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7화 (18/251)

17화. 들이치는 제안

일명 백마전의 방이라 불리는 수련실 내부.

랭킹전이 끝난 이래, 나는 줄곧 이곳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반드시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바깥의 또래 아이들은 아직도 내가 ‘화염계 마법사’로 각성한 줄로만 알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까짓 거 다 태워 버리겠다는 유리나의 한마디에 번뜩 떠오른 마법이 파이어 볼이었다.

한데, 만약 내가 정말로 전설 속 용혈의 마법사라면…….

분명 다른 계열에 속하는 마법들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파이어.”

화륵!

캐스팅과 동시에 손바닥 위로 솟구치는 자그마한 불꽃.

한 번 사용해 봤기 때문인지 역시나 1써클 마법 정도는 거뜬히 시전되었다.

허나,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었으니.

“물리력을 무효화하는 무형의 막이여, 술자를 보호하는 마나의 방패여…….”

재차 내 잇새로 영창이 흘러나왔다.

파이어와 마찬가지로 1써클에 해당하는 방어계 마법.

생각대로라면 이 또한 무리 없이 펼쳐낼 수 있어야 했지만,

“…지금 이 앞에 나타나 나를 보호하라. 쉴드!”

푸쉬시시시시!

마치 김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삽시간에 주변을 가득 매웠다.

캐스팅은 완벽했다.

마나가 움직이는 경로는 정확했고, 수식의 연산 또한 배운 그대로였다.

한데, 시전에는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한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라더니…….”

“……!”

순간 귓가로 들려오는 생소한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여기에 있었나?”

“바, 바이커?”

비쩍 마른 몰골이 무척이나 눈에 띄는 녀석.

내 하나밖에 없는 룸메이트가 천천히 방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긴 웬일이야?”

“너를 보고 있자니, 나도 자극이 되어서 말이지.”

“…수련하러 왔다고? 그럼, 오늘의 적이라는 말은?”

“마침내 내가 너를 ‘적수’로 인정했달까?”

“…….”

여전하다, 이 녀석은.

경험상 이런 건 침묵이 훌륭한 대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곧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떻게 된 거야?”

“…….”

“이 나조차 꽤나 놀랐다고? 설마하니 네가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을 꺾을 줄은.”

“…….”

“거기에 예고도 없는 각성이라니. 무언가 특별한 행운이라도 얻은 건가?”

“…….”

“…훗.”

연이어 내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녀석.

“실례했군.”

“……?”

“허나, 벌써부터 그리 견제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야 내 시야로 들어왔다는 의미였을 뿐, 내 호적수는 오직 제노스 델 카이클 하나뿐이니까.”

“…아, 예. 그러시겠죠.”

줄곧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나는 기어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정신 좀 차리라며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지만, 이 녀석의 가문이 걸렸다.

삼대 공작가라면 이미 다른 한 곳에 단단히 찍혀 있지 않던가?

그것도 이 구역의 소문난 미친 아이에게.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 모양이지?”

“…응. 그보다, 수련하러 왔으면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 보는 건 어떨까?”

“그 전에, 네게 충고 하나만 해주지.”

“충고?”

차라리 내가 자리를 떠나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바이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들을 토해냈다.

“네 퇴학. 당분간 보류됐다고 하는군.”

“어? 정말?”

“곧 방학이니, 그 이후에 네 처분에 대한 징계심의회를 다시 열겠다고 한다.”

“그런 얘기는 전혀 못 들었는데…….”

“후후후.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확실한 정보라는 거지?”

내 반문에 바이커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너도 짐을 싸는 건 잠시 멈춰두라고. 이번 기회에 마탑에서 시험이라도 해본다면 더 좋고.”

“마탑…?”

“각성한 힘을 가늠해 보던 참 아니었나?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야 훨씬 도움이 될 테고. 어차피 방학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을 텐데?”

그건 맞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돌아갈 가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마탑이라.

나 또한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 망라되어 있다고 알려진 그곳이 아니던가?

