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똥물 뿌리려고 왔다(4)
“망명이라고 했는데. 그거 취소 안 되나?”
“그래야 하는 이유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대로 두었다가는 네 말대로 이 나라가 망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황위 쟁탈전 이런 것에 참가는 하지 않는 사람이기는 한데.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말이지. 아직 살아 있을 때, 이 제국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싶지는 않거든.”
“그래서?”
“오랜 제국의 역사 속에서 여황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그러니 오랜만에 여황제 한번 나오는 것이지. 제대로 이 나라를 이끌 수 있다면 성별이나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 말에 깜짝 놀란 2, 3황자가 동시에 청년을 바라보았고, 2황자가 급히 청년의 이름을 외쳤다.
“레이드 님! 그건 안 됩니다!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어떤 여자인데?”
“저 여자는 천한 하녀의 피를 이은 여자입니다! 그런 여자가 이 제국의 황제라니!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외침에 김창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왜 1, 2황녀가 3명의 황자들에게 힘도 못 쓰나 했더니 탄생의 비밀이 있었다.
‘황제가 하녀랑 낳은 자식이 1, 2황녀들이군. 그리고 나머지 3명의 황자들은 제대로 된 힘이 있는 여식의 자식인 것 같고.’
과거 지구의 역사 속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천한 이의 핏줄을 이어 제대로 활동을 못 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 시대만 봐도 넘치니 말이다.
“이상하군. 내가 알기로는 황제의 직계 자식이라면 그 사람이 누구라도 황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니 제가 황제가 되는 겁니다!!!”
“저 청년이 하는 말 못 들었나? 네가 황제가 되면 나라 말아먹을 거라고 하지 않나? 이제 막 이곳에 도착한 외부인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더 볼 것도 없지 않나?”
“고작 외부인의 한마디에 제국의 수호신이란 분의 뜻이 흔들리는 겁니까!”
“고작 외부인이라니, 나랑 같은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에게. 그런 의미에서 넌 저 청년에게 감사해야 할 거다. 너희들이 입구를 막고 섰을 때, 그냥 저 청년이 다 죽이고자 했다면 1초도 걸리지 않고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다 죽었을 테니까.”
그 말에 2황자와 3황자는 자신들이 김창훈에게 덤비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랬다가는 분명 자신들도 죽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방금의 상황만 봐도 그래.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고 하나, 이곳은 제국의 심장인 수도다. 그런 수도에 네 말대로 외부인이 나타나서 1, 2황녀가 망명 신청 했으니 길을 비키라고 그냥 비켜서 황궁까지 안내라도 할 생각이었느냐? 그러고도 너희들이 이 나라의 황자라고 할 수 있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레이드의 말에 2황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3황자가 급히 말했다.
“상대는 레이드 님과 같은 초월자입니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그걸 막을 수 있습니까! 초월자들에게 있어서 우리들은 그저 한 마리의 개미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그 말에 레이드라고 불린 청년은 담담히 말했다.
“그러면 개미답게 저항하고 죽어야지.”
“예?”
3황자의 반문에 레이드는 3황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개미답게 저항하고 죽으란 말이다. 그것이 황궁을 나아가 이 제국을 지키는 군인의 자세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제국을 지키는 군인이 그냥 도망친다? 그러면 우리 제국의 국민들은 누굴 믿어야 하나? 제국의 황제는 누가 지키지? 제국의 역사는? 도대체 그 누가 제국을 지킨단 말인가!”
레이드의 외침에 기사들은 자신들의 검을 뽑으며 강하게 땅을 구른 후 말했다.
“제국의 검인 우리들이 이 제국을 지킵니다!”
마법사들은 지팡이를 땅에 내려찍는다.
“제국의 지혜인 우리들이 제국을 수호합니다!”
기사와 마법사들의 외침에 병사들은 짧게 지른 함성으로 그 대답을 대신한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드가 말한다.
“봐라! 제국의 군인들은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 네놈들이 감히 물러난다는 말을 해! 가장 먼저 거인에게 개미처럼 밟혀 죽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너희들이다!”
