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3대 공작가
휘이이이잉!
한겨울의 차디찬 바람이 불어온다.
그에 따라 앙상한 나뭇가지도 이리저리 흔들려 댔다.
마치 홀로 남은 지금의 유리나처럼.
부르르르.
“흐읍…….”
한참이나 전신을 떨어대던 유리나가 이내 긴 숨을 들이켰다.
자존심 따위, 가문이 몰락하던 그날 진즉에 버렸노라 생각했는데.
“근데 왜 자꾸 열이 뻗치는 거냐고!”
홱!
곧 유리나의 사나운 눈초리가 한곳을 향했다.
예의 ‘녀석’이 사라진 그곳.
바로 남자 기숙사가 자리해 있는 방향이었다.
“뭐? 남녀가 유별한데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뭐 쟤를 잡아먹는다고 했나, 기가 막혀서 참나!”
다 좋다.
세상은 넓고, 대륙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으니까.
유독 그런(?) 방면으로 스스로에게 엄격한 성격이라면야 뭐, 이해 못해줄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 모든 점들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혹시 내가 쟤를 좋아한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재차 중얼거린 유리나의 얼굴이 한껏 굳어졌다.
그녀가 구태여 상대에게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달리 있었다.
두 눈으로 처음 본 후천적 각성자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그리고 그 각성자가 같은 화염계 마법사라는 사실이 그 이유였다.
그랬는데…
“아, 정말! 나 같아도 오해할 만 하겠네. 이게 뭐냐고 진짜!”
생각을 이어갈수록 원망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커져만 갔다.
이건 이불킥 한 달.
아니, 최소 일 년짜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 면전에서 그리 단호하게 거절할 건 또 뭐람.”
순간 유리나의 눈꼬리가 확 하고 치켜 올라갔다.
복수라고 하긴 뭣하지만, 골탕 정도는 먹여줘야 직성이 풀리겠다.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그 녀석이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때마침 적당한 무대도 있었으니.
“방학식이라는 거, 귀찮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고맙게 느껴지는걸?”
***
벌컥!
순식간에 방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서는 나를 맞이한 것은, 역시나 룸메이트인 바이커였다.
“뭐가 급해서 그리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거지?”
“야.”
“어?”
“나 여자한테 데이트 신청 받았다.”
“지랄하네.”
“……?”
마치 조건 반사적으로 욕설을 토해내는 상대를 향해 나는 곧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지? 이 이카루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빠른 반응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맞장구라도 쳐주지.”
“맞장구는 모르겠고, 니 얼굴은 쳐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조금쯤은 신뢰가 가는 이야기를 하란 말이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지, 지금?”
“너라면 어떨 것 같은데?”
“뭐?”
“내가 여자한테 데이트 신청 받았다고 하면 어떨 것…….”
“믿겠냐?”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짧게 대꾸하는 나를 보며 바이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개자식.”
“그럼 질문을 달리해서… 만약에 말이야.”
“……?”
“너한테 가문의 마법사가 되는 길과 외부로 나가는 길이 있다면, 너는 어떤 선택을 할래?”
내심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의견도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었다.
장래와는 별개로, 나는 당장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지 않던가?
지금이야 아카데미에 있으니 최소한 먹고 자는 문제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혹여나 퇴학을 당해 외부로 나가게 된다면 완전히 홀로서기를 해야 할 테니까.
그것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돈’이었고.
“가문이라면 우리 가문?”
“응.”
“그럼, 외부는 최소 하위권 마탑 정도는 되어야겠군. 그래야 급이 맞을 테니까.”
다시 말하지만, 바이커의 집안은 왕국의 3대 공작가 중 하나였다.
그 실비아나 제노스와 같은 초 명문가 말이다.
“그렇겠지?”
“꿈이 너무 과한데…….”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을 일, 꿈이라도 꾸게 둬봐. 그래서 대답은?”
“글쎄.”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고민하던 바이커가 곧 의외의 물음을 던졌다.
“우선은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부터 찾아야 하지 않을까?”
“어?”
“왕국 내에서 착실하게 명성을 쌓아, 장차 작위까지 얻어보고 싶다면야 가문의 길을 걷는 편이 낫겠지. 테라로 한정하면, 명문가의 인적 인프라는 누가 뭐라고 해도 왕국 제일이니까.”
“그거야 뭐…….”
“반대로,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름을 날리고 싶다면 마탑을 선택하는 것이 옳아. 이유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겠지?”
“응…….”
“결론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순간 바이커가 내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한데, 왜일까?
녀석의 눈빛 속에 기묘한 불꽃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은.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뜻이야. 특히나, 너처럼 아쉬울 게 전혀 없다면.”
“아쉬울 게 전혀 없다니…?”
“나와는 다르잖아? 너는.”
“…….”
나는 바이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분명 큰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던 것이리라.
명문가의 기대라는 건, 대체로 그런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말이 샜군. 다른 예로,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이런 얘기들을 하잖아? 마탑에만 들어가라,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다 커서 보상받을 거다. 당장 아카데미의 모 선생님도 마탑만 가면 예비 신부들이 줄을 서 있을 거라 말하고 있고.”
“라이언 테일러 선생님 말이지?”
“그래. 한데 정작 그렇게 살면 스스로 행복할까?”
“…….”
“집안의 기대에 부응한다. 그 사실 자체로 만족감을 느낀다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보거든.”
“…….”
“최소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게 그 무엇보다 큰 행복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그저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상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절절히 전해져 왔으니까.
