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외전 22화
“저거 대역 아니지?”
“대역 아닙니다.”
“저희도 정말 놀랐습니다. 정말 저럴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세연의 질문에 다른 랭커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일 판온이 망하는 건 아니겠지.’
이다비한테 밥을 다 먹인 태현은 이세연을 보며 물었다.
“넌 여기서 뭐 하고 있냐? 너도 방송 찍어?”
“난 선수들 데리고 훈련 중인데.”
굶주린 혼돈 퀘스트도 끝났겠다, 대륙 곳곳의 투기장들도 멀쩡해졌겠다, 내년부터 판온 리그는 다시 재개될 예정이었다.
그런 만큼 유성 게임단은 벌써부터 경쟁이 치열했다.
새로 들어온 재능 있는 2군 선수들부터 시작해서 주전 선수들까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경쟁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세연은 팀의 주장으로서 선수들을 데리고 지속적으로 호흡을 맞추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고정된 멤버로만 굴러가는 팀은 위험했다. 다른 선수로 교체하더라도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팀이 강한 팀이었다.
여러 상황에 모두 대비할 수 있는 만큼 더더욱.
‘내년에는 무조건 이긴다. 두 번 이긴다. 절대 이긴다.’
“오. 여기서 훈련을? 좀 부족하지 않나?”
“아니. 여기 훈련하기 좋아. 산맥 초입은 난이도 좀 낮아 보여도 올라가면 각종 페널티 세게 들어와서 난이도 조절되는 데다가 연결된 던전들이 꽤 어려운 편이거든.”
“….”
“….”
이세연의 말에 랭커 커플들은 죽일 듯이 태현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런 곳에 우리를 등산 데이트하자고 데리고 온…!?
“그랬나? 몰랐네.”
“….”
그러나 랭커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약자의 서러움!
“선수들도 왔다니 슬슬 다시 움직이면….”
“김태현 선수!! 뒷이야기 더 해주십시오!”
“맞아요! 너무 흥미진진했어요!”
랭커들은 태현이 다시 일어날 것 같자 기겁해서 발목을 붙잡았다.
이세연은 의아해했다.
“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판온 1 이야기.”
“이세연 선수 이야기도 조금 하셨습니다.”
“오….”
이세연은 지팡이를 들고 언데드 소환시킬 준비를 마친 다음 자리에 앉았다.
“뭐라고 했는데요?”
“…그, 나쁜 소리 안 하셨는데요.”
“좋은 이야기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요?”
“….”
랭커들은 괜히 말했나 싶어서 식은땀을 흘렸다.
싸움 터지는 거 아니야?
‘PD님. 이래도 됩니까? 분량 뽑아야 하는 상황에….’
‘둘이 싸우면 더 좋지.’
‘앗.’
생각해 보니 둘이 싸우면 그건 그것대로 엄청나게 재밌을 것 같긴 했다.
…프로그램 컨셉과는 좀 다르긴 한데 뭐 어떤가.
재밌으면 그만이지!
“이세연 선수가 그렇게 열심히 스카웃을 시도했는데 김태현 선수가 거절했다고….”
“저희가 들어도 좀 너무한 부분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렇죠?”
랭커들의 진심 어린 말에, 이세연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이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는 말이죠.”
‘휴.’
‘살았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랭커들은 용기를 얻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애걸복걸했는데 말 한마디 정도는 들어줄 수도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심했습니다!”
이세연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태현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싫은데 거절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쟤 말은 무시해요.”
이세연은 손을 흔들며 계속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판온 1 끝날 때만 해도 태현한테 당한 놈들이 많아서 태현 욕을 듣기도 쉬웠는데, 요즘은 하도 잘나가서 욕도 듣기 힘들었던 것이다.
“앗. 김태현 선수 아니십니까?”
주장이 던전 안에 들어가서 왜 안 나오나 싶어 따라 들어왔던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태현을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다들 반갑군.”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아, 주장하고 약속한 겁니까?”
“아닌데.”
“미쳤니?”
“죄, 죄송합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주장이 살벌하게 쳐다보자 신인 선수는 꼬리를 내렸다.
“그 김태현 선수와 같이 던전을 돌 수 있다면 영광이다 싶어서….”
“어려운 일 아니지.”
“!”
