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뒷정리(1)
집에서 계속 지내던 김창훈은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날이 추운 1월의 날씨였으나, 그의 복장은 단조로웠다. 그럼에도 딱히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능력치 덕분이었다.
체력 능력치가 100을 넘어가며, 더위와 추위를 잘 타지 않게 되었다. 조금 심하게 말해서 영하 10도의 날씨도 그에게는 그저 그런 날씨였으며 영상 40도의 날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아예 추위나 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적당한 청바지 하나에 티, 그리고 얇은 외투 하나를 입고 그는 서울에 있는 한 빌딩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 간판도 이제 바꾸었네?”
과거 국제 헌터 협회가 있을 때,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본부 역할을 했던 곳이 지금은 가디언 대한민국 본부라는 이름으로 간판이 바뀌었다.
“흠. 좋아.”
가디언의 창설 준비는 거의 다 끝났고, 창설식은 올해 예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거기에 맞춰서 과거 헌터 협회의 흔적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왔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1층 로비에서 마이클 킴이 자신을 보고 웃으며 말하는 것에 김창훈은 살짝 놀라서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신 겁니까?”
“가디언의 초대 수장이 오는데 잘 보여야지.”
그 말에 김창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더 챙겨 드릴 것도 없고요.”
“알아. 그냥 위에서 기다리기 심심해서 내려 온 것뿐이야. 그리고 자네가 이곳으로 온다는 게 실시간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거 알고 있나?”
“대략 예상은 갑니다.”
안 그래도 유명했는데, 중국에서의 일로 그는 더 유명해졌다. 심지어 그를 중심으로 한 굿즈도 만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그 부분은 김창훈이 거부하였기에 결국 공식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없었지만 암암리에 음지에서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었는데, 그 부분까지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 유명세를 얻은 김창훈이다. 그런데도 거리를 평범하게 걸어왔으니 곳곳에서 자신의 사진을 찍었을 것이고 대부분 그걸 SNS로 올렸을 것이다.
어디서 자신을 봤다고 말이다. 그것만 본다면 김창훈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서 있지 말고 올라가지.”
“예.”
그리고 김창훈은 마이클 킴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집무실에는 한 사람이 먼저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 사람을 본 김창훈은 살짝 의외라는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습니다, 그림 리퍼.”
리퍼들의 수장, 그림 리퍼가 느긋하게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본 김창훈이 말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마이클 킴이 당신을 부른 것은 내가 요청한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 둘 모두 당신에게 용건이 있는 거죠.”
그 말에 김창훈은 고개를 끄덕인 후 빈 자리에 앉았고 마이클 킴은 김창훈에게 말했다.
“너도 커피 한 잔 할 테냐?”
“괜찮습니다. 그냥 냉수 하나 주세요.”
“그러지.”
그리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냉수를 김창훈에게 건넨 마이클 킴은 냉장고에서 콜라 한 캔을 꺼내며 말했다.
“일단 용건이 가장 급한 사람부터 시작하자고.”
그 말에 그림 리퍼는 살짝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마이클 킴에게 한 후 김창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지만 가디언은 올해 창설이 될 겁니다. 조직개편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만 큰 틀은 다 완성이 되었으니까요.”
“저도 확인했습니다. 애초에 제가 승인했는데요. 모를 리가 없죠.”
아직 정식으로 가디언의 초대 수장 위치에 오르지 못했지만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이 그를 가디언의 초대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저 정식으로 발표를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것은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기에, 가디언의 전체적인 조직의 틀을 정하는 아주 중요한 일에 대해서 당연히 가디언의 초대 수장이 될 김창훈의 허락은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죠. 그리고 그 안에 여전히 리퍼란 조직은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제가 그 조직의 수장이더군요.”
“당신은 아주 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당연한 거죠.”
“하지만 저도 나이가 있으니 이제 슬슬 물러나고 싶습니다. 오늘 만난 것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은퇴란 말에 김창훈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은퇴라고요?”
“예. 국제 헌터 협회의 부패는 저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까 말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저도 그만 쉬고 싶습니다.”
“음.”
그림 리퍼의 은퇴는 작은 문제가 아니다. 매우 큰 문제다. 그가 가지는 위명을 생각하면 이것은 국제 헌터 협회가 사라지는 것과 비슷한 여파를 가지고 올 수도 있었다.
“당신의 은퇴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알고 계시겠죠?”
“예, 물론입니다. 하지만 후임들이 든든합니다.”
그 말에 김창훈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앞으로 20년이 지나도 그림 리퍼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S등급의 헌터로서 강대한 마나를 가진 그는 나이를 잊고 활약하는 노장 중의 노장이었다. 그런 그가 물러난다고 이야기하니 김창훈으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하나만 묻겠습니다. 완전히 이 업계에서 손을 떼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리퍼의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리퍼의 일을 그만두는 겁니까?”
“헌터의 일은 계속 할 건지에 대한 의문이군요.”
“예.”
“헌터의 일은 종종 할 생각입니다. S등급 헌터의 전력의 소중함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 여차하면 나서야죠. 하지만 그 이외에는 최대한 헌터로서의 일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질리도록 싸워왔으니 이제 좀 쉬고 싶군요.”
