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격차
웅성웅성.
거대한 벽보 앞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색깔만 다를 뿐, 하나같이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이번에도 제노스가 일 등이야?”
“인생 씹… 역시 신은 불공평해. 가진 놈이 다 가지는 더러운 세상.”
“동감이다. 능력 좋지, 가문 훌륭하지. 심지어 얼굴까지 잘생겼잖아?”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얼굴은 아니지 않냐? 완전 계집애같이 생겨가지고.”
“질투하냐?”
“아니거든.”
“그러시겠지.”
“쳇, 분명 거기는 작을 거다.”
“아니, 그것도 크다는 소문이 있던데.”
“개자식.”
이렇듯, 남자 아이들이 대부분 질투 어린 불만을 토해냈다면, 여자아이들 쪽은 그 반대였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요란을 떨어대는 선두의 무리가 있었으니,
“너무 멋있어!”
“제노스는 어디 있는 거야? 얼른 만나서 축하라도 해줘야 하는데!”
“너… 축하도 받는 사람이랑 급이 맞아야 하는 거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물론 다른 뜻이 있는 건 절대로 아니야!”
눈꼬리가 확 치켜 올라간 은안의 미녀를 향해 곁에 있던 주근깨 소녀가 다급히 손사래 쳤다.
“그 카이클 공작님의 적자인 제노스인데, 나 같은 게 어디 허튼 마음을 품겠어? 같은 공작가 여식인 실비아라면 또 몰라도 말이야!”
“어머,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낮출 필요는 없는데? 누가 보면 내가 에이미 너를 괴롭히는 줄 알겠다, 얘.”
“헤헤, 미안…….”
“뭐, 이해는 해. 제노스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니까.”
그러면서 한참이나 벽보 밑을 향해 시선을 내리던 실비아가 생긋 미소 지었다.
“그렇다고 너무 상심하지는 마. 신발도 다 제 짝이 있는 법 아니겠어?”
“응?”
“하위권 중에서도 최하위권인 에이미니까. 그래도 꼴찌인 세타라면 네 짝이 되어주지 않겠니?”
“아… 그 말이었구나.”
“호호호!”
기다렸다는 듯 같은 일행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실비아가 보는 눈이 있어. 에이미한테는 만년 낙제생인 세타가 딱이지.”
“근데, 이래 놓고 세타가 에이미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해?”
“설마. 그래도 여기 에이미는 무려 프로파 자작가에 적을 두고 있잖아? 그에 비해 세타는 귀족은커녕 능력도 없고, 하다못해 얼굴도 평범 그 자체니까 말이야.”
“아~ 에이미는 좋겠다. 그래도 자기를 과분하게 생각해 주는 남자가 하나쯤은 있어서.”
주근깨 소녀의 얼굴이 점차 울상이 되어갔다.
곧 한참이나 꺄르륵거리며 웃어대던 여자아이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유리나 그 계집애는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이번에도 2등이네?”
“제 년이라고 별수 있나. 그래도 이론만큼은 그 계집애가 우세했는데, 이번 시험은 이론과 실전 모두 제노스에게 밀렸으니.”
“호호호, 그것참 속이 다 시원하다니까?”
유독 심술궂게 생긴 여자아이, 엠마가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그 순간.
성큼성큼.
“……?”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선 은안의 미녀를 보며 엠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실비아. 무슨 할 말이라도……?”
짝!
“악!”
“……!”
순간 귀청을 때리는 경쾌한 타격음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왜, 왜…?”
“야.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그게 무슨…….”
실비아가 벽보 최상단을 가리켰다.
그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떡하니 아로새겨져 있었다.
1. 제노스 델 카이클.
2. 유리나 벤 아리에나.
3. 실비아 스필 세드릭.
“그 시건방진 계집애는 2등. 나는 3등. 내가 그 천박한 년보다도 못하다고, 돌려 까는 것 아니냐고 지금.”
그제야 엠마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야! 그런 뜻은 절대로 아니었어!”
“닥쳐.”
짝! 짝! 짝!
“악!”
연달아 세 번이나 따귀를 더 후려갈기자 엠마의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시, 실비아. 자,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제발 용서를…….”
“입 닥치고, 오늘부로 에이미가 하던 일은 네가 모두 인수받도록 해.”
“아, 안 돼. 미안해, 미안해! 그것만은 제발……!”
퍽!
그 연약한 몸에서 무슨 힘이 나오는지, 주먹질 한방에 제법 거구인 엠마가 픽 하고 쓰러졌다.
우웅!
그런 실비아의 주먹에, 푸른빛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
잠시 경멸 어린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홱하고 시선을 돌렸다.
“에이미.”
“시, 실비아. 나, 나는…….”
“미안.”
“으응…?”
두려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에이미가 움찔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세타의 짝은 네가 아니라 여기 엠마였는데.”
부르르르.
엠마가 엎어진 채로 눈물을 떨궜다.
“우리, 친구 맞지?”
“무, 물론이야. 실비아.”
“그럼 친구로서 부탁 하나만 하자.”
“무슨…….”
“여기 이것부터 좀 치워주라. 애들 성적 확인하는 데 방해가 되잖아?”
그러면서 실비아가 쓰러진 엠마를 툭툭 걷어찼다.
“아. 워낙 덩어리라서 너 혼자 들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으려나?”
“우, 우리가 도와줄게!”
다른 두 여자아이가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
하나, 실비아는 어찌 그럴 수가 있냐는 듯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생각해 보니 어떻게 친구들한테 이런 부탁을 할 수가 있겠어.”
“괜찮아. 우리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뭘!”
“그래도 내 마음이 불편해서 안 돼. 마침 저기서 엠마의 미래 남편이 오고 있으니까. 그쪽에 부탁하면 될 것 같…….”
