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외부 인사
쿵! 쿵! 쿵!
여기, 콧김마저 펑펑 뿜어내며 발을 놀리는 한 소녀가 있었다.
“사람 바보 만드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사람이 저만큼이나 뻔뻔스러울 수가 있지?”
또래 아이들에 비해 확연히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소녀의 이름은 유리나.
세가 기운 아리에나 자작가의 여식이자, 고작 열여섯의 나이로 4써클을 마스터한 천재가 바로 그녀였다.
“그 애.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에게 덤벼들 땐, 욱하는 마음에 잠시 돌아버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 추정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분에 일의 확률로, 그 아이에게 숨겨둔 한 수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양아치를 혼내주기라도 할 건가?
이 왕국의 실세인 아이작 후작가를 등에 업고 있는 녀석을?
그게 가능했다면, 유리나 그 자신이 이미 오래전에 손봐줬을 것이다.
“태워 버리겠다고 겁은 줬지만, 진짜 그럴 수는 없잖아? 다음날이면 당장에 우리 가문이 풍비박산 날 텐데…….”
순간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유리나가 멈칫했다.
“…근데, 생각해 보니 걔는 걱정할 가문도 없잖아?”
분명 천애고아라고 했으니까.
이름은 몰라도 이런 건 또 확실하게 기억하는 그녀였다.
기실, 학장님이 직접 데려온 낙제생에 대한 일화야,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묘하단 말이야. 아까 일도 그렇고, 학장님도 저렇게까지 하시는 걸 보면 분명 걔한테 뭔가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뭐가 있다는 거지?”
“…어?”
땅만 보며 걷고 있던 유리나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곧 그녀의 시야로, 수려한 외모를 가진 금발의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제노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길래,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는 거야?”
“야, 마침 잘 만났다.”
예의 금발의 주인공, 제노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 만났다니…….”
“들어봐 봐. 내가 방금 무지무지 황당한 일을 겪었거든?”
복도 한복판이라는 것도 잊은 채 유리나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다.
“너도 신탄가 산탄가 하는 걔 알지? 그 왜, 3년 연속 낙제점을 받았던 우리 동급생 말이야.”
“…음 …얼굴은 알고 있기는 한데…….”
“걔가 글쎄, 무려 오크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맨손으로 잡았다? 이게 말이 되냐고.”
“……?”
이어지는 유리나의 말에, 제노스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어려운 일인가?”
“…응?”
“오크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맨손으로 잡는 거. 타이밍만 잘 맞추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
“…….”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유리나가 가만히 제노스를 바라봤다.
하긴 사람마다 생각하는 기준은 다른 법이니까.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내면의 감정은 확연히 겉으로 드러났다.
그 고운 아미가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것도 알아?”
“어?”
“너, 되게 재수 없다는 거.”
마침내 폭발한 유리나가 싱긋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세웠다.
“…….”
곧 빠르게 멀어져 가는 그녀를 제노스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잘생긴 외모로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
마법사가 소속될 수 있는 ‘집단’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 크게 세 군데가 있었다.
첫째는 마탑.
둘째는 실력만 있다면 누구나 대우해 주는 용병길드.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신흥강자인 자유연합.
여기서, 집단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한 가지 의문을 품는다.
마법사들에게도 소속된 국가가 있는데,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되어 이중 활동을 할 수 있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가능했다.
국가와 집단은 별개였으니까.
오늘날과 같은 평화이기에, 각국에서는 도리어 자국의 인재가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곳에서 배운 양질의 지식들은, 결국 나라를 위한 힘이 될 테니까.
어디까지나 ‘집단은 국가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라는, 오랜 맹약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각 집단의 수장들 또한 바보는 아니었기에 몇 가지 안전장치를 내걸었다.
자국에 손해가 가지 않는 이상, 소속된 마법사는 절대적으로 집단의 일에 협조해야 했으며.
혹여 국가에서 딴마음을 품더라도, 집단에서 배운 지식으로 해당 집단에 대한 적대행위를 할 수는 없었다.