이세연은 깜짝 놀랐다.
솔직히 말해서 태현이 제안을 받아들일 줄 몰랐던 것이다.
성격만 보면 ‘내가 왜 상대 팀하고 같이 던전을 도나? 미쳤나?’ 소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데….
“진짜 괜찮겠어?”
“물론이지.”
이세연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태현이 슬슬 판온을 접을 생각을 하고 있다고는.
* * *
랭커, 데일맨은 간신히 숨을 들이쉬며 포션을 마셨다.
[체력이 회복됩니다!]
[지구력이…]
[움직임이 빨라집니다!]
[…]
[…]
‘장난이 아니군…!’
대부분의 랭커들이 게임단에 입단할 때 자신감에 넘치곤 했다.
-나 정도면 충분히 주전이지.
-내 레벨이나 직업, 스킬 정도면 따라올 놈이 없겠지!
물론 그런 자신감들은 입단하면 싹 사라지곤 했다.
판온의 쟁쟁한 랭커들을 모아놓은 곳이 바로 게임단.
평소 일반 플레이어들 상대로 뽐내거나 자랑하던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게임단에 들어올 정도면 랭커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평상시에 레벨이나 장비만을 믿고 투박하게 싸워왔던 랭커들은 가장 크게 피해를 입곤 했다.
데일맨은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에 들어갔다.
‘이번에 들어온 놈들이… 큭. 최소한 2군 주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데일맨은 저번에 새로 들어온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처음에는 ‘나 정도면 뚫고 올라간다 충분히’ 했던 데일맨이었지만, 지금 보니 1군은커녕 2군도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눈 감았다 뜨면 어디서 이름 들어본 유명한 랭커들이 새로 들어오니….
“잠깐. 쟤는 누구야?”
데일맨은 처음 보는 궁수 랭커를 가리키며 말했다. 옆에 있던 동료가 고개를 돌리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몰라. 새로 들어온 선수든가 아니면 테스트 중인 선수든가 하겠지.”
새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선수도 많은 데다가 테스트를 위해 훈련에 끼는 선수들도 많아서 하나하나 다 알 수가 없었다.
쉭!
그런데 궁수 랭커의 솜씨가 심상치 않았다.
스킬 대신 평타로만 때리는데도 몬스터한테 계속 치명타를 성공시키며 족족 쓰러뜨렸다.
그걸 본 데일맨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이거….’
“야. 봤나?”
“뭘?”
“저거. 저거 보라고.”
“뭔데 자꾸….”
옆에 있던 동료도 처음에는 성가시다는 듯이 대꾸하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깜짝 놀랐다.
데일맨도, 데일맨의 동료도 원거리 딜러 포지션.
같은 포지션에 뛰어난 선수가 들어온다는 건 그만큼 경쟁이 심해진다는 의미였다.
2군 생존이 목표인데 지금….
“설마… 설마 우리보다 잘하진 않겠지.”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오냐?”
두 랭커는 침을 삼켰다.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려고 해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강한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
“…아직 컨트롤이 어설프군.”
데일맨은 궁수 랭커한테 접근해서 말을 걸었다.
데일맨의 동료는 뭔 개소린가 싶어서 황당해했다.
‘저게 어설프면 네가 던지는 표창은 눈뭉치냐?’
그러나 동료도 곧 데일맨의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흔들기!
‘그렇군!’
보아하니 상대는 새로 들어왔거나 테스트 삼아서 들어온 랭커.
부담을 주고 심적 압박을 느끼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위에서도 평가가 달라질 테니….
“그래? 알겠어.”
“그 정도 실력으로는 여기서 살아남기 힘들걸.”
“그래? 알겠어.”
“좀 더 약한 활을 쓰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장전 시간이 지금….”
상대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데일맨은 당황했다.
‘안 흔들린다고?’
이제 막 들어와서 이리저리 고민이 많을 상태일 텐데 저렇게 무표정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데일맨의 충고를 받는 게 좋을 거야. 이래 보여도 여기서 꽤 오랫동안 활약하고 있거든.”
동료가 데일맨을 돕기 위해 나섰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궁수 랭커는 이들이 짖든 말든 무시하고 자기 사냥만 했다.
‘이 자식이….’
‘두고 보자.’
데일맨과 동료는 작정하고 이를 갈았다.