물론 이런 얘기를 곧이곧대로 꺼냈다간 당장에 학장 할아버지에게 불호령을 들을 테지.

그렇다 하더라도…

‘학장 할아버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힘이라면, 결국 이 안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극히 적어. 그럴 바에야, 스스로 나서서 정보를 찾아가는 게 나을지도…….’

내가 용혈의 마법사라는 건 순전히 ‘추정’일 뿐이다.

그조차 극소수를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고.

남들은 내가 화염계 마법사로 각성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적당히 힘을 숨기면 그리 우려할 만한 일도 벌어지지 않을 듯했다.

‘두 달이면 시간도 충분하니까.’

마탑이 꽤나 먼 거리에 있다지만, 아카데미는 1월과 2월을 통째 방학으로 운영했기에 여유가 있었다.

상념을 이어갈수록 내 생각은 점차 긍정으로 굳혀져 갔다.

그 순간.

“뭐야, 당신? 여기는 외부인 출입 금지인데…?”

“……?”

당혹감이 묻어나는 바이커의 목소리에, 내 고개가 그쪽을 향했다.

곧 상당히 호감형의 미남자가 시야로 들어왔다.

그 파격적인 등장이 아직도 뇌리에 뚜렷이 남아 있는 사내.

“안녕?”

“어라? 아직도 안 가셨어요? 랭킹전이 끝난 지가 언젠데…….”

“용건이 남아 있으니까. 곧바로 찾아오고 싶었는데, 늙은 여우와 담판을 짓느라 조금 늦었네?”

“…예?”

“둘이서 얘기하고 싶은데, 잠깐 괜찮을까?”

그리 말하면서 뒤쪽 출입문을 가리키는 십이월의 한축.

사내, 에이스 디 파르마를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

새까만 어둠만이 가득한 밀실.

빛이라고는 한가운데 자리한 통신용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전부인 그곳.

“아즈문 사트리노에게 조건을 내건 것. 후작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 달리 할 말이 없군. 미안하네. 소문의 낙제생이 그 ‘후천적 마나 각성자’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

“…분명 예상 밖이긴 하나, 불필요하게 조건을 과히 거셨습니다. 향후 아카데미의 대소사에 관한 ‘전권’을 일임하다니요.”

- 제 목을 걸겠다지 않은가? 애당초 왕정에서도 말이 많았던 문제네. 정치판에서 아이들의 아카데미에 너무 깊숙이 개입한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으니까.

“그런 말로는…….”

- 뭐, 좋게 생각하지. 차라리 잘되었지 않은가? 훗날 자네가 학장의 자리에 오르면, 그 힘을 고스란히 가질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니.

“…어디까지나 계획대로 진행되었을 때의 얘기겠지요. 이제는 상황이 변했지 않습니까?”

- 아니. 변한 건 없네. 아무것도.

“예?”

- 흑사자에게서 연락이 왔네.

“……!”

재차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수정구 앞 검은 인영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 말씀은…?”

- 고작 아카데미 하나에 기력 쏟는 건 이만하자더군. 요점은 아카데미 자체가 아니라, ‘역린’을 눈치챈 아즈문 사트리노가 아니겠는가?

“지금 말씀. 제 귀에는 그저 가볍게 들리지는 않습니다만…….”

- 자네 생각이 맞네. 조만간 위에서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더군.

“……!”

예의 인영이 흠칫 몸을 굳혔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할 그가 아니었으니까.

“설마…….”

우우우웅!

일순간 수정구 속의 빛이 강해졌다.

그와 동시에, 잠시간 드러나는 인영의 얼굴.

주름진 얼굴이 나이를 쉬이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그는, 분명한 아카데미의 부학장.

멀리건 토르비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거기까지 하지. 아무래도 그곳은 듣는 귀도 많을 테니.

“…….”

곧바로 입을 다무는 부학장을 향해 이윽고 수정구 속 사내가 마지막 말을 마친다.

- 준비만 하고 있게.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내 판단으로, 아즈문 사트리노는 길게 봐야 이번 학기가 마지막일 것인즉.

