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협정(2)
세리스가 협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하루가 지나서 오페니는 세리스와 다시 만났다. 그리고 세리스는 뚱한 얼굴로 오페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고 하는 거지?”
“협정. 하도록 하겠다.”
그 말에 세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건은?”
“그대가 말한 그 조건에 따르도록 하겠다.”
“이상하군. 무슨 생각이지?”
세리스의 말에 오페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 그렇게 날 못 믿는 건가?”
“당연한 말을 하는군.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위험성이 있는 것에 대해 하는 말에 한해서는 절대로 널 믿지 않는다. 그동안 네가 보인 행동들을 떠올려라, 오페니. 그러면 내가 왜 널 신뢰할 수 없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분명 내가 위험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조심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철저하게 조심할 뿐이다.”
“우유부단하고 겁이 많은 거지. 뭘 그렇게 포장해.”
“세리스.”
오페니가 강하게 세리스를 부르자 세리스는 어깨를 으쓱거린 후에 말했다.
“어련하겠어. 그래. 협정에 승인하면 그대로 문서 만들면 되는 건가?”
“아리스자두니바와도 이야기가 끝났다. 그도 이 협정에 동의했다.”
“호오, 그 녀석이?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그도 이번 대련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은 것뿐이다.”
“지금이라도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일을 하려고 했는지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군. 그리고 너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 협정에 승인한 거지?”
“안전을 위해서다. 최소한 그 초월자가 자신이 맺은 협정을 자신의 손으로 찢어 버리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맺은 협정을 스스로 무시해 버리는 그런 남자라면 애초부터 좋은 대화가 안 될 것이 뻔하니 그건 그때 대응해도 문제없다.”
오페니의 ‘대응’이라는 말에 세리스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설마.”
“모든 것은 그 남자가 스스로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았을 때를 위한 것이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말을 지킨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말에 세리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그렇지. 겁쟁이인 네가 이렇게 나올 때부터 알아야 했는데.”
그 말에 오페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리스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좋아. 그러면 협정을 맺는 것으로 하지. 그에게 그렇게 전하겠다. 정식으로 문서를 만들어서 서로 나누어 가지도록 하겠다.”
“정식으로 문서를 만들면 가져와라. 서명을 하겠다.”
“그래.”
그리고 세리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빛과 함께 2장의 종이가 허공에서 나타나 세리스의 손에 들려졌다. 그것을 본 오페니가 말했다.
“벌써 다 만들었나.”
“물론이지. 미리미리 만들어 두었고 김창훈의 서명도 받아 두었다.”
그리고 두 장의 종이를 오페니에게 건네자 그곳에 있는 서명란에 김창훈의 이름이 정확하게 한글로 적혀 있었다.
“처음 보는 문자로군.”
“그 세계에서 사용되는 문자다. 그것도 그가 사는 나라에서만 사용되는 문자라고 하더군. 생각보다 좋은 문자다.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들보다 더욱 체계적이고 효율적이다.”
“오오. 그런가.”
급격하게 관심을 보이는 오페니를 보며 세리스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 그리고 그녀의 전문 분야가 무엇인지 생각하면 이상한 것도 없었다.
“그 글자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서명부터 해라.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협정서의 내용 중에는 우리와 그쪽 세계가 평화적인 교류를 이어가는 것도 있다. 물론 서로 확실하게 주고받아야겠지. 그 부분은 우리 측에서 알아서 잘할 수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저들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들을 너무 무시하는 거지. 그만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면 된다. 협정서에도 그 내용은 기재되어 있다. 만약 지구의 인간들이 우리들을 향해서, 혹은 반대로 우리들이 지구의 인간들을 향해서 범죄 행위. 그러니까 사기, 살해, 협박 등등을 펼칠 경우 범죄 행위를 당한 세계에서 그 범죄자들을 단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당한다면 우리에게 사기를 친 그자를 우리가 처벌할 수 있으니 걱정 마라.”
“지구에서 그자를 보호하려고 한다면?”
“김창훈이 나서서 직접 처리하겠지. 그것도 적혀 있다. 나에게 계속 물어보지 말고 그냥 직접 협정서를 한 번 읽어 봐라. 긴 내용은 아니지만 필요한 내용들은 전부 다 넣어 두었으니까.”
그 말에 오페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협정서의 내용들을 모두 읽었다. 그러고 난 후 그녀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협정서에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나는 이것으로 끝났다.”
“내용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 불리하지도 유리하지도 않은 내용이다. 아직 조금 우리에게 유리하더군.”
“그렇지. 김창훈 그 사람은 지구의 사람들을 크게 못 믿는 모양이야. 오히려 우리들이 더 믿을 수 있다고 하더군.”
“그건 칭찬이겠지?”
“칭찬이지. 우리가 더 도덕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야.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아리스자두니바 한 명인가.”
그리고 세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오페니가 말했다.
“아리스자두니바도 금방 서명을 할 거다. 그러면 정식으로 협정서가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될 거다.”
“그렇지. 그러면 나중에 또 보지, 오페니.”
“이런 일로 다시 너와 만나는 것은 절대로 사양이다. 오지 마라.”
