르지 않으며, 오직 저들의 관심사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들.
단순히 돈에 휘둘리는 이들도 아니었고, 관심사 또한 제각각이었기에 윗선에서 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더 큰 문제는…
뭉클!
순간 예의 멀대 같은 사내의 신형으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실력이 있으면서도, 칠악이 절대 십이지왕이나 십이월로 인정받을 수는 없는 이유.
이들은 ‘마기’를 사용했다.
“그 마물이 미쳐 날뛸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지.”
말을 마친 그가 이윽고 전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 아카데미 내의 사람들 모두가 밀집해 있는 그곳.
중앙 강당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