역시 바이커, 이 녀석은…
“그보다, 네 얘기를 들어줬으니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응?”
“방학식 때…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
***
방학식 당일인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화려한 사두마차가 아카데미 입구에 당도했다.
마차 지붕에는 마법사들이 애용하는 위저드 햅 세 개가 부채꼴을 이루고 있었으니.
테라 내에서 이 문양을 사용할 수 있는 가문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지.”
“워워!”
히히히힝!
예의 마차 내부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마부가 급히 말을 멈춰 세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해 주는 건가?”
“그게, 아무래도 위치가 있으시다 보니…….”
“끌끌끌. 이 나라에서 내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된다고.”
딸칵.
곧 마차 문이 열리더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훌쩍 내려섰다.
비록 허리가 굽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였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노인의 정체는…
“할아버지!”
“오, 실비아.”
순간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하나밖에 없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가 직접 마중을 나왔기 때문이다.
“오셨어요?”
와락!
“그래, 그래. 내 새끼.”
곧장 품 안으로 안겨드는 손녀의 등을 연신 쓰다듬던 노인이 곧 거리를 벌렸다.
“어디, 오랜만에 우리 이쁜 손녀 얼굴 한번 보자.”
“헤헤.”
“끌끌끌. 녀석, 아주 다 컸구나. 이제 시집도 가도 되겠어.”
“에이,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 무슨 섭섭한 소리냐? 이렇게 이쁘고 능력 있는 신부감이 또 어디 있다고?”
“그게 아니라요. 저는 할아버지처럼 강한 사람이 아니면 결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걸요.”
“뭐야? 네가 나이 든 노인네를 놀리는구나.”
“저는 진심인데…….”
“예끼! 네 또래에 할애비만 한 능력을 가진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더냐? 그래도 기분은 좋구나. 끌끌끌!”
순간 실비아는 당차게 있노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애써 목구멍 뒤로 삼켰다.
본전도 못 찾을 얘기로, 괜히 점수를 깎아먹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참! 그러고 보니…….”
“응?”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싹이 보이는 친구를 하나 발견했는데요.”
이어지는 실비아의 말에 노인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 말은… 네 예비 신랑감을 찾았다는 말이렸다? 그것도, 할애비만큼이나 실력도 좋은?”
“에이. 할아버지 말씀대로,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던가요? 어디까지나 인재 영입 차원이죠. 능력 있는 인재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함이 없는 법이니까요.”
“흠…….”
노인의 불편한 침음이 이어지자 실비아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이래서 제노스 얘기는 ‘제’ 자도 꺼낼 수 없는 거다.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이전부터 과하다 싶을 정도였으니까.
소리 없는 욕지거리를 내뱉은 실비아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카데미에서도 말이 많은 친구에요. 무려 후천적 마나 각성자거든요.”
그제야 노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후천적 마나 각성자…? 그 아타락시아 페르잔과 같은?”
“네.”
“그건… 제법 흥미가 동하는구나. 그 꼬맹이와 같은 유형이라…….”
잠시 말끝을 흐리던 노인이 재차 물음을 던졌다.
“주력은?”
“일단은 화염계 마법사로 판단됩니다.”
“제법 쓸 만하겠구나. 파괴력만 따지면, 화염계는 여러 마법들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니.”
“그래서 우리 가문의 마법사로 들어오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었는데…….”
“했었는데?”
“거절당했네요.”
“정말이냐?”
“정확히는 생각은 해본다고 했는데요. 아무래도 그 말이 그 말 같아서요.”
“건방진 놈. 감히 우리 가문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어느 놈이냐? 내 직접 그 낯짝을…….”
할아버지가 당장이라도 아카데미로 들이닥칠 듯한 기세를 보이자, 이번에도 실비아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에이스 디 파르마가 미리 선수를 쳤거든요.”
“…십이월?”
“네.”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오느냐? 검사가 왜 마법사 양성기관의 생도를?”
“저도 그걸 모르겠네요.”
“으음…….”
한참이나 고민하던 노인이 이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가 직접 만나보마. 어느 녀석이냐?”
“정말요?”
마침내 원하는 대답이 흘러나오자, 실비아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비록 재능 넘치는 자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뒷전으로 물러났다지만, 아직도 공식 서열 19위에 빛나는 할아버지였으니까.
‘그래 봐야 검사. 제까짓 게 마법사에 환장을 하지, 이래도 그 변태 칼쟁이를 선택하겠어?’
실비아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계획은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모두 들어 있었으니까.
할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그 시건방진 녀석을 가문 내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임무라는 명목으로 실컷 부려먹으며 괴롭힌다.
그러다 쓸모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버리면 그만이고.
아직 랭킹전 때의 앙금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실비아였다.
‘한번 두고 보라지. 나한테 찍히면 어떻게 되는지 몸소 체험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럼 녀석은 내가 직접 만나보기로 하고… 그것과는 별개로, 나도 네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하나 있다만.”
“네?”
그제야 실비아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곧이어,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마차에서 한 사내가 사뿐히 내려섰다.
이목구비가 무척이나 뚜렷한, 남성미가 물씬 느껴지는 북방계 미남자였다.
예쁘게(?) 생긴 제노스와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지는.
중요한 것은, 예의 사내가 실비아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머. 당신은…?”
“오랜만이군.”
마차에서 따라 내리는 사내의 이름은 크리스 론 인버스.
그녀와 같은, 왕국의 3대 공작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