“훗. 그건 두고 봐야지.”
그리고 세리스가 협정서와 함께 자리를 떠나자 오페니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디 무사히 이 일이 끝나기를.”
자신이 준비한 최후의 수단. 그것이 사용되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그녀는 조용히 협정서에 대한 결과가 발표되기를 기다렸다.
* * *
“결국 이렇게 되었군.”
침대에 누워 있는 아리스자두니바는 창백한 얼굴을 한 상태로 말하였다. 그러자 세리스는 그런 아리스자두니바를 향해서 말했다.
“애초에 시작은 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나보다 훨씬 더 강한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오만이었지.”
씁쓸하게 말하는 아리스자두니바를 보며 세리스는 담담히 말하였다.
“아무리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혜로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네가 보여 주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너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겠지.”
“큭큭. 이것 참 부끄럽군.”
“당연히 그래야지. 명색이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자가 사리분별을 못 해서 날뛰다가 더 강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맞아서 이렇게 빌빌거리고 있는데.”
“그건 그렇지.”
웃으며 말하는 아리스자두니바를 본 세리스는 협정서를 내밀며 말했다.
“서명해라, 아리스자두니바. 이걸로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게 될 거다.”
협정서를 묵묵히 바라보던 아리스자두니바가 말했다.
“이것이 최선인가?”
“우리가 이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엄청난 고난을 겪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야. 세상에 그냥 얻는 것은 없다.”
“우리가 그 길을 경험하였기에 하는 말이다. 그 긴 시간, 그 긴 고통을 굳이 다른 이들도 경험해야 하나? 그냥 우리가 그들을 도와서 그 시간과 고통을 최소한으로 단축할 수 있지 않나?”
“물론 그럴 수 있지.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지구란 세계와 평화로운 교류를 이어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그들에게 알려지면 그들도 내부적으로 반응이 나오겠지.”
“혼란은 곧 파멸을 불러 올 수도 있어.”
“지구에 있는 유일한 초월자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이상 최악의 상황으로 가지는 않을 거다. 그가 적절하게 커트를 할 테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가 도와줘도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발전을 쟁취하지 않는 이상 허상에 불과하다. 시간이 걸리고 고통스럽고 피를 흘리더라도 자신들의 손으로 이룩해야 의미가 있는 거다.”
“후우. 안타깝군. 안타까워.”
그렇게 말하며 아리스자두니바는 협정서에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어쩔 수 없다, 아리스자두니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 주는 거다. 그 이상은 우리가 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이미 간접적으로 그것을 경험해 보지 않았나?”
그 말에 아리스자두니바는 안타까운 얼굴로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렇지. 이 모든 것은 나의 개인적인 욕심이겠지.”
“네 뜻은 틀리지 않았다. 그 부분은 나도 동의하고 있으니까. 심지어 너와 싸웠던 김창훈. 그조차도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 부분을 제외하고 너의 뜻은 매우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김창훈은 너에게 이 말을 남기더군.”
“그 남성이 나에게?”
“그래. 나중에 몸이 다 회복되면 지구로 오라고 했다. 직접 와서 지구에서 있는 사람들을 도우라고. 그리고 직접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사람들에게 설파하라고. 물론 힘으로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멋대로 범죄자들이나 악이라고 치부되는 이들을 처벌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참고 사람들을 돕는 것을 정말로 하고 싶다면 지구로 오라고.”
그 말에 아리스자두니바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가야지. 오히려 날 받아 니 고맙군. 그 사람이 나보다 더 그릇이 크군.”
“조금 건방진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그릇은 넓다. 그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 내가 그를 도와주고 난 후 널 쓰러트려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지. 그라면 널 죽이지 않고 제압해 줄 거라고 믿고서 말이야.”
“그런 거면 조금 더 살살 해 달라고 하지 그랬나. 나는 정말로 죽을 뻔했어. 그리고 지금도 이 모양이고.”
“나도 그 정도로 그가 강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 대련을 했을 때, 그는 이 정도로 강하지 않았어.”
“대련이니 힘을 적당히 숨긴 것이겠지. 나랑 싸울 때는 여차하면 자신의 세계가 나에게 공격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전력을 다한 것이고.”
“그렇게 봐야겠지. 어찌 되었든 모든 일이 무난하게 해결되었다. 네가 조금 고통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팔, 다리 안 잘리고 사지 멀쩡한 상태에서 조금 내상을 입은 정도로 모든 일이 끝났으니 가장 평화롭게 해결되었다고 봐야겠지.”
“부상인 앞에서 잘도 말하는군.”
“네가 자초한 거다, 아리스자두니바. 그러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군. 어찌 되었든 이제 푹 쉬어라. 네가 몸이 빨리 나아서 거동이 가능해져야 지구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니까.”
“그래야지. 비록 가서 거악을 내가 직접 처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을 거야. 그러기 위해서 익힌 마법이니 거기서 잘 사용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아리스자두니바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런 아리스자두니바의 모습을 보며 세리스는 조용히 그의 방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는 동시에 안도하였다.
이것으로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서 드는 안도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