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협정(1)
잠깐 잔다고 하던 김창훈은 결국 푹 자고 일어났다. 그가 일어났을 때. 김창훈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세리스를 보며 말했다.
“음. 조금 오래 잤나?”
“아아. 오래 잤지. 하루를 그대로 잤으니까.”
그 말에 김창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세리스를 보며 말했다.
“어제 먹었던 그 고기 다시 먹고 싶군.”
그러자 세리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네놈의 식모가 아니다. 헛소리는 거기까지 하고 제대로 일어나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흠. 아쉽군. 그보다 해야 할 일이라니?”
“네가 벌인 일에 대한 후폭풍이지.”
그 말에 김창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벌인 일에 대한 후폭풍이라니?”
“네가 아리스자두니바를 쓰러트린 일에 대한 것이다.”
세리스의 말에 김창훈은 더욱 인상을 쓰려 말했다.
“그건 네 부탁으로 한 일이다. 그 일에 대한 후폭풍은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지. 네가 처리해야 할 일이다.”
“후우.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문제는 다른 이들이 납득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걸 왜 나에게 묻는지 모르겠군.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그것으로 내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그리고 그 후폭풍을 내가 책임져야 할 이유도 없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다른 이들이 그걸 납득하지 않고 있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아리스자두니바가 쓰러진 영향이 크다. 지금 전국적으로 많은 이들이 이번 일에 대해서 책임을 묻고 있다.”
“나한테?”
“나도 포함되어 있다.”
그 말에 김창훈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아직 잘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리스자두니바를 쓰러트린 것이 잘못이라는 거지?”
“그보다는 사람들이 지금 널 무서워하고 있는 중이다.”
“날?”
“그래. 너는 우리 세계에 3명밖에 없는 초월자들 중 한 명을 큰 부상 없이 쓰러트렸다. 그것도 압도적인 힘으로 말이야. 우리 쪽 초월자는 네 공격에 제대로 대응을 못 하고 방어만 하기에 급급했지. 그 모습을 모두가 보았다.”
“그래서?”
“그래서 말하는 거다. 네가 만약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그때는 우리가 어떻게 하냐는 거지. 아리스자두니바가 쓰러지고 이제 남은 초월자는 나를 포함해서 둘. 우리 둘이서 널 막을 수 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연히 나는 막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내 말을 믿지 않더군. 널 이 세계에 데려온 사람이 나니까. 오히려 이런 말이 나오고 있다. 내가 너와 손잡아서 지금의 균형을 무너트리려고 한다고.”
그 말에 김창훈은 한숨을 쉬었다.
“네 덕분에 나는 이곳에서 악당이 되었다는 거군.”
“내 탓은 아니지.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네가 너무 압도적으로 아리스자두니바를 쓰러트린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솔직히 나도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차이를 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와 대련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힘과 속도더군.”
“나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나는 할 일이 딱히 없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그냥 내가 이곳을 떠나면 그만이니까.”
“나도 그렇게 말했지. 그랬더니 네가 떠나서 새로운 지원군을 데리고 우리 세계를 침공할 거라는 말이 나왔다.”
세리스의 말에 김창훈은 이마를 짚었다. 완전히 제대로 오해를 사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동시에 이들이 얼마나 자신에게 겁을 먹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진짜 과도하게 나에게 겁먹었군.”
“그러니 말하지 않았나? 네가 아리스자두니바를 쓰러트린 모습은 너무 강렬했다고. 이번 일에 대해서 나도 최선을 다해서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나까지 포함해서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공격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대가 아직 부상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지금이 기회라는 거지. 그리고 나에게 그러더군. 정말로 억울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널 공격할 때, 함께 공격하라고.”
그 말에 김창훈은 세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날 공격할 건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식사를 차려 주지도 않았지. 네가 잠들어 있을 때,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지?”
“네 억울함을 말해야지.”
“개인적으로는 그냥 다 엿이나 먹으라고 하고 당장 여길 떠나고 싶군.”
“그래서는 역효과다. 우리 세계와 네가 살고 있는 세계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흠.”
김창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협정을 맺는 것은 어떻지?”
“협정?”
“그래. 안 그래도 나는 아리스자두니바란 자가 이걸로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어. 설령 내가 있는 지구를 공격하지 않더라도 다른 세계는 공격할 수 있지. 그래서 ‘우토’의 균형이 무너지고 그 여파가 우리가 있는 세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니 아예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게 해 두자는 거지.”
“협정이라…….”
“협정을 해서 서로 규칙을 정하는 것이 더 편할 거다. 내가 백날 억울하다고 말해 봐야 듣지 않을 것 같으니 협정이란 표현을 쓰고 서로 원하는 바를 말한다면 아무리 나에게 겁을 먹은 이들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수락은 하겠지.”
“확실히 그렇겠어. 현재로서는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같네.”
“그러면 협정을 맺는 걸로 하고. 문제는 그 내용이군.”
김창훈의 말에 세리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일단, 네가 원하는 내용을 먼저 말해라. 그리고 그 내용에 따라서 내가 추가적인 내용을 붙여 보도록 하지.”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해. 서로 공격하지 말자는 거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가는 거다. 괜히 말도 안 되는 일로 우리를 계몽한다는 헛소리도 하지 말고.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단, 서로 교류는 계속 했으면 좋겠군.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우리 쪽 세계에서도 변화가 나타날 테니까.”
