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망했다
두두두두두두!
호화로운 사두마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한다.
철통같이 주변을 둘러싼 호위만 최소 오십여 명.
일견 보기에도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는 그들은 하나같이 최정예 기사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조차 범상치 않은 인물일 거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마차 내부의 주인공은,
“흥흥흥~”
평소의 생도복을 벗고 눈에 확 튀는 새하얀 드레스까지 차려입은 실비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맞은편에서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 사내가 미소 지었다.
“즐거운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래 보여요?”
“예. 근래에 보기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흐응.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어서 그런가?”
짐짓 능청을 떤 실비아가 눈앞의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혹, 제가 방문한다는 소식이 벌써 카이클 가문에 전해진 건 아니겠죠?”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께서 당부하신 일도 있고 하여, 제가 직접 입단속시켰으니까요.”
“역시 맥심 경이네요. 아마 다들 깜짝 놀라시겠죠? 그도 그럴 게, 지금 아카데미는 랭킹전이 한창 진행 중일 테니까요.”
이어지는 실비아의 말에 중년 사내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얼굴 위로는, 한가득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줄곧 실비아의 근접호위를 맡아온 그는, 세드릭 가문 내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실력 있는 기사였다.
그 경지가 무려 엑스퍼트 중급에 이를 정도로.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이보다 뛰어난 기사는 백을 넘기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 수준은 더 거론할 필요조차 없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제노스가 부럽군요.”
“네?”
“이런 미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지 않습니까?”
“어머, 관심이라니요. 같은 학년 친구잖아요? 이게 당연한 거죠.”
그리 말하면서도 실비아의 표정은 가히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물론입니다. 겸사겸사 아가씨께서 자리를 빛내주신다면, 양가의 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테고요.”
“그것까지 바란 건 아니지만… 괜히 카이클 공작님께 죄송하네요. 작년에도 참석했으면 더 좋았을걸.”
“그분이 아가씨의 그런 마음을 모르실까요. 당장 자신의 핏줄 또한 같은 아카데미 생도인데요.”
“그리 생각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지만…….”
“분명 그리 생각하실 겁니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는 건, 공작님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그제야 실비아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맥심 경은 여자 마음을 너무 잘 아시네요. 그러니 귀부인께서 헤어 나오질 못하시는 거겠죠?”
“누가 들을까 두렵습니다.”
“진심이에요.”
훈훈한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허나, 신은 차마 그 눈꼴 시린 모습을 두고만 보고 계실 수 없으셨던 것일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스르륵.
“아, 아가씨!”
“……?”
순간 실비아와 맥심의 고개가 동시에 앞을 향했다.
어느새 마부석 쪽 벽면에 자리한 작은 창문이 활짝 열어 젖혀진 채였다.
그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민 사내가 꽤나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을 잇는다.
“지금 막, 일전에 명하신 통신용 수정구에서 반응이 있었습니다만…….”
“벌써요? 아카데미 쪽에서 연락이 왔다는 말씀이시죠?”
“예. 한데 그 내용이 좀…….”
더는 말을 잇지 못하는 사내를 보며 실비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변이라도 벌어졌나 봐요? 제가 부탁드렸던 건, 분명 유리나 벤 아리에나와 관련된 일로 기억하는데. 혹 그 애가…?”
“아닙니다. 그녀는 4위에 랭크된 우드게이트 폴 루메우와 대전을 치뤘고, 보란 듯 승리를 따냈습니다.”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실비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네요. 제 친구지만, 그 아이도 참 독한 구석이 있단 말이에요? 순위와는 별개로 상성이 좋은 상대만 골라, 골라.”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네?”
“그 다음 대전.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이 졌습니다.”
“……!”
이건 꽤나 의외였는지,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예상 밖이긴 하네요. 상대는요? 5위와 6위. 그러니까 아르벤과 크로커는 서로 맞붙을 줄 알았는데…….”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이름들은 아니었습니다.”
“네? 그, 그럼 기존의 순위가 뒤집어졌다는 뜻인가요?”
“제가 생도들의 순위까지 다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전해 들은 바로, 아이작 가문의 후계를 꺾은 건 분명 ‘세타 쿤 이그니스’라는 이름을 가진 생도였습니다.”
“세타 쿤 이그니스…?”
순간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법 익숙한 이름이기는 한데, 기억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녀조차 퍼뜩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가장 큰 문제는…….”
“……?”
“그 생도가 아가씨에게 도전권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돌고 돌아, 마침내 사내가 본론을 끄집어냈다.
상대의 말을 퍼뜩 이해하지 못한 실비아가 일순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데미 측에도 이미 문의를 해봤다고 하는데, 오후까지 오지 않으면 자동으로 기권 처리하겠다고…….”
“잠깐, 잠깐만요.”
실비아가 손을 휘저어 예의 사내의 입을 가로막았다.