“휴식 끝. 다시 사냥 시작한다. 시간, 스킬, 사냥 등 다 체크되니, 집중해서 하도록.”
유성 게임단 코치가 신호를 보냈다. 선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계적으로 기록되는 던전 레이드!
1군 선수도 절대 방심할 수 없는 혹독한 사냥이었다.
-먼저 잡아!
-오케이!
데일맨과 동료는 작정하고 새로 들어온 궁수 랭커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여럿이서 손을 합치면 견제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먼저 타겟팅하고, 어떻게든 먼저 쏘기만 하면 호흡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파티 사냥에서 이러는 건 미친 짓이었지만 이건 파티 사냥이 아니라 게임단의 테스트였다.
‘손발이 어지러울 거다.’
‘어딜 쏴야 할지 모르겠지?’
두 선수는 먼저 선점하면서 신인의 행동이 꼬이기를 기다렸다.
스킬을 실수하거나 사격을 실수하면 바로 탓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궁수 랭커는 흔들리지 않았다.
침착하게 기다리다가 빈틈이 나는 순간 하나씩 쏴서 정확히 쓰러뜨렸다.
“…?!”
“!!!?”
두 선수는 경악했다.
뭐 이런…?
“잠깐 정지!”
“???”
“뭡니까?”
“김태현 선수가 잠깐 합류한다고 하는군. 좋은 기회다.”
“!!!!”
자리에 있던 선수들이 술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 김태현 선수가 합류해서 지켜본다니?
절대로 평범한 이유일 리가 없었다.
‘이건 설마….’
‘확실해. 테스트다! 확인하려는 거야!’
김태현 선수가 시간이 썩어나는 사람도 아니고 여기 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유성 게임단의 부탁을 받고 선수들을 판별하려는 게 분명했다.
데일맨과 동료는 눈빛을 교환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절대 물러설 순 없다.
-더 과격하게 무너뜨려. 저 궁수 랭커가 있으면 우린 못 올라간다고.
-당연하지!
그러거나 말거나 궁수 랭커는 자기 활만 점검했다. 마치 자기는 이 테스트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보여서 더 얄미웠다.
“김태현이다!!”
“쉿. 김태현 선수가 네 친구냐?”
“미, 미안. 저번에 당한 적이 있어서….”
스타 선수는 등장만으로 분위기를 뒤바꾸는 힘을 갖고 있었다.
김태현이 바로 그랬다.
태현이 앞에서 등장하자 방금까지 거들먹거리던 랭커들도 자세를 겸손하게 바로잡았다.
“만나서 반갑다. 내가 누군지는 굳이 말할 필요 없을 거 같고…. 하던 사냥 계속하도록. 뒤에서 따라갈 테니.”
태현의 말에 선수들은 다시 사냥을 시작했다.
아까 포지션 그대로 던전을 쫙쫙 밀고 나가는 파티는 그야말로 호쾌했다.
‘김태현 선수가 봐서 그런지 의욕이 잔뜩 들어갔군.’
보고 있던 코치도 그렇게 생각할 만큼 선수들은 매우 집중력 있는 상태였다.
평소보다 몇 배는 빠른….
-제대로 막아!
-오케이! 몸으로 막아서 못 잡게 해!
-이 자식, 네가 돋보이려고 하지 말고 제대로 막으라고!
-내가 할 소리다! 지금 네놈 혼자 올라가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지?
“?”
뒤에서 다른 놈들 사냥하면서 따라가고 있던 태현은 의아해했다.
유성 게임단 선수들이 뭔가 좀 이상했던 것이다.
“쟤네 왜 저러는 건지 알아?”
“왜 그러세요?”
“지수를 계속 방해하고 있는데. 미리 사전에 정해둔 건가?”
태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임단 회장 손녀가 파티에 있으면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왜 저렇게 노골적으로 방해를?
혹시 일부러 저렇게 하는 건가?
자기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그런 거라면 정말 대단하군.’
“아닌데?”
태현의 말을 들은 이세연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야?”
“그런 방해하는 훈련을 왜 해? 어디에 쓸모가 있다고?”
“…어디든 쓸모가 있지 않나?”
“그런 훈련 할 바에는 다른 거 한 번 더 하지.”
태현은 머쓱해졌다.