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갈림길
“소름 끼치는 농담은 그만하고.”
떨려대는 내 목소리에, 실비아가 입을 가리며 웃는다.
“어머. 나는 진심인데?”
“진심?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벌레처럼 취급하던 네가?”
“말이 너무 심하다. 벌레라니?”
“그럼 아니라고?”
“물론이야. 세상에 도움을 주는 벌레들이 얼마나 많은데?”
“……?”
조금의 시간이 지나 상대의 말을 이해한 내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뭐 어쩌자고?”
“인정할게. 이전에야 무엇이었든, 지금은 벌레 정도는 되는 것 같아.”
나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러면서 나한테 영업을 하겠다고?”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 귀중한 시간을 너한테 쓰고 있는 거겠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 변태나 뭐 그런 거야? 얼굴에 침을 뱉는 상대에게 오히려 매력을 느낀다든가 하는?”
“선 넘네?”
이런. 흥분해서 말이 막 나왔다.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뻔했네.
지금은 상대가 호의적으로 나오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제든 저 위선 가득한 미소를 가르고, 그 안의 진짜 악녀가 튀어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크흠. 그래서 얼마 줄 건데?”
짧게 헛기침을 한 내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얼마를 원하는데?”
“자유연합에서는 연 200골드를 부르던데.”
“200골드…?”
찰나 멍하니 중얼거리던 실비아가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제법 쌔게 불렀네?”
“돈뿐만이 아냐. 그 위명도 자자한 십이월의 가르침이 핵심이니까.”
“흐음…….”
잠시 턱을 괸 채 무언가를 고민하던 실비아가 곧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치 시린 달을 그대로 박아놓은 듯 신비로이 반짝이는 한 쌍의 은안.
확실히 예쁘긴 예뻤다.
이러니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도 제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거겠지.
물론, 나는 저따위 껍데기에 속지 않을 거지만.
“다시 말해, 너한테 최소 연 200골드에 십이월 이상의 인적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는 건데…….”
“왜? 막상 생각해 보니, 네 능력 밖의 일인가 보지?”
이어지는 내 비아냥거림에 실비아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니.”
“……?”
“오히려 그 반댄데?”
***
기숙사로 향하던 나는 곧장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더는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장님!”
열려 있는 출입문 안으로 들이닥치자, 곧 방의 주인이 시선을 들었다.
“세타…? 안 그래도 내 따로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제가 여러 군데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거든요.”
멈칫.
아주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을 뿐.
곧바로 본론으로 치고 들어오는 내 모습에도, 학장 할아버지는 별반 대수롭지도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일 때문이냐?”
“…네?”
“자유연합에서 네게 한 제안 때문에 이리 급하게 나를 찾아온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어… 알고 계셨어요?”
“모를 수가 있겠느냐?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그 난리를 피워댔으니.”
“괜히 제가 부끄럽네요.”
곧 머리를 긁적이는 나를 학장 할아버지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세요?”
“그냥. 감회가 새로워서 말이다.”
“감회요?”
“그렇지 않느냐?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낱 낙제생에 불과했던 네가, 지금은 아카데미 전체가 눈여겨보고 있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으니.”
“에이. 전체라니, 과장이 심하시네요. 그래 봐야 한두 군데가 전부인데…….”
순간 학장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은, 다른 곳에서도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는 뜻이냐?”
“아… 실비아 스필 세드릭도 비슷한 제안을 하더라고요.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세드릭 가문이라… 분명 훌륭한 곳이지. 누가 뭐라고 해도, 그곳은 우리 왕국을 지탱하는 세 명문가 중 하나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어지는 내 물음에 학장 할아버지가 도리어 반문한다.
“그걸 왜 내게 묻느냐?”
“저 진짜 이대로 아카데미 나가는 수가 있어요? 조금 미뤄졌다지만, 어차피 퇴학 처분도 이미 받은 마당에.”
“마음대로 하거라. 언제부터 네가 내 말을 들었다고?”
“엥? 언제는 제 정체가 발각되면 단숨에 해부당할 거라고 하시더니?”
“그거야 네 힘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거라 판단해서였고.”
“그럼, 이제는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허허.”
근육질의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학장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노인네다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뭐랄까.
마치 손자가 재롱이라도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는 듯하다고 해야 할지.
한데, 또 한편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낯빛이 어두워 보이기도 했다.
그 이중적인 얼굴에, 내 표정 위로도 점차 의문이 깃들어갈 무렵.
“세타.”
“…예?”
“내게 허락을 구하고 싶은 것이라면, 내 대답은 하나다.”
“……?”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
선례가 있었기 때문일까?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
하여, 재차 물음을 던졌다.