“그 세타 뭐시기가 제게 도전권을 행사했다… 그 말인즉, 이전의 대전에서 도전권을 행사한 건, 다름 아닌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 본인이라는 뜻이겠죠?”
“아, 예. 맞습니다.”
“…이상하네요. 그 녀석은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은 싸움은 절대로 하려 들지 않아요. 질 게 뻔한 싸움이라면 더더욱. 내가 그 성정을 잘 알지.”
“음… 아무래도 자신보다 하위에 랭크되어 있던 생도였으니, 설마 질 거라고 생각이야 했겠습니까?”
“그래서에요.”
“예?”
“상위 50위권 안쪽의 생도들은 전부 제 머릿속에 들어 있어요.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을 꺾은 아이는 그보다도 더 밑이라는 의미죠. 한데, 이겨야 본전인 싸움에 괜한 힘을 빼는 유형도 아니거든요. 그 녀석은.”
“아…….”
대답을 이어가면서도 실비아의 의문은 점차 깊어져만 갔다.
도대체 누굴까?
기실, 그녀가 고민도 않고 랭킹전 불참을 결정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1위니 3위니.
그런 서열과는 별개로, 감히 자신을 상대로 빈집털이나 할 만한 간 큰 이는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의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명문 가문들은 모두 탑재되어 있는 그녀의 뇌 내에도 이그니스라는 이름은 지극히 생소했다.
다시 말해 원래 실력은 하위권에 불과하고, 뒷배마저 보잘것없는 동급생이 자신에게 도전권을 행사했다는 뜻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이건 꼭, 잃을 거라고는 전혀 없는 이처럼 보이지 않은가?
“가만…….”
생각해 보니 근래에 그런 사람이 있기는 했다.
“…이제야 기억났다.”
세타 쿤 이그니스.
그 ‘낙제생’이 분명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정답에 이른 실비아의 얼굴 위로, 얼음장 같은 싸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
곧이어,
“…말머리 돌려요.”
“예? 그, 그 말씀은…?”
멍하니 반문하는 사내를 뒤로하고, 마침내 하이 톤의 고성이 마차 내부를 가득 매웠다.
“아, 당장 말머리 돌리라고!”
***
학장실 내, 홀로 남은 아즈문 사트리노는 몇 번이나 제 턱을 쓰다듬었다.
“전쟁이라…….”
그리곤 방금 나눈 대화들을 떠올렸다.
현재의 대륙은 그야말로 완벽한 독주 체제였다.
1개의 제국.
그리고 일곱 개의 왕국과 하나의 공국이 각지에 산재한 당대의 이그란트 대륙.
기존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국가가 존재했다.
특출난 강대국도, 약소국도 없는 십 수 개의 나라들이 서로를 견제해 왔고, 대륙은 오랫동안 폭풍전야와도 같은 평화기를 맞이했다.
그런 이그란트 대륙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약 백여 년 전.
야만인들이 대거 거주했던 북부 지역에, 한 명의 영웅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북방의 별이라 불렸던 그는 고작 3년 만에 수십 개나 되는 크고 작은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했다.
이는 근 수백 년간 아무도 이루어내지 못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품에 안은 부족장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국가를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제국의 전신인 스왈로우 연합국이었다.
이후, 그의 행보는 이름 그대로 패왕의 길이라 불릴 만했다.
마지막까지 반기를 드는 북부의 거대 부족 두 곳을 끝끝내 집어삼키고, 대륙 중북부에 위치한 3개 왕국마저 단숨에 흡수했으니까.
여기까지 고작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여덟 개 왕국들은 그때서야 부랴부랴 동맹을 맺었다.
그 시점에, 이미 국토의 절반을 잃은 스란은 일개 공국으로 격하되었고.
뒤이어 맺어진 대륙의 국약(國約).
하나, 여덟 국가는 스왈로우 연합국의 정체성을 인정한다.
둘, 전쟁으로 인한 영토와 전리품들은 모두 스왈로우에 귀속되며, 타국은 이를 수용한다.
마지막으로, 스왈로우 연합국이 대륙의 유일무이한 ‘제국’임을 받아들인다.
당시 스왈로우는 진심을 증명받고자, 각국을 상대로 왕의 혈서를 받아냈다.
단 한 곳도 빠짐없이.
오늘날의 완벽한 1강 7중 1약 체재가 탄생하게 된 계기였다.
“비록 대통일 전쟁은 그걸로 막을 내렸지만, 지난 백 년간 스왈로우는 싹이 보이는 뿌리는 철저하게 짓밟아왔지. 그런 제국이 당대에 때아닌 홍역을 앓고 있으니…….”
사람들은 모른다.
자유연합이 제아무리 떠오르는 신흥강자라지만, 그래 봐야 일개 집단일 뿐.
대륙의 패자(霸者)인 제국의 힘에는 감히 비할 바조차 되지 못한다.