“흠.”
세리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러면 나머지 내용들은 내가 조금 살을 붙이도록 하지. 걱정할 것 없다. 네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그것을 지키도록 하겠다. 그러면 여기서 기다려라.”
그리고 세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지?”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러 가는 거지. 네가 말한 협정을 위해서 말이다. 네가 직접 가서 이야기해 봐야 분위기가 좋을 리 없으니 말이다. 그들은 널 매우 경계하고 있으니까. 어떤 이들은 널 지금이라도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아리스자두니바를 쓰러트렸으니까. 그의 사상이 매우 급진적이기는 했지만 그가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지. 무엇보다 그는 우리 세계의 3명뿐인 초월자 중 하나다. 그를 존경하는 이들도 많지. 그런데 그런 인물이 웬 놈팽이 하나에게 철저하게 당해 버렸다. 죽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상처를 입었지. 그러니 그들로서는 널 그냥 둘 수 없지. 그들에게 넌 원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말에 김창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로 대단한 일에 날 끼어들게 만들었군, 세리스.”
“미안하다. 나도 이 정도로 일이 번질 거라고 생각 못 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나도 할 말은 있다. 나는 네가 그렇게까지 강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까 말하지 않았나? 이들이 이렇게까지 경계하고 긴장하는 이유는 널 무서워해서다. 네가 아리스자두니바를 꺾고 나면 널 원수로 생각할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정도는 내 선에서 커트할 수 있지만 그 이외의 부분에서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미 일은 다 벌어진 상태. 그러니 이 일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이 지금의 최선이었다.
“알았으니까. 갔다 오기나 해.”
“다시 한번 미안하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따로 내가 빚을 달아 두겠다.”
그리고 세리스가 밖으로 나가자 김창훈은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 또 자는 거냐?
“당장 할 것도 없는데 자야죠. 아직 몸이 완전히 치유되지도 않았고요. 무리해서 움직일 것 없죠. 여차하면 싸워야 할 수도 있는데.”
최대한 빠르게 몸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하며 김창훈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 * *
“협정이라고?”
“그래.”
세리스는 자신과 마주 앉아 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세리스.”
“그러면? 이대로 정말로 그와 싸울 생각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갑자기 협정이라니.”
“이것이 유일하게 평화롭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원한 것은 아리스자두니바의 폭주를 막는 것이지 그것으로 더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모두 봤듯이 강하다. 너와 내가 힘을 합친다고 해도, 그가 전력으로 우리를 죽이려고 든다면 잘해 봐야 공멸이다.”
그 말에 여성은 입을 닫았다.
“오페니. 잘 생각해라. 네가 그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이득이고 손해인지를 따져야 한다. 그와 싸우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협정을 맺어서 사람들의 불안을 진정시켜 주고, 장차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 최대의 이득이다.”
“난 그를 믿을 수 없다, 세리스.”
“그는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이다. 나와 한 약속 하나로 인해 이곳까지 와서 초월자와 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말에 오페니라 불린 여성이 세리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따지고 보면 전부 다 네가 이 일의 원흉이지.”
그러자 세리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난 다른 세계와 전쟁을 벌이기 싫어서 한 선택이다. 애초에 너도 내 말에 동의했을 텐데?”
“그렇다고 이런 일을 벌이라고 하진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건가? 아리스자두니바는 우리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면 그를 누가 막지? 힘으로 우리 둘이 막을 건가? 그걸 가장 먼저 제의했을 때 거절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다, 오페니. 너는 책임을 회피했다. 비겁하게 변명하지 마라.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애초에 우리는 일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막을 수 있었다. 그걸 충돌로 인한 전투를 두려워하여 피한 사람은 너다, 오페니.”
세리스의 말에 오페니도 더 이상 말을 못 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남을 탓하고 책임 회피만 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은거를 하거나 조용히 죽어라. 그러는 편이 차라리 나을 테니까.”
“내가 실수한 것은 인정한다, 세리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거야말로 억울하군. 나는 그가 아리스자두니바를 죽이는 것을 막았다. 심지어 아리스자두니바의 폭주도 막았지. 사람들이 스스로 김창훈에게 겁먹은 것이 내 잘못인가? 강자에게 겁을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람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지. 그걸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건가?”
“애초에 네가 그를 불러오지 않았으면 일이 이렇게 안 되었다.”
“또 같은 말을 하게 만드는군. 그러면 아리스자두니바의 폭주는 누가 막고. 내가 막는다고 했을 때, 너는 구경만 할 것이 뻔하고 나 혼자서는 아리스자두니바를 막을 수 없다. 그러면 그 결과는? 아리스자두니바의 폭주로 인한 다른 세계와의 전쟁이지. 그 전쟁 중에 죽을 무수한 생명들에 대한 책임은 네가 떠안을 건가?”
그 말에 오페니가 아무 말 하지 않자 세리스는 담담히 말했다.
“협정에 대해서 난 분명 말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 나는 더 이상 그를 막지 않을 생각이니까.”
세리스가 자리를 떠나자 오페니는 홀로 앉아 조용히 고민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