그 말에 2황자와 3황자는 크게 위축이 되었다. 이에 레이드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야기는 끝이다. 이 시간부로 차기 황제에 대한 이야기도 끝이다. 차기 황제는 에메랄드 에르틴이다. 내가 정하였고 나중에 현 제국의 황제인 리스팔 에르틴이 정식으로 발표할 거다.”
순식간에 차기 황제가 결정된 순간, 그것을 본 김창훈은 망연자실하고 있는 2황자와 3황자를 보며 말했다.
“후환을 남기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데.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군.”
김창훈의 말에 레이드는 담담히 말했다.
“이 제국에서 나름 이름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네. 내가 저 아이를 지키는 이상, 저 아이에게 검을 내밀 어리석은 자는 없어. 그리고 자네도 보지 않았나? 우리 제국의 군인들은, 결코 자신들의 황제가 적들의 손에 죽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나! 제군들!”
대답 대신 강하게 자신들의 병기로 땅을 내려찍는 이들을 보며 레이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네나 나와 같은 이들에게 별것 아닌 저 못난 놈이 말한 것처럼 개미와 같은 이들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훌륭한 군인들이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가 곧바로 손을 쓰지 않는 것은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쓸데없는 살생은 좋아하지 않을 뿐이야.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결정권자의 선택이 남아 있군.”
그리고 김창훈은 에메랄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2, 3황자는 차기 황제의 자리에서 탈락했고 사람들은 널 황제로 모시려고 하는군. 그런데도 너는 망명을 할 건가?”
김창훈의 말에 에메랄드는 대답을 못 했다. 자신을 뜨겁게 바라보고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 그리고 어느새 수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창훈의 말대로 이대로 2황자나 3황자가 황제가 되면 이들이 모두 어떻게 될지 어느 정도 예측이 되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제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망명 신청. 지금이라도 거둘 수 있을까요?”
“물론. 본인이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 내가 강제로 널 끌고 가면 그건 납치지. 그리고 나는 그런 범죄자가 아니고.”
“…괜히 저 때문에 헛걸음 하셨네요.”
“좋은 구경 했으니 괜찮아. 그리고 애초에 내 목적은 네가 황제가 되거나 말거나 관심 없었어. 나는 저 황자들이 황제가 되지 않으면 그걸로 만족하거든. 솔직히 기회를 봐서 죽이려고 했는데 쓸데없이 겁이 많아서 나서질 않더라고.”
그렇게 말하는 김창훈을 보며 에메랄드가 웃었다.
“그랬죠. 당신의 목적은 애초부터 저와 관련 없었네요.”
“그래도 그때 했던 이야기는 진심이야. 적당히 살 공간 정도는 줄 생각이었으니까.”
그 말에 에메랄드는 김창훈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절, 여기까지 데려와 주시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이 잘 풀린 건 내가 한 일이 아니야. 저기 있는 사람이 한 일이지.”
그 말에 에메랄드가 허리를 피며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무사히 데려와 주시고 여차하면 정말로 저와 제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이 제국을 적으로 돌리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 마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겸사겸사 내 말을 무시한 놈들에게 똥물도 뿌리고.”
그리고 김창훈은 2황자와 3황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죽여야 편할 것 같은데.”
그 말에 두 황자가 모두 겁을 먹으며 물러나자 그 모습을 본 레이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거기까지 하게나. 정말로 자네가 저 둘마저 죽인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하니까.”
“1황자를 죽인 것은 그냥 넘어가는 건가?”
“안타까운 희생 정도로 넘어가지.”
“그냥 병신 짓해서 죽은 거였는데.”
“그래도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이제 죽은 사람인데 말이지. 황실의 명예란 것도 있고.”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건 사양하고 싶군. 안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욕먹고 있는데 이제는 다른 차원의 다른 세계에서도 욕먹는다고 생각하면 그건 싫으니까.”
“차기 황제를 무사히 모셔다 준 호위로서 인정하도록 하지.”
“그러면 오케이. 그리고 저 둘은 정말로 살려 둘 건가?”
“끈질기군.”
“난 후환을 두는 성격이 아니라서.”