그림 리퍼의 말에 김창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먼저 은퇴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에 마이클 킴이 김창훈에게 뭐라고 하려고 하자, 김창훈이 그런 그를 손을 들어서 저지하며 말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요?”
“예. 아시겠지만 저는 리퍼란 조직은 더 견고하게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적으로 각성하는 사람도, 인위적으로 각성하는 사람들의 수도 나날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맞춰서 범죄율도 올라가고 어떤 이들은 더욱 음지로 숨어들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만 보자면 제가 은퇴를 하면 안 된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아뇨. 은퇴를 하고 싶다고 하셨으니 그 뜻은 제가 지지해 드려야죠. 그림 리퍼께서도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하셨을 테니까요. 대신 고문 역할로 도와 달라는 겁니다.”
“고문이요?”
“예, 그림 리퍼. 당신을 포함해서 은퇴한 많은 이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 중에서는 정말로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 있죠. 그들의 경험과 노하우는 돈을 주고 배워야 하는 겁니다. 그걸 후배들에게 가르치는 거죠.”
“리퍼 양성 학교라도 만들겠다는 겁니까?”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튜터 시스템이죠. 은퇴자 1명이 신입 1명을 가르친다. 물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지만, 저는 꼭 그림 리퍼가 이 일을 했으면 합니다. 당신이 가진 경험과 노하우는 이대로 사장되기에 너무 아까우니까요.”
“제자를 키우라는 말씀이군요.”
“예. 조건은 이거 하나입니다. 물론 제자는 그림 리퍼께서 선정하시면 됩니다. 그 제자가 어느 정도 컸다 싶으면 그대로 은퇴하시면 됩니다. 그때까지만 참아 주십쇼. 그리고 리퍼의 수장 자리는 바로 물러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간이 많아야 할 테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리퍼의 차기 수장, 누가 했으면 좋겠습니까?”
김창훈의 말에 그림 리퍼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제 생각보다는 가디언을 직접 이끌어 나갈 사람의 생각이 더 중요한 것 같군요.”
“제가 뭘 아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림 리퍼, 당신이 하는 추천이라면 분명 제대로 된 추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리퍼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시고 그곳의 수장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확실하게 알고 계시니까요.”
김창훈의 말에 그림 리퍼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제가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말이죠. 아직은 저도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제 용건은 끝입니다.”
그리고 그림 리퍼가 마이클 킴을 바라보자 마이클 킴은 김창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쩝. 나도 이분하고 같은 의견이다. 나도 그만 뒤로 물러나려고.”
“그러시군요. 후임은 제가 알아서 뽑겠습니다.”
그 말에 마이클 킴이 황당해하며 말했다.
“어째 나는 저분과 대우가 다르다?”
“대한민국은 제가 꽉 잡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후임을 정하는 일이야 쉽죠. 이 나라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몇 있으니까요. 그 사람들 중 한 명 뽑으면 됩니다. 아니면 다른 분들에게 부탁해서 알아봐 달라고 해도 좋고요.”
“허 참. 그래. 네가 다 알아서 해라.”
“그런데 은퇴는 언제 하실 겁니까?”
“올해 3월. 날 좋을 때 나가야지. 말이 나와서 그런데 가디언은 언제 창설식을 할 거냐? 그리고 어디에서 할 건지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그 부분은 어떠냐?”
“대한민국에서 할 겁니다. 말이 나와서 그런데 차라리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에서는 따로 지점을 두지 않고 그냥 가디언의 본부 하나만 두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이 드네요. 괜히 따로 하나 더 만들어서 인력 낭비하는 것보다.”
“가디언 본부를 이곳에 만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미국처럼 땅이 큰 것도 아니니까.”
“이 부분은 따로 상의해 봐야겠습니다.”
“그래라.”
그리고 마이클 킴이 말이 없자. 김창훈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이것으로 용건은 끝인가요?”
“난 끝입니다.”
“나도 끝이다.”
두 사람의 말에 김창훈은 웃으며 말했다.
“식사하셨습니까? 저는 아직 점심 전인데. 괜찮으시면 같이 밥이나 한 끼 하시죠.”
그 말에 마이클 킴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림 리퍼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근처에 있는 적당한 식당으로 들어가서 식사를 먹었다.
세 사람의 식사는 당연히 화젯거리였고, 뉴스에서조차 이 셋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 사람은 점심 식사를 맛있게 하고 난 뒤에 각자 자신들의 할 일을 위해서 헤어졌고 김창훈은 오랜만에 나온 김에 거리를 좀 걷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며 전화를 걸었다.
- 어, 형. 왜?
“비행기표 하나 예약해라.”
- 비행기표? 어디 가려고?
“브라질.”
- 브라질? 거기는 갑자기 왜?
“내가 벌려 놓은 일 뒤처리하려고. 일본은 정리가 어느 정도 되었는데 남미나 북미는 아직이더라고. 그중에서도 남미가 가장 심각하니까 거기부터 정리하고 북미로 올라갈 거야. 너는 비행기표만 예약해. 나머지는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랑 함께 움직일 테니까.”
- 오케이. 더 필요한 건?
“없다. 끊는다. 집에 올 때 비행기표 가지고 와라.”
- 오키.
그렇게 전화 통화를 종료하고 김창훈은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