이를 어길 시 해당 국가는 세 집단의.
아니, 전(全) 대륙의 공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이 안전장치의 핵심이었다.
하면, 마법사들은 이중 어느 집단을 가장 최고로 칠까?
“고민할 것도 없지. 당연히 마탑이니까.”
세상의 진리를 갈구하고, 배움을 갈망하는 마법사들.
그런 그들에게, 온갖 지식들을 배울 수 있는 마탑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었다.
물론 메리트라면 다른 두 집단도 충분히 있었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마법사들을 의식해서인지, 용병길드와 자유연합은 집단 차원에서 얻게 되는 많은 마법서와 마나석들을 아낌없이 베풀었으니까.
소위 ‘몰빵’이 가능했다.
또한, 오직 마법사들만이 소속될 수 있는 마탑과는 달리, 두 집단은 능력 있는 인재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기에, 평균적인 임무수행 능력 또한 뛰어났다.
가령 고대의 유적지를 탐색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고 치자.
마법사들로만 구성된 파티보다는 기사와 마법사, 트래퍼들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쪽이 탐색에 더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물론 그럼에도 마법사들이 마탑을 최고로 치는 이유는, 그 모든 이점을 ‘압도’할 정도로 탑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들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저기 봐! 천공의 마법사 이카루스야!”
“세상에… 마탑의 핵심자원인 이카루스가 직접 여기까지 행차한 거야?”
“그뿐만이 아니야. 빙하의 탑 2인자, 에르사 아그란젤 님도 오셨다고!”
아카데미 광장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이미 해일처럼 몰려들어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생도들은 다른 두 집단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들려오는 얘기들이 하나같이 마탑과 관련된 내용들이었으니까.
“참나. 그 정도로 마탑을 대단하게 생각하면 그냥 마탑을 선택하면 될 걸, 그걸 또 눈으로 보겠다고 이리 난리법석들인지…….”
“호호호! 그야말로 낙제생다운 생각이네.”
흠칫.
이제 목소리만 들어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실비아 스필 세드릭…?”
“어머. 내 이름도 기억해 주는 거야?”
오늘은 웬일로 혼자 있는 은발의 미친년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당연히 이 난리를 피울 만하지. 마탑만 해도 선택지가 무려 열두 가지나 되는걸?”
“…….”
내가 구태여 대꾸하지 않아도,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짐작했을 거다.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12인의 마법사.
통칭 십이지왕이 주인으로 있는 12개의 마탑.
그렇다.
서열 1위부터 12위에 랭크된 이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마탑 소속이었다.
최고라는 이름답게, 그들은 같은 소속이지만 은연중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현실이 이런데, 생도들의 반응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일전의 일은 제법 인상적이었어. 그 뱀 같은 놈, 꽤나 성가셨거든? 오랜만에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너 좋으라고 그런 것 아닌데요?
속마음은 이랬으나, 입으로 나오는 말은 전혀 딴판이었다.
“이래도 돼?”
“이래도 되냐니?”
“평소에는 온갖 내숭이라는 내숭은 다 떨어대더니…….”
“호호호!”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비아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상대가 너라면 딱히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조금 있으면 평생 보지도 못할 얼굴인데.”
아아, 그러세요?
“그보다, 이제 아카데미와는 작별할 네가 여긴 무슨 일일까?”
“…남이사. 신경 꺼.”
“하긴, 네가 또 언제 이런 사람들을 보겠어? 이번 기회에 실컷 즐겨 봐.”
그리 말하면서 내 어깨로 손을 뻗는 실비아였다.
“아차차.”
“……?”
“기특한 마음에, 장갑도 안 끼고 만질 뻔했지 뭐야?”
…역시 이년은 상종해서는 안 될 계집애다.
“내가 조금 똑똑해서 네 생각도 대충 짐작은 가거든? 일은 벌였겠다,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나온 건 잘 알겠단 말이지.”