스왈로우가 이렇게나 연합에 날을 세우는 이유는, 단순히 폭발적인 성장 때문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제국에 역린이나 다름없는 그 비밀을, 아즈문 사트리노는 알고 있었다.
그는 확신한다.
지금 폭풍의 눈은 다름 아닌 자유연합이라는 것을.
“그런 핵의 한복판에 세타가 간다…?”
절대로 안 될 말이다.
거긴 죽으러 가는 곳이니까.
살길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완전한 무덤.
차라리 자신이 품에 안고 계속 키우는 편이 나았다.
오전에 있었던 세타의 대전을 그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지 않은가?
감히 예상하건데, 괜찮은 스승만 곁에 있다면 시대에 이름을 날릴 대마법사도 노려볼 만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이미 결정된 일. 과연 위에서 이걸 가만히 두고 볼지…….”
재차 중얼거리던 아즈문 사트리노가 다시금 마음을 바로잡았다.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다.
그 아이는 자신이 지켜주기로 맹세했으니까.
허나, 그런 아즈문 사트리노조차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었으니.
정작 당사자인 세타는 그와 전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
“꽁승 개꿀.”
대기석 한편에서 다리를 쭉 뻗고 자리 잡은 나는 홀로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자기네들 개인 사정이고 뭐고, 내가 알 게 뭐야?
꼴지를 넘어 7등을 지나, 단번에 3등까지 안착할 수 있는 길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자고로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싸움이 가장 큰 대승이라고 했다.
그 정점은 누가 뭐래도 ‘빈집털이’가 아니겠는가?
물론 다른 생도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알면서도 왜 나처럼 안 하냐고?
미쳤나.
당장 집을 비운 두 사람이 왕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공작가 자제들인데.
“나야 상관없지만.”
이리 흥얼거리고 있자, 지금 막 다음 경기를 끝낸 사회자가 후다닥 뛰어왔다.
“위, 위에서 허가가 내려왔다.”
“오. 그 말씀은?”
“규정상 네가 실비아 스필 세드릭에게 도전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군.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사회자가 조심스레 묻는다.
“정말로 괜찮겠나?”
“뭐가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세드릭 가문은 폐하께서도 각별히 생각하시는 개국공신 집안으로, 그 영향력은 아카데미까지…….”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 것 같았기에 나는 재빨리 그 입을 막았다.
“저 어차피 퇴학인데요?”
“…응?”
“학기말 시험을 3번이나 낙제했거든요. 이제 곧 짐 싸서 나가야 해요.”
“뭐, 뭣…!?”
이런 말은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 사회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또 다른 한쪽에서 사태를 주시하던 라이언 테일러가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는 따로 있다.”
“예?”
“이왕지사 아카데미를 나가게 됐겠다, 분명 조금이라도 서열을 올려서 외부 집단에 고평가를 받을 생각이겠지? 허나, 세드릭 가문은 마탑 내에서도 영향력이 상당한 곳이다. 네가 왕국을 완전히 벗어나더라도, 다른 집단 내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음… 시간이 약이라고들 하는데, 이 정도야 뭐 조금 지나면 금세 잊어버리지 않을까요? 제가 떠나면 랭킹이야 금방 원래대로 복구될 테고.”
“나도 아는 실비아의 성격을, 동급생인 네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만.”
어라.
아무래도 스승인 이분도 그 못돼 먹은 성격을 이미 알고 계시는 모양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쫓아다닐 거다.”
“…그건 좀 무섭네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도전권을 물러라. 꼭 3등이라는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2써클 화염계 마법사라면 어느 집단에서도 환영받을…….”
라이언 테일러는 채 말을 마치지 못했다.
“세타 쿤 이그니스으으으으으으으으!”
“…….”
나와 라이언 테일러 선생님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저 목소리, 설마…….”
“당장 나와아아아아아!”
거짓말처럼 우리 둘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대연무장 위.
그곳에, 평소 가지런하던 머릿결이 온통 봉두난발이 된 은발의 여자아이가 콧김을 펑펑 뿜어대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 정도 시간이면, 아무래도 워프 게이트를 이용한 듯싶구나.”
“워프 게이트…?”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먼 거리를 단번에 이동할 수 있는 워프 게이트는 귀족들도 여간해서는 잘 이용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텔레포트 계열 마법 자체가 고써클에 해당했기 때문에 비용이 상상을 초월했으니까.
거짓말 좀 보태서, 그 돈이면 명마라 불리는 1등급 말을 10여 필은 살 수 있을 정도?
제아무리 돈이 썩어 넘친다지만, 아카데미에서 불과 하루 정도 떨어진 거리에 본가가 있는 카이클 가문까지 이동하면서, 그만한 돈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내 상식 선에서는.
“나오라고, 이 썩을 자식아아아아아아!”
“저 미친…….”
내 잇새로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실비아 스필 세드릭.
연무장 위의 저 산발 머리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독한 계집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