“정말요?”
“그래. 네 인생은 네 거다. 누군가 대신 살아주지 않지. 설령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물론 그게 잘못된 길이라면 바로 잡아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겠지만…….”
잠시 말끝을 흐리던 학장 할아버지가 곧 나와 정면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너를 믿고 있다.”
“…….”
“남들이 봤을 때는 비록 게을러 빠진 낙제생에 불과할지라도, 그 성정이 어떠한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지. 너는 다소 나태할지언정, 남에게 피해나 입히며 삐뚤어지게 살아갈 아이는 아니야. 정의감도 제법이고.”
“…….”
“그러니,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그게 무엇이든 나는 최선을 다해 그 결정을 뒤에서 서포트할 터이니.”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솟아 올랐다.
이런 복잡미묘한 기분, 태어나 언제 또 느껴봤던가.
시시각각 표정이 변해가는 나를 보며, 이윽고 학장 할아버지가 마지막 말을 마친다.
“아직 며칠은 남았다.”
“학장님…….”
“스스로 잘 판단해서 처리할 수 있겠지?”
***
햇빛이 내리쬐는 화창한 오후.
오늘이 금요일이고, 주말만 지나면 대망의 방학식이었다.
그냥 단숨에 뚝딱 해치우면 될 걸, 뭐 하러 월요일까지 미루어대나 싶겠지만, 이 또한 아카데미 차원에서 생도들을 배려하는 것이었다.
주말 동안 짐도 싸고, 가족들이 데리러 오는 시간도 벌어주고.
무엇보다 방학식에는 깜짝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러 친지들이 보는 앞에서 생도들이 준비한 각종 공연들을 선보이는 것이 이 이벤트의 핵심이었다.
“귀찮게 뭐 하러 그런 걸 하나 몰라.”
물론 가족이 없는 내게는 해당사항 없음이다.
애당초 태생이 귀찮은 건 딱 질색인 성격이기도 했고.
사실 공연이라고 해봐야 특별할 것도 없었다.
노래가 특기인 아이들은 노래를 부른다던가.
춤이나 차력,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마법을 이용해 불쇼를 선보인다던가 하는 일 따위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먼 길을 온 가족들에게 보답하는, 일종의 장기자랑이랄까?
“…신타?”
“……?”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착각인 모양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드넓은 광장에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뿐이었으니.
지금 아카데미 내부에는, 그야말로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도 끝났겠다, 송별회를 하겠다며 아이들 대부분이 외출을 나가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한데…
“거기 멈춰. 잠깐 나 좀 봐.”
“……!”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다.
“…위?”
휙!
아름드리 두꺼운 나무 위에 올라타 있던 가녀린 인영이 그대로 낙하했다.
족히 4미터는 됨직한 높이.
허나,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예의 인영은 사뿐히 지상에 내려섰다.
“짝짝짝!”
박수가 절로 나오는 레비테이션이다.
무려 3써클에 해당하는 이 공용 마법을 이토록이나 완벽하게 펼칠 수 있는 또래 아이는 몇 없었다.
“마침 잘 만났다. 안에 있는 건 알겠는데, 건물에서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렇다고 내가 남자 기숙사에 들어갈 수도 없고 말이야.”
“너는…….”
분명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 기억에 있다 뿐이겠는가?
아카데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였으니,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학장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 모습’을 목격한 인영의 정체는 유리나 벤 아리에나.
기다란 주홍빛 머리칼을 질끈 묶어 틀어 올린 그녀가, 어딘지 모르게 상기된 얼굴로 다가서고 있었다.
“너 말이야.”
상대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내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아, 일전에는 고마웠어.”
“…응?”
“독은 불에 약하다는 말. 도움이 많이 되었었거든.”
“아, 그거…….”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던 유리나가 곧 표정을 굳혔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어?”
“너, 방학 동안 뭐 하면서 지낼 생각이야?”
“……?”
순간 내 얼굴 위로 의문스러움이 번져 갔다.
상대의 의중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일전의 모습에 대한 추궁이라던가.
혹은, 어떻게 화염계 마법을 쓸 수 있었는지 따위를 물어올 줄 알았다.
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물음을 던져 왔으니.
설마 정말로 내가 방학 동안 무슨 계획이 있는지 따위가 궁금해서 이러는 건 아닐 테고…
“그건 왜…?”
“딱히 할 일이 없으면 말이야.”
잠시 머뭇거리던 유리나가 이내 본론을 끄집어냈다.
“…우리 집에 오지 않을래?”
“…….”
상대의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한참이나 굳어 있던 내 잇새로, 마침내 멍청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