“…소설가로서도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러지 말고 얘기해 보라니까? 무작정 네가 찾아가는 것보다야, 내가 다리를 놓아주는 편이 더 낫지 않겠니? 그래도 내가 마탑에서도 알아주는 유망주잖아?”
이건 부정할 수 없었다.
아까부터 일부 외부 인사들이 이쪽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으니까.
물론 그 이유가 바로 옆에 있는 이 미친년 때문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한테는 나쁠 게 전혀 없잖아?’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고, 그 말대로 저쪽에 볼일이 있는 건 나였다.
허나, 1써클짜리 낙제생이 말을 건다고 저들이 어디 거들떠나 보겠는가?
“응? 얘기해 봐. 어디에 관심이 가는데?”
“…….”
“너도 알다시피,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입으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성격이야. 잘 알지 않니?”
이 또한 사실이다.
아예 약속을 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제 자존심을 누구보다 중요시하는 이 계집애는 최소한 허튼 말은 내뱉지 않으니까.
“그러면…….”
판단을 내린 순간 입이 움직였다.
학장 할아버지가 얘기했던 그.
시간이 없어 대화를 끝마치지는 못했으나,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당대에 딱 한 명.
열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마나를 발현하고도 십이지왕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
“그러면?”
눈을 반짝이는 실비아를 보며, 이윽고 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9탑.”
“응? 제9탑이라면 설마…….”
“그래. 나는 초월의 마법사, 아타락시아 페르잔에게 관심이 있다.”
***
“흐아아암.”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카데미의 지붕 위.
연녹색의 머리칼이 유달리 햇살에 반짝이는 미남자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계속 이렇게 계실 겁니까?”
“뭐 어때? 어차피 여기 있는 애들. 전부 마탑에만 관심 있잖아?”
사내의 반응에 딱 누군가의 비서를 연상케 하는 금발의 여인이 안경을 고쳐 쓰곤 대답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는 건, 저희 스스로 연합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쎄? 오히려 우리 쪽에서 먼저 다가가는 게 더 먹칠을 하는 거 아닐까? 어디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 구걸이라면 백 번도 더 할 수 있습니다. 괜찮은 인재를 등용할 수만 있다면요. 저희는 이곳에 놀러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놀러왔대? 올 사람은 결국 알아서 오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는…….”
여인의 말을 사내가 중간에서 끊었다.
“세실리아. 내가 누누이 말했지?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고.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너는 이참에 휴가다 생각하고 느긋하게 있으라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에휴. 그렇게 앞뒤 꽉 막혔으니까 아직도 시집을 못 갔지.”
“한 말씀만 더 하시면, 여기서 확 밀어버릴 겁니다.”
“어이쿠.”
농담이라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친 미남자가 다시 광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하직원이 무서워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야겠네 그려. 자, 어디 쓸 만한 놈이 있는지 한번 찾아볼까?”
이렇게 말하곤 예의 사내가 무심한 표정으로 광장을 훑어보기를 잠시.
“…응?”
고작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잠깐만. 저기 저 애는 누구지?”
처음으로 무언가에 관심을 보이는 미남자를 보며, 세실리아라 불린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 아, 세드릭 가문의 여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 역시 연합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인재 중 하나로…….”
“아니, 여자애 말고.”
“…네?”
“그 옆에 있는 남자애 말이야.”
“……?”
세실리아가 인상까지 찡그리며 광장 한쪽을 바라봤다.
허나, 워낙 거리가 있어 얼굴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실비아의 경우, 눈에 띄는 은발을 가졌기에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지만.
“…재밌는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미남자가, 어느새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 잠깐만 갔다 올게.”
“네에!? 이, 이렇게 갑자기요?”
“언제는 일 좀 하라며?”
“그, 그거야…!”
휘이잉!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미남자를 향해, 홀로 남은 세실리아가 빼액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애들도 다 보는데 웃옷은 입고 가라고요, 에이스 님!”
물론, 들을 상대는 이미 저만치나 떠나가고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