순간 말을 잇던 실비아가 ‘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사태를 관망하던 아이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돌아갔다.
예의 수십 쌍의 시선이 미치는 곳.
그리 멀지 않은 복도 끝에서, 두 명의 사내아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
‘이건 또 뭔 상황이야?’
한참 복도를 걷던 내 걸음이 천천히 늦춰졌다.
늘어지게 낮잠을 때리고 교실로 돌아가는 길.
수십이나 되는 아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만 하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그러고 보니, 오늘 학기말 시험 성적을 발표한다고 했던가? 그럼 성적이나 확인할 것이지, 왜 다 이쪽을 쳐다보고 지랄들이야?’
특히 벽보 바로 앞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거슬렸다.
유독 자신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인 놈.
아니, 년.
“끙… 실비아 스필 세드릭. 저 미친년이 원인이었군. 여기까지 와서 돌아서 가는 건 귀찮은데…….”
땡땡이라도 칠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이윽고 미친년의 입에서 하이 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노스!”
“그냥 돌아서 가야겠… 응?”
여기서 저 이름이 왜 나와?
힐끗, 등 뒤로 시선을 돌리자 그제야 내 입에서 ‘아’ 하는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바로 뒤에 있었네? 이러면 또 얘기가 다르지.”
목적지가 같은지, 조금 뒤에서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는 또래 아이.
녀석이 이 소동의 원흉일 터였다.
제노스 델 카이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듯, 혼자서 다 해먹는 놈.
만약 내 인생에도 관중이라는 게 있다면, 욕을 한 바가지는 뱉어냈을 거다.
저런 다 가진 놈이 아닌, 나 따위 만년 낙제생이 주연이니까.
그런 것보다,
‘관심을 사주겠다는데, 이런 배려를 사양할 필요는 없지.’
판단을 마친 순간 슬쩍 뒤로 물러섰다.
방향이 같은 그놈보다 더 뒤로.
“자.”
“……?”
“먼저 가시라고.”
“…….”
그런 나를, 제노스는 별 이상 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물론 그 찰나의 관심은 금세 다른 곳으로 넘어갔지만.
“꺅! 제노스!”
열 명은 될 듯한 아이들이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쌌다.
“이번 시험 1등 축하해!”
“정말 대단해. 아니,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백마전은 어떻게 만점을 받은 거야? 남들은 다 기피하는… 아니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전투마법’을 주력으로 삼으면서 말이야.”
이번 학기말 평가에서 가장 악명 높은 시험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이 백마전이었다.
백 마리의 마물을 상대로, 생도 홀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시간이 길어질수록 처치하는 마물 수가 많을수록 점수는 올라간다.
물론 생도들의 안전을 생각해 진짜 마물을 투입시키지는 않았다.
이 아카데미에는 무수한 실력자들이 스승으로 있었고.
그중에는 ‘환영의 마법사’ 라이언 테일러도 있었으니까.
기실, 이처럼 이름 앞에 단독 별칭이 붙는다는 건 아주 대단한 거다.
전 대륙을 통틀어 단 한 명.
그 분야에서만큼은 뭇 대륙인들 모두가 인정하는 대가 중의 대가.
‘환영’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각각의 마법사들은 주력으로 삼는 마법이 따로 있었다.
물, 불, 바람 따위의 기본적인 원소마법부터 환영과 같은 특이계열까지.
참고로 내 주력은 ‘신체 변형’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체 변형을 제외한 다른 마법은 1클래스조차 시전하기 힘들었다.
저 일등에 빛나는 제노스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전투’를 주력으로 삼고 있고.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원소 마법들도 수준급에 올라섰다고 한다.
마법사는 선천적으로 신체가 약하다는 말은 개나 주라는 양, 마나와 육체적 재능을 모두 타고난 인간이 바로 놈이었다.
‘그렇다고 부러운 건 일도 없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까.
성적이 나온 것 같지만,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보다는, 관심이 돌아간 사이 이곳을 빠져나가 교실에서 못 잔 잠을 마저…
“세타 쿤 이그니스.”
“……!”
그때, 처음으로 어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기다렸다는 듯 떡하니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마침 있었군.”
“라이언 테일러 선생님…?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짐 싸라.”
“……?”
갑자기 나타나서 밑도 끝도 없이 이건 또 뭔 소리래?
“예?”
“성적은 확인했겠지? 이번에도 네가 꼴등이지 않나.”
“그게 왜……?”
새로이 등장한 30대의 젊은 사내, 라이언 테일러가 미간을 찌푸렸다.
“잊은 거냐? 학칙 상, 낙제 3번이면 퇴학이다.”
“……!”
찰나,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커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뭐야, 그럼 퇴학?”
“이제 못 보는 거야? 저 낙제생…….”
“우리 기수에서는 최초 아니야? 그런데, 이름이 뭐였더라?”
“방금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 쇼타 콘 이그무스라고…….”
“세타 쿤 이그니스겠지.”
훗.
이런 반응이야 익숙했다.
당황했느냐고?
천만에!
“그게 정말이십니까?”
“…응?”
“확정된 겁니까? 그럼, 지금 바로 짐 싸서 나가면 될까요?”
“…….”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라이언 테일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잘된 것 아니겠어?
애당초 재능도, 뒷배 하나 없는 내가 명문이라 불리는 이곳.
테라의 아카데미에 입학한 일 자체가 기적이었으니까.
한 네 살 때였나?
고아로 태어난 내가, 팔자에도 없는 마나 감응구에 반응을 보이지만 않았어도…….
“…그 전에, 학장님과 면담이 있다.”
“가시죠.”
곧장 앞장서는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
“흐흐흐…….”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의 나는, 이곳에 입학한 이래 최고로 기분이 좋았다.
사람만 없었다면, ‘호우!’라고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