***

“곧 방학이다. 이제 랭킹전도 모두 끝났겠다, 너무 들떠만 있지들 말고, 이럴 때일수록 개인 훈련에 박차를 가하도록.”

“네에에에엣!”

마침내 학기 마지막 수업도 완전히 끝이 났다.

곧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귓가를 때려댔지만, 내 신경은 온통 한 곳에 쏠려 있었다.

다시 찾아온 십이월.

질풍의 검객, 에이스 디 파르마.

그가 내게 건넨 제안은 실로 단순명료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연합으로 와라. 스승이 어떻느니 하는 말 따위는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겠다. 무릇 백 마디 말보다 조건이 상대의 가치를 정하는 법. 최고 수준으로 대우해 주겠다. 초봉으로 200골드를 주지.’

물론, 그 내용은 전혀 단순하지 않았지만.

연 200골드는 경력이 최소 10년 차 이상 중에서도 중간 관리자급 정도는 되어야 받아볼 수 있는 돈이다.

이건 사실 나도 몰랐는데, 상대가 설명해 줘서 알았다.

거짓말 아니냐고?

설마 그 십이월이 일개 코흘리개 생도를 상대로 뻥이나 치겠어?

더욱이, 다른 건 몰라도 일반적인 2써클 마법사가 대륙 최고라 불리는 마탑에서 받는 대우조차 그 반의 반도 안 된다는 사실은 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왜 그런 후한 조건을 나한테 내건 걸까?”

상념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기숙사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한데 어째 뒤통수가 뜨뜻미지근했다.

분명 밤길에 뒤통수 조심하라는 격언이 있다지만, 지금은 대낮.

그것도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대로 한복판이건만.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흥. 누가 누구를 따라간다는 거야?”

“아님 말고.”

“…진짜 뭘 믿고 이러는 건지.”

걸음을 빨리한 은발의 소녀가 순식간에 내 앞을 막아섰다.

“따라오는 것 아니라더니?”

“혹시 들어는 봤나 모르겠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혹시 랭킹전의 일 때문에 속 좁게 이러는 건 아니지? 에이, 설마 그러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세드릭 가문의 장녀신데.”

“됐고.”

마치 귀찮은 날 파리라도 내쫓는 양, 한차례 손을 휘저은 실비아가 말을 잇는다.

“가지 마.”

“…가지 마? 어디를?”

“분명 자유연합에 몸을 의탁할 생각이겠지? 고작 일개 생도에게, 십이월이라는 이름은 그리 가볍게 들리지 않을 테니까.”

…깜짝 놀랐다.

얘가 그걸 어떻게 아나 싶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첫 만남에는 분명 이 계집애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지, 아마?

“너는 모르나 본데, 이제는 내가 급할 게 전혀 없거든?”

“그래? 퇴학은 잠시 뒤로 미뤘다지만, 그래도 벌인 짓이 있으니 지레 겁먹고 행동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모를 리가 없나?”

하기야 그 바이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내 걱정해 주는 건 아닐 테고… 다른 걸 다 떠나서, 나한테 화난 것 아니었어?”

“화…? 훗, 글쎄. 나는 순간의 감정에 치우쳐서 투자까지 망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

역시 눈앞의 상대는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나한테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 내게 도움이 되는 존재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시네.”

“그래서 대답은?”

이어지는 실비아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을 조금 해봐야겠는데?”

“설사 내가 아니더라도 고민거리는 여전히 남아 있을 텐데?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이 아니라면, 손을 내밀어줄 때 잡는 게 좋을 거야.”

“…….”

아무래도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 얘기를 하는 듯싶었다.

한데, 갈수록 의문이다.

아쉬운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얘가 이리 나올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의문은 그대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왜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그리 묻는 내게, 실비아는 실로 경악할 만한 얘기를 한다.

만약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이 들었다면 당장에 기뻐 날뛰겠으나,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섬뜩하게 들리는, 그런 말을.

“네게 흥미가 생겼거든.”

“…….”

지금 이 순간 새빨간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는 그녀는, 언젠가 본 거대 거미를 꼭 닮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