“저 둘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자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이제 저 둘은 자신들이 머무는 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고 그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할 테니까.”
“오. 감옥행인가?”
“좀 큰 감옥이라고 해 두지.”
그 말에 김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만족하지. 그러면 이제 길 비켜 줄 수 있나?”
“왜 그러나?”
“차기 황제를 무사히 호위해서 온 사람을 그냥 보내면 섭섭하지 않겠나? 술이나 한잔하지. 다른 차원의 음식에는 흥미가 있어서 말이야.”
“그것도 그렇군. 제군들, 차기 여황을 위한 길을 만들도록!”
“충!”
레이드의 말에 기사와 마법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길을 만들자 그들이 만든 길을 보며 웃어 보인 레이드가 에메랄드에게 다가와 말했다.
“가자꾸나.”
“예, 할아버님.”
그렇게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에메랄드는 김창훈과 함께 황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국 전역에 이 소식이 널리 퍼졌다. 다음 대의 황제는 에메랄드 에트린. 1황녀가 차기 황제가 될 것이라는 소식이 말이다.
* * *
에메랄드는 자신의 동생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고 동생과 껴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의 고생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둘을 보며 파블로가 남몰래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김창훈은 레이드와 함께 손님방에서 서로 마주 본 상태로 앉아 있었다.
“아까는 너무 경향이 없어서 미안하게 되었네. 자기소개도 제대로 못 했군. 나는 레이드 에트린이라고 하네.”
“에트린이라는 성을 보면 당신도 황족인가?”
“5대 정도 전 황제의 친형이지.”
“오래도 살았군.”
“그러게 말이야.”
“그 모습은 회춘이라도 한 건가?”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에게 수명이란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지. 그렇기에 노화도 의미가 없지. 단지 이 모습을 해야 여러 여성들에게 인기가 좀 더 있다 보니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
여러 여성들의 인기란 말에 김창훈은 피식 웃었다. 이에 레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이런, 진실이네. 80살의 할아버지가 말 거는 것과 이렇게 멋진 20대 후반의 청년이 말을 거는 것에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 나와서 말이야. 그래서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네.”
“그렇군.”
“그보다 나는 자네가 더 의외로군. 왜 이곳까지 온 건가?”
“아까 에메랄드랑 이야기한 것 들었을 텐데? 내 말을 무시하고 이 제국의 권력 투쟁에 참가한 놈들에게 똥물을 뿌리려고 온 거지.”
“그런가.”
“1, 2, 3황자. 그들 중 누가 황제가 되느냐를 가지고 우리 쪽 세계에서 제법 소란이 일어나고 있거든. 그런데 난 그런 일에 참가하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각 국가의 수장들이 내 말을 무시하고 일을 벌였어. 수습을 해야 하는데 수습하기 귀찮더군. 그래서 그냥 방치했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짜증나는 거야.”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자네의 말을 무시했으니까?”
“그래.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했는데도 그러더군. 한 10년 정도만 참으라고 했어. 그 다음에는 무슨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지. 그런데 1년을 못 버티고 일을 벌인 거야. 그래서 생각했지. 이 새끼들에게 똥물 한 번 먹여야겠다고.”
“그래서 그 3명의 황자들을 다 죽이기로 했나?”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있나?”
“없지. 아주 좋은 선택이었네. 덕분에 우리도 좋아졌고. 제대로 된 차기 황제가 나왔으니까.”
“서로 잘되었군.”
“그러니 말이야. 일단, 당장은 좀 바쁠 거야. 갑자기 차기 황제가 결정되어 버렸으니 여러 가지로 일이 있거든. 그동안 이곳에서 편히 쉬게나. 어느 정도 일이 정리가 되면 그 다음에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그 말을 하고 레이드가 방에서 나가자 김창훈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럽게 강하네.”
- 그래서 질 것 같냐?
천마의 말에 김창훈이 웃으며 말했다.
“설마요. 제가 이깁니다.”
그 말에 천마 또한 웃었다. 레이드 에트린은 확실히 강했다. 하지만 천마도 김창훈도 자신 있었다. 목숨 걸고 싸운다면 이기는 건 자신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