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대륙의 판도
“앉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한 쌍의 남녀가 바로 맞은편에 앉는 것을 목도한 아즈문 사트리노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온 목적이 뭔가?”
“이런. 식사는커녕 차도 안 내주시는 겁니까?”
“그저 인사치레였으니까. 정 원한다면 교내 식당 정도는 이용하게 해줄 수도 있네. 여기 밥맛이 썩 괜찮거든.”
“허. 설마하니 ‘그 위명도 자자한’ 대지의 마법사님께서, 돈이 없어 제게 학식이나 대접하려는 건 아니실 테고요.”
“돈뿐이겠나? 시간도 없네. 그 점은 피차 마찬가지 아니었나?”
에이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테라에 소문난 쫌생이가 있다더니…….”
“연합에 소문난 변태가 있다는 얘기도 내 익히 들어왔네.”
“벼, 변태?”
“몰랐나? ‘그 위명도 자자한’ 십이월의 여덟 번째가, 실은 아이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통이나 까고 다니는 노출증 환자라는 사실은, 이미 우리 교내에도 쫙 퍼진 사실이네만.”
“풋!”
가만히 눈치만 살피던 세실리아가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묘하게 날이 서 있나 싶더라니, 이제야 상대의 의중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보게, 자네 부하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가?”
“으흠. 죄, 죄송합니다.”
잠시 골이 난 표정으로 세실리아를 노려보던 에이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질책하시는 거라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찬밥신세인데요?”
“찬밥신세라… 뭐, 자네가 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질 수도 있지.”
“질문이요?”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자유연합은 외부 활동에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지 않나? 그런 상황에서 조직의 2인자나 다름없는 자네가 직접 예까지 행차했는데, 내 어찌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잽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건 여전하시군요.”
순간 에이스가 쓰게 미소 지었다.
“상황이 어렵다고 조직의 미래까지 포기할 수야 있겠습니까?”
“분명 인재를 등용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는 자네의 대답이 다르게 해석되네만.”
“예?”
“아직은 버틸 만하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아닌가?”
“…….”
이어지는 아즈문 사트리노의 말에,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에이스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서 제가 싫어하는 겁니다.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분들과 자리를 함께하는 거요.”
“부정하지 않는군.”
“학장님 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싫어도 알게 되는 정보들일 테니까요.”
“뭐, 나 또한 부정하지는 않겠네.”
“무얼 우려하시는지는 대강 짐작은 갑니다. 허나,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자고로 열 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지.”
“그 말씀인즉,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에이스의 잘생긴 얼굴이 대번에 찡그려졌다.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세실리아가 재빨리 중간에 끼어들었다.
“학장님! 사실입니다. 저희 싸움에 생도들을 희생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면, 증명해 보게.”
“즈, 증명이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네. 스란 공국에서 본격적으로 연합에 칼을 빼 들었다는 것도. 그 뒤에 ‘제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건… 학장님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대륙의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뒤에서는 온갖 더러운 짓을 벌이는 그들의 행태를요!”
세실리아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열변은 토했다.
아무리 집단과 국가는 별개라지만, 명실공히 일인자가 보는 시선은 또 달랐다.
당대의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스왈로우 제국.
오늘날 그들이 암약에서 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떡잎이 보이는 싹은 미리 제거해 왔다.
무려 백 년 동안이나.
구태여 통일 전쟁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여타 왕국들은 스왈로우가 대륙의 유일무이한 ‘제국’임을 인정했고.
뭇 집단들도,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곧 제국이라고 해야 할까?
당대에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십이월과 십이지왕.
총 24명의 인물 중 무려 절반 이상이 제국 소속이었으니까.
“제국은 단지 저희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이유로 짓밟으려 하고 있는 겁니다. 언제나처럼!”
“단순히 세가 커진 자네들을 견제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나? 정점이라는 자리는 원래 그런 것이니…….”
“한 달 만에 세금을 40퍼센트나 올려 받는 행동을 단순히 견제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건 우리더러 망하라는 말과 같다고 봅니다!”
자유연합 본사가 위치한 곳이 바로 스란 공국이었다.
물론, 이 또한 현 연합주가 고심 끝에 선정한 위치였다.
대륙 정중앙에 자리해 있으며.
여타 다른 나라들에 비해 그 세율이 무척이나 낮았으니까.
연합주는 공왕과의 독대를 통해 이 세율을 더욱 저렴하게 만들었다.
조직을 안정적으로 키우겠노라는 생각을 가진 그와 건실한 수입처를 얻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공왕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물이었다.
한데 그런 공왕이, 갑작스레 사전 통보도 없이 세금을 대폭 인상했다?
그것도 자유연합 본사가 자리한 특정 지역에 한해서?
바보가 아니라면 그 뒤에 누가 있을지 보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었다.
“40퍼센트라…….”
“너무 과한 처사 아닌가요? 당장 직원들 월급부터 걱정해야 할 상황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즈문 사트리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네. 그리고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나는 보다 확실하게 하자는 뜻이었으니.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근래에 분위기가 조금 민감하다네.”
“분위기요…?”
세실리아의 반문에 아즈문 사트리노가 표정을 굳혔다.
“자네들은 제국이 자유연합만 견제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아니야.”
“예?”
“당장 우리 왕국만 해도 제국의 사주를 받은 모리배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
순간 세실리아와 에이스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여졌다.
“평화가 너무 오랫동안 이어진 게지. 팽창할 대로 팽창한 힘이 내부 곳곳에서 분열의 조짐을 보이니, 황제는 그것을 제 나라가 아닌 다른 외부로 분출하려는 게야.”
“그런……!”
“자체적으로 조사는 해오고 있네만… 그들의 힘이 내 예상을 까마득히 뛰어넘어. 나조차 자리를 걱정해야 할 처지니까.”
“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학장님이 그간 해오신 일들이 있는데…….”
세실리아는 당황했다.
눈앞의 인물이 누구던가.
테라의 살아 있는 전설.
대지의 마법사 아즈문 사트리노가 바로 그 아니던가?
“그 전에, 지금부터는 조금 깊이가 있는 얘기네만…….”
“…아!”
세실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상대의 의중은 명확했다.
자신에 대한 축객령.
자격이 없는 이는 이만 빠지라는 의미다.
“하, 하면 저는 잠시 나가 있겠…….”
순간 말을 잇던 그녀의 팔을, 에이스가 조용히 붙들었다.
“에이스 님…?”
“조직에서 신뢰받고 있는 유능한 인재입니다.”
“…….”
“더불어, 제가 가장 믿고 있는 수하이기도 하고요.”
“……!”
재차 귓가로 틀어박히는 에이스의 목소리에, 세실리아의 동공이 잘게 요동쳤다.
설마하니, 평소 가볍기 그지없던 자신의 상관이 이런 말을 대놓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보기 좋군. 하면, 이대로 계속해도 되겠나?”
세실리아를 향해 한차례 옅게 미소 지어준 에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까 자네도 얘기했지만, 나 정도 위치에 오르면 모르고 싶어도 자연히 알게 되는 정보들이 있네.”
“부디 제게도 베풀어주시지요.”
“음. 결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머지않아 대륙에 큰 사달이 일어날 것 같아.”
“사달… 말씀이십니까?”
“전쟁 말이네.”
“……!”
에이스와 세실리아가 대경하여 기함했다.
“전쟁… 전쟁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믿기지 않겠지. 근 한 세기 동안이나 이어진 평화니까. 나도 아직 확실한 건 아니네.”
“하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에이스가 한껏 굳은 얼굴로 반문하자, 아즈문 사트리노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얘기는 연합주와 함께하지. 조만간 내 연합에 방문할 테니.”
“지, 직접 와주신다고요?”
“미리 얘기하지만, 특별히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네. 나도 입장이라는 것이 있으니.”
“아… 그거야 뭐,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 말하면서도 에이스의 표정은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직접 와준다는데, 이보다 더 괜찮은 제안이 어디 있겠는가?
“단, 조건이 있네.”
찰나, 에이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조건… 말씀이십니까?”
“세타, 그 아이를 노리고 있다지? 그것도 자네가 직접.”
“아…….”
순간 ‘세타’라는 이름에 고민했으나, 에이스가 금세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문의 제노스 델 카이클을 봤다면 모를까.
이곳에 와서 자신이 관심을 가진 아이라면,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역시 학장님이 직접 키우시는 아이였습니까?”
“긴말 않겠네.”
“예?”
“그 아이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말아주게.”
“……!”
설마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얘기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지, 에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내 조건이야.”
***
다시 랭킹전이 진행되고 있는 중앙 대연무장.
“…….”
장내는 삽시간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카데미의 낙제생.
만년 꼴찌인 내가, 무려 서열 7위에 랭크된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을 꺾었는데도 환호 따위는 없었다.
뭐,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저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라고 생각할 테지.
특별히 볼 만한 거리도 없었고 말이지.
나조차 얼떨떨한데, 다른 관중들이야 오죽할까?
“너, 너… 각성을 한 것이냐?”
어느새 날 듯이 뛰어 올라온 환영의 마법사, 라이언 테일러가 다그쳐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요?”
“화, 화염계열 마법사로?”
“아직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
“일단 마무리부터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그렇지.”
그제야 라이언 테일러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전을 직접 주관하는 사회자조차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자신이라도 나서야겠다고 판단했는지, 라이언 테일러가 재빨리 소리 증폭 마법을 시전했다.
“상대가 실신하였기에 이번 시합의 승자는 7년차 생도 중 500등, 세타 쿤 이그니스가 승리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그, 그럼 다음 대전은…….”
당황한 그가 기지를 발휘해 곧장 다음 경기를 이어가려는 순간.
“죄송한데…….”
“…응?”
“저는 아직 도전권을 행사하지 않았는데요?”
“……!”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상대가 시야로 들어왔다.
랭킹전의 또 다른 규칙.
일명 도장깨기.
승리를 거머쥔 생도는 곧장 다음 상대를 지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나 따위가 곧바로 도장깨기를 시전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네, 네가 도전권을 행사한다고?”
“안 되나요?”
“규, 규정상 안 될 건 없지만… 대체 누구를?”
멍하니 중얼거리는 상대를 보며 내 미소가 점차 짙어졌다.
내친걸음이라고 했다.
벌써부터 설레어오는 이 마음.
평소 줄기차게 나를 괴롭혀 오던 녀석을 거하게 물 먹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냥